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욱의 ‘연애는 다큐다’ 110] 잊고 싶고, 잊히고 싶은 그대에게…
1
기억은 사람을 즐겁게도 하지만 괴롭게도 한다. 돌아보면 마음 아픈 일부터 부끄러운 일, 속상한 일 등등 똑 떼어 지우고 싶은 기억들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실패의 기억, 상처받은 기억, 부끄러웠던 일, 아픔과 수모를 당한 기억, 슬퍼서 울었던 기억 같은 것도 있지만, 본의든 아니든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기억, 잘못 뱉은 후회스러운 말, 하지 말았어야 할 일과 행동 등도 많다.
특히 연인 사이에 그런 일이 많이 생길 수 있다. 아니, 거의 예외가 없을 것이다. 연인이나 부부는 삶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날카로운 발톱을 감추지 못한 채 좁은 공간을 함께 지낸 시간 때문에, 상처도 나눌 수밖에 없고 묻어둘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부부라면 치유하고 만회해 볼 기회가 있지만, 지금 함께하고 있지 않은 지나간 사람에게는 “미안했다, 잊어 달라, 잊어 주마” 말할 기회도 없다. 그래서 좋지 않은 기억은 더 선명해지고 아쉬움도 남을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알아 달라며, 자기를 기억해 달라며 각종 매체를 통해 자기를 알리고 각인시키기 위해 애를 쓴다. 생계를 위해서든 공익을 위해서든 당연한 몸부림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어떻게든 자기 이름을 남기고, 중요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이 기본적인 바람이겠지만, 생각해 보면 나쁜 기억의 주인공으로 남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까 싶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이유가 있어서든 없어서든 자신을 잊어주길 바라면서 산다. 과거 실수로 나쁜 일을 꾸미거나 가담한 사람, 어쩌다 자신의 잘못이 널리 알려진 사람, 씻지 못할 굴욕을 당한 사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아무리 해명해도 진실이 닿지 않아 괴로운 사람도 있다. 그리고 치열한 연애와 결혼에 실패하는 등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다.
잊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디지털 시대가 더욱 어렵다. 아무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자료들은 언제 자신을 공격하는 칼이 될지 모르고, 사람들의 마음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잔인하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 신분 세탁 후 먼 나라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은 이들도 있다. 그래서 ‘잊힐 권리’라는 용어도 생기고, ‘디지털 장의사’라는 신종 직업도 등장했다.
최근 자녀의 사진을 공개하는 SNS 활동을 셰어런팅(sharenting)이라고 하는데, 공유(share)와 육아(parenting)의 합성 신조어다. 원치 않는 어린 시절 흑역사가 고스란히 남은 것을 못 견딘 캐나다의 13살 아이가 부모를 고소한 일로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기도 했다.
나중에 연예인이라도 된 사람들은 성형 전 사진이나 학폭의 증거가 되는 사진 등으로 낭패를 겪기도 한다. 옛 연인과 찍어 올린 사진 같은 것은 누군가 저장을 했거나 이미 2차, 3차 공유가 이루어졌다면 일일이 지우기 힘든데, 이 역시 조금 유명한 이들이 겪는 괴로움이다. 불법 게시물은 관련 업체를 통해 지워도 한계가 있고, 많은 비용이 들기도 한다.
2
시대가 변하고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문득문득 어떤 표현이 진부해지고 시대착오적으로 들릴 때가 있다. 5년 전, 10년, 20년 전에 쓰인 글과 책을 보면 요즘의 성인지 감수성이나 사회적 평등 인식 변화 기준에 미달하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프랑스 화가 마리 로랑생(1883-1956)은 버려진 여자보다, 떠도는 여자보다, 심지어 죽은 여자보다 불행한 여자는 ‘잊혀진 여자’라는 시를 썼지만, 요즘 패러다임에는 맞지 않는 면이 있다(‘잊힌 여자’가 맞는 표현). 누군가에게 추억되고 기억에 남는 일은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이제 많은 이들이 제발 나를 잊어달라고 말하는 세상이니까.
오래전부터 유행하는 말인 ‘흑역사’는 말 그대로 어두운 과거다. 누구에게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달의 이면처럼 어두운 부분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 어두움이 빛을 다 삼킬 수도 있을 만큼 크다면 아예 내 존재 자체가 잊히고 사라지길 바라게 될 수도 있다. ‘이불킥’이라는 말도 자신이 한 행동을 집에 와서 곱씹어 보면 부끄러워서, 자다가 문득 떠올리고 이불을 걷어 찰 정도로 후회한다는 것이다.
그런 흑역사나 이불킥 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고백이거나 모르는 이의 번호를 알아내려다 부끄러움을 당하는 수준의 일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무겁고 지우기 힘든 흔적일 수도 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겠지만, 후회 없이 꿈을 꿨노라 말하기에는 악몽과 회한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잊히는 것이 훨씬 큰 행복일 수 있음을 알고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보통 성도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모든 말과 행동과 실수를 심판받는다고 하지만 사실 그런 말씀은 없다. 성도는 모든 죄에서 깨끗해진 사람이고,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는 살아서 보응을 받고 징계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가 한 일을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판단하시지만 이는 보상의 심판이라, 구원만 받을지 상을 함께 받을지만 결정하신다(고전 3:15).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기억하시지만 과거에 대한 것은 아예 언급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조들은 부도덕한 직업이나 끔찍한 죄와 불순종, 실수 등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고통이나 아픔의 기억들은 다 잊히게 된다. 각자의 정체성은 남지만 더는 아프지 않은 때가 온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자는 불성실한 종처럼 생생한 기억의 고통을 겪는다.
“너희는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둠 속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 25:30)”.
어둠 속에서 울며 이를 가는 이유는 자기 후회와 하나님에 대한 원망 때문이다. 고통은 기억을 전제로 한다. 살아서도 지옥에 계속 머물면 안 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힘을 내야 한다. 이스라엘에 주시는 주의 말씀이 하나님의 속성을 알게 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당황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네가 젊은 시절의 수치를 잊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너를 만드신 이는 네 남편이니 만군의 주가 그의 이름이니라 그는 네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불리리라(사 54:4-5)”.
성경은 잊어버리는 일에 대해 자주 경고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은혜를 기억하라고 여러 번 말씀하지만,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이킨 자의 실수를 잊어주신다. 그러므로 내가 잊고 싶은 일들이나 실수와 타인에게 준 피해는 살아서 갚고, 사죄하며, 삶을 개선해야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다면 영영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참된 용서는 잊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과거를 지우고 싶고 흑역사를 덮고 싶은 이들에게 작은 위안을 주고 싶다. 나 역시 지나친 기억력으로 지난 일들에 대한 후회가 많다. 젊은 혈기로 좌충우돌하고 경솔한 판단으로 벌인 크고 작은 결정에서 실패도 많이 맛보았다.
그런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준 피해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다른 이들보다는 스스로에게 관심이 많아 자신이 나쁘게 기억되는 일에 마음을 쓴다.
반대로 피해를 당한 것이 명백한 사람도 큰 잘못을 한 가해자에 대해 저주하고 분노할 여력 없이, 오히려 자신의 부끄러움과 작은 잘못들에 집중한다. 그것은 가해자가 자신을 가스라이팅한 탓도 있지만, 이제는 스스로를 검열하고 가스라이팅하듯 자책에 자책을 더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동안 살면서 느낀 것은, 소심함 때문에 네거티브한 일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억력이 일반적인 수준보다 발달해 있다는 사실이었고, 자연히 무언가 잊고 싶고 잊히길 바라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제외한 상당수 사람들은 나름대로 소심이들의 염려보다는 잘 살고 있으며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다 자기 살기 바쁘고, 금세 다른 일에 관심을 두면서 잊어버리는 일이 의외로 잦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이다.
남들은 내게 생각만큼 관심이 없다. 나는 선명하게 기억하지만, 이미 잊히고 만 일들도 많다. 어떤 때는 모두가 나에 대한 나쁜 이야기만 하는 것 같을 때도 있지만, 내가 대대로 회자될 만큼 사람들에게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님을 알 필요가 있다. 연애 후에도 (남자들이 더 많이 그러는데) 헤어진 연인이 나땜에 종종 괴로워하거나 나와의 기억 때문에 가끔은 울 거라는 생각은, 참으로 해맑은 생각이다.
또한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는 노랫말처럼 기억의 포인트가 다르고 관점도 달라서 저마다 자기 방식으로 편리하게 저장하기 때문에, 서로가 품은 사건의 해석은 물론 정황과 팩트까지 전혀 다를 수 있다. 그것은 연인과 부부가 다툴 때 완전히 엇갈린 증언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사소한 일들부터 점점 따질 의미가 퇴색하고 독백으로 변하게 되므로, 잊을 수밖에 없는 조각들이 된다.
꼬리를 무는 걱정을 끊을 시점이 필요하다. 아무리 잊고 싶다고 애써도 바뀌는 것은 없음을 인정하고 기억의 방에서 분류하고 묻어두는 작업이 필요하다. 대개 걱정하기 시작하면 그 걱정에 살이 붙고 새로운 시나리오와 일이 발전할 경우의 수까지 시뮬레이션하게 되는데, 그 생각에서 벗어나면 꿈에서 깨듯 허무할 정도로 아무 일도 아닌 경우가 많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연애의 흑역사도 일종의 염려이며 근심이다. 염려는 성경이 권장하지 않는 일이다. 내일의 염려는 내일이 할 것이다(마 6:34).
나쁜 기억은 떨치기 어렵지만 의도적으로 다른 일에 집중하고, 떠오를 때마다 다른 것을 생각하면, 시간이 지났을 때 어느새 잊게 되는 것들도 많다. 반복학습의 반대 원리다.
<두 마리 늑대의 우화>에서처럼 두 늑대가 싸울 때 어느 것이 이길지 묻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당신이 먹이를 주는 늑대’다. 그러므로 나쁜 기억들에 먹이를 주지 말아야 한다.
세월은 분명히 약이 되는 것을 믿고, 망각의 축복을 바라며 자기 일에 땀 흘리며 열심을 다해 살 일이다. 한편 나 또한 상대에 대한 너그러움으로 용서하고 잊어줄 때, 내 실수와 흑역사도 남들에게서 잊히는 관용을 바랄 수 있는 것 아닐까.
연애와 사랑이 아니면 기억 때문에 고통스러울 일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오늘도 잊히고픈 기억, 아픈 사랑, 부끄러운 지난날 때문에 괴로운 이들은 상기했으면 한다. 사람들의 관심은 다른 것으로 쉽게 옮겨가고 또 지나간다.
할 수 있을 때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잘못한 건 사과하고, 서운한 건 용서하자. 그리고 과거보다는 오늘을 생각하자. 잊히고 싶은 과거란 오늘을 잘못 산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앞으로 잘한다는 결심은 필요 없을 것 같다. 미래란 밀물처럼 끝없이 다가와 현재가 되었다가 다시 과거로 남기 때문이다.
잊고 싶고 잊히고 싶다면, 단조롭고 지루한 삶, 도무지 기억에 남을 것 같지 않은 일상에 감사하자. 주어진 하루하루 조용한 생활을 보내다 보면, 나중에는 그것이 가장 소중한 기억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김재욱 작가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등 40여 종
https://blog.naver.com/woogy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