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물질과 권력의 노예가 되지 말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누가복음 12:33-3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물질에 대한 염려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 몸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예비해 주실 것입니다. 큰 권능으로 능히 하시는 이가, 작은 일을 못하실 까닭이 없지 않겠습니까?
위 본문 말씀을 요약해 보면, 제자들이 몸을 위해 필요한 두 가지 필수 요건인 음식과 의복이 가장 중요한 것인 양 행동하니, 예수님께서 먹을 것과 입을 것 때문에 걱정해서는 안 된다고 일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근심 없는 새들도 먹이시고 꽃들도 입히신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는 훨씬 더 좋은 것으로 공급해 주시지 않을까요?
근심은 사람을 더 오래 살게 해 주지 못합니다. 보다 나은 생활 조건을 위해 격심한 생존 경쟁을 하는 이 세상이라도, 예수님의 제자라면 먼저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구원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는 것이니, 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현세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몰두하고 집착하여, 결국 자신의 탐욕만 키워 나가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본문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인간이 생명과 재물의 주인인 양 착각하면서, 자신이 가진 재물의 노예가 되어 나중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날이 올 것입니다.
특히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만의 안락한 삶을 위해 재물을 축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누가복음 12:18-19)”.
어리석은 부자는 땅에서 많은 소출을 수확한 후 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조금의 감사하는 마음조차 없이, 오로지 자신을 위해 더 많은 재물을 쌓아둘 곳간과 좀 더 현세에서 누릴 풍요로운 삶만을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세의 삶에만 집착해 재물만 쌓고자 하는 부자의 유형을 두고, 자신을 위해서는 물질을 모으지만 하나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초대교회 공동체 성도들은 아무도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공동으로 소유했으나,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사도행전 4:32-34).
그 시대 사람들은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27)”는 말씀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 나라가 곧 도래하여 완성될 것이라는 종말론적 삶의 태도를 날마다 마음에 새기고 살았기 때문에, 현세적으로 가진 것에 집착하는 탐욕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노력과 욕망은 허무하고 헛될 뿐임을 신앙인들에게 깨우쳐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현재 가진 것과 앞으로 가질 것에 대한 집착으로 경쟁을 일삼지만, 소중한 형제들 및 이웃들과의 유대관계는 너무 쉽게 허물어 버립니다. 이러한 사례들로 세상은 범죄 속에 살아가는 듯한 위기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신앙인과 비신앙인들은 반드시 다가올 마지막 날을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만이 생명과 이 세상을 구원할 주인이심을 잊지 말고, 형제와 이웃들 간에 서로 소중히 여기고 축복하며 살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잠언 30:7-9)”.
모세는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신명기 8:12-14)”라고 했습니다.
아굴은 하나님 말씀에만 의지하는 삶을 살기를 소원하면서, 자신과 모든 사람들이 유의해야 할 죄악된 행실들을 언급합니다. 특히 욕심으로 죄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대목이 참으로 놀라울 뿐입니다.
모세 역시 아굴의 잠언에도 기록돼 있듯, 욕심으로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러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거침없는 탐욕과 교만으로 세상의 종말이 이미 근처에 와 있는 듯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생육하며 번성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일러 주셨지만, 인간의 탐심은 끝이 없어 창조된 지구를 마구 훼손하면서까지 부를 축적합니다.
지구 온난화를 시작으로 황폐해진 환경은 인간의 마음 속까지 허물고, 교만과 탐욕은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살해합니다. 이웃 간에 넘쳐나는 정으로 서로 사랑하며 도와야 할텐데, 거침없는 욕설과 폭행, 그리고 살인까지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 모습이야말로 지구의 생명이 다 되어가는 듯 땅의 울림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필자는 학교 지킴이로 근무한지 벌써 8년째이지만, 아직 10원 한 장 월급이 인상된 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방학이나 학생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는 공휴일 같은 경우에는 급료에서 제하고 계산합니다. 지킴이의 하루 일당은 39,000원에 불과한데, 8년 동안 한 번도 인상된 적이 없습니다. 매년 결정하는 최저시급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그러나 가장 모범적인 자세를 보여야 할 사람들이 고위직 공무원들은 무노동 무임금 원칙도 없이, 그들만의 호화스러운 권력을 누리고 있으니 참으로 보기 민망할 정도입니다.
국회의원들은 일을 하지 않아도 한 달에 1천만 원 넘는 돈을 수령합니다, 게다가 비서들의 월급과 사무실, 해외 출장비까지 거침없이 수령합니다. 같은 나라 사람인데, 어쩜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은 어째서 가장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지, 참으로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누릴 권력은 다 누리는 최고의 머슴들이 이래도 됩니까? 숱한 죄를 짓고도 모르쇠로 일관하며,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당과 자신들의 미래를 위한 아이디어만 짜낼 뿐, 민초들의 삶은 외면하는 저 파렴치한 국회의원들을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할까요?
자기 자녀들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면서 미국에 대한 분노는 거침없이 표출하고, 서민들이 자신의 당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망발도 서슴치 않습니다.
여론조사를 핑계로 이제 두 달 지난 대통령을 탄핵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저들을 보고만 있어야 할까요? 탐욕으로 나라를 망가뜨리는 저들에 대해 수수방관과 침묵을 유지해야 합니까?
“돌들도 소리지르리라” 하고 외쳐야 합니다. 국회의원 배지 하루만 달아도 연금을 100만 원 이상 받는 저들은, 자신들을 위해서라면 없는 법을 만들어내는 데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국민을 위하겠다는 말은 사탕발림일 뿐이지요.
엉터리 여론조사도 그저 보고 있으시렵니까? 언론들은 대통령과 정부에서 하는 일에 대해 국민들에게 알릴 의무가 있지만, 방송조차 하지 않습니다. 대신 대통령이나 정부에서 소소한 실수만 터지면 대문짝만 하게 보도하는 저 무지몽매한 언론들을 그저 보고만 있을 것입니까?
노사 문제는 회사와 노동자들끼리 해결할 사안이지, 노총이 왜 끼어들어야 할까요? 노총이란 일하지 않고 근로자들을 현혹시키고, 회사에 큰 손해를 입혀가며 뒤에서 총질이나 하면서 귀족처럼 생활하는, 좀비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제 더 이상 저들을 방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협상이 잘 안 되면 고용노동부에서 나서야지, 노총이 왜 필요합니까? 노동부나 노동청에서 협상을 위해 노력하면 모두 해결될 일을, 왜 노총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그들만의 호화스런 잔치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학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를 숨김 없이 가르쳐야 하는데, 이념에 사로잡혀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하고 편향된 교육을 일삼고 있어, 향후 대한민국의 앞날이 심히 걱정됩니다.
설교를 통해 역사를 바로 가르치는 김진홍 목사님 같은 분이 계셔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다른 중대형 교회 목사님들은 왜 나라의 역사에 침묵하시는지,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을 비워내지 못하고 물질의 욕심과 권력의 맛을 본 권력자들의 욕심 때문입니다. 때문에 순진한 일반인들은 고단한 삶을 이어갑니다.
부하게도 말고 가난하게도 말아달라는 잠언 속 아굴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너무 부유해져서 탐심으로 하나님을 잊을까, 너무 가난해져서 도둑질을 하거나 죄를 범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드리는 간구입니다. 그의 기도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이 보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권력욕 역시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의 그 탐욕의 결말은, 지금도 계속 탐욕과 욕심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그 욕심은 사람들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점령해 우리를 괴롭힙니다. 물질과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날마다 말씀으로 무장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때입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