[칼럼] 살과 피를 내어 주시는 주님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태복음 26:26-28)”.
유대인들은 회식을 할 때, 전식을 끝내고 주식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인이 빵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드린 후, 손님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이것은 내 몸이라’라는 말씀은 몸이라는 신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류 구속자로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특히 28절에 나오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자신이 아닌 많은 사람을 위하여 피를 흘리는 것이라고 말씀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구약 모세의 시대에 ‘언약의 피’를 흘리는 행위는 짐승을 잡아 그 피를 제단과 백성들에게 뿌림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을 체결했던 것입니다. 그 피가 곧 ‘언약의 피’인 것입니다.
이 언약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시기로, 이스라엘은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약속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겨 그 언약을 지키지 않았던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인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다시 하나님과의 언약이 새롭게 체결된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식구들은 매주 몸 된 제단에 나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는 단순 반복적인 행위가 아니라, 영원히 기억하고 기념하라는 예수님 말씀에 따라 행해지는 거룩하고 참되고 신실한 믿음으로 드려지는 산 제사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통해 성찬을 제정하시면서 “너희는 내 몸인 떡을 받아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 몸의 피니 받아 마시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가시면서까지, 다시 한 번 당신을 내어 주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친히 희생물이 되셔서 단 한 번의 제사로 영원한 효력을 나타내는 십자가의 제사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그 말씀을 몸소 실행하셨습니다.
눈물겨운 아버지의 사랑을 그린 조창인 작가의 소설 <가시고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가시고기는 부성애를 대표하는 물고기입니다. 가시고기는 세 종류(큰 가시고기, 가시고기, 잔가시고기)인데, 큰 가시고기는 바다에서 살다 해마다 이른 봄이면 산란을 위해 하천으로 올라옵니다.
둥지가 완성되면 암컷은 그곳에 알을 낳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끝냅니다. 반면 수컷 가시고기는 알을 먹기 위해 모여드는 천적들과 침입자를 물리치고 알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앞지느러미로 부채질하며 끊임없이 둥지 안에 새 물을 넣어줍니다.
부화한지 5일 정도가 지나면 새끼들은 둥지를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며칠 후 둥지를 떠났던 새끼들은 죽은 수컷 주위로 모여듭니다. 자기를 위해 희생한 아비 가시고기를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비의 살을 먹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우리는 수컷 가시고기에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하지만 감동으로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생명의 떡을 나누시는 식탁으로 우리를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 바로 만찬을 통해 주님을 기억하도록 하십니다.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사천 명과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떡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본 것도 바로 떡을 떼어 주실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식사 자리를 통해서 그리고 교회에서 예배를 통해 예수님을 기억하며 생명을 이어갑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살아갑니다.
가시고기가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기꺼이 죽음으로써 자신의 살을 내어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예수님께서 내어주시는 그 고귀한 사랑에 우리 신앙인들은 고요한 감동과 묵상으로, 생명을 나누고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 시대는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 무덤덤한 시대로 변하여, 가시고기처럼 생명을 이어주는 사명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교회와 바깥 세상에까지 영향이 미쳐, 사회는 더욱 혼탁해져 갈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흘리신 피의 사명을 따라 살아가려 노력해야 하는데, 나의 안일과 이기적인 욕심 즉 내 생각과 뜻만으로 살아가려 무던히 애쓰는 모습을 지금도 예수님께서 슬퍼하고 계심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과 희생을 깨달아 더욱 최선을 다해 믿음을 지켜나가야 하지만,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연합하여 세상의 여론과 세상의 뜻을 좇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신은 놓아버린 채 주일에만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고, 날마다 이어지는 삶 속에서는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경고하신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믿음의 선배였던 우리 조상들의 순교의 피로 구원에 이르렀던 이 나라는 호의호식하며 자신의 영욕에만 몰두하여 헛된 시간을 낭비하는 교회 지도자들 때문에 다시 한 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정신을 차릴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신실한 믿음 없이, 그저 무사안일로 세상이 누리는 영화 속에 안주하는 이 시대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의 숨가쁜 행동 때문에 한탄이 절로 나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럴진대, 지금 나라 안에서 군림하는 국회의원들의 참상은, 믿는 성도들의 바르지 못한 믿음생활의 증거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으로서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오로지 권력 찬탈에만 열정을 쏟으며, 국민들의 행복과 안보, 평화로운 삶의 질 향상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들의 안위와 권력과 부를 축적하기 위한 목적과 수단으로 국회의원 놀이를 하고 있으니, 염라대왕마저 국회의원과 자신의 왕 직위를 바꾸자고 할 정도로 오늘날 입법기관이 갖는 혜택과 권력은 참으로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면서까지 사랑하신 그 행위를 본받아, 정말로 국민을 위한 봉사의 기관인 입법기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옛 속담처럼, 국회는 헌법에 명시한 대로 책임을 다해 모범을 보여주는 표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