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칼럼] 도원결의(桃園結義) 3형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전조에 낳은 장수 모두가 영웅이다(前朝出了英雄尉). 도원에서 결의했으니 그 성은 유, 관, 장이다(桃園結義劉關張). 그 셋이 뜻이 맞아 제갈량을 군사 삼고(他三人請了軍師諸葛亮) 신야와 박망파를 불살라버리고선(火燒新野博望屯) 상양성을 또 깨뜨렸네(抱打上陽城). 원망하건대 주유를 낳았으니, 제갈량이 또 웬일인고(怨老天旣 生瑜又生亮).”
박지원이 청나라에 갔을 때 한 청년이 불러준 노래라 한다.
유비, 관우, 장비가 복숭아 과원에서 의형제를 맺었다는 고사가 소개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주 인용되는 장면이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세 사람은 혈육보다 더 충성과 의리를 지켜온 인간관계다. 유비가 수없이 실패하고 시련을 겪어도, 관우와 장비는 유비를 도왔다. 특히 관우는 조조로부터 탁월한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유비를 따랐다.
이런 일화도 있다. 훗날 한중왕으로 즉위한 유비는 황충을 후장군으로 임명하려 했다. 후한에는 ‘사방장군’이란 관직이 있었다. 左右前後 즉, 좌장군, 우장군, 전장군, 후장군으로 무인에게는 최고의 벼슬이었다. 유비는 좌장군 마초, 우장군 장비, 전장군 관우, 후장군 황충을 올리려 했다.
이때 제갈량이 걱정했다. “황충은 겨우 1년 활약한 신참이고 관우는 오랫동안 주군(유비)을 섬긴 노장인데, 두 사람을 같은 서열로 임명하면 관우가 섭섭할 것입니다.” 당시 관우는 형주에서 독립 세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때 손권이 관우에게 혼담을 제안했다. 자신은 유비와 관우를 동격으로 본다는 암시를 준 것이다. 만약 관우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유비에겐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권력 세계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제갈량이 관우의 심정을 헤아려 건의한 것이었다. 관우의 관직을 높여주거나 섭섭하지 않도록 모종의 조치를 취해주라는 권고였다.
이 말을 들은 유비는 “내가 직접 그에게 설명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유비가 직접 형주까지 갈 수는 없기에, 문신 비시(費詩)를 보내 관우를 설득했다. 그 내용을 보자.
“국왕에게 관직이란 정치적인 수단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관직으로 사람에 대한 진심을 판단해선 안 됩니다. 한중왕(유비)과 당신(관우)은 한 몸처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왔고 화(禍)와 복(楅)도 동고동락해 왔습니다. 당신이 관직을 거부하면 왕(유비)은 분명히 애석해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관우는 즉시 관직을 수락하고 받았다. 유비와 관우 및 장비의 관계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들이 단순한 이해(利害)관계로 맺은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의 밑에 충의(忠義)와 인간적인 교감이 굳게 뿌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복숭아밭에서 만났는지, 의형제를 맺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국 탁현에 가면 이 세 사람이 도원결의를 했다는 장소가 복원돼 있다. 그러나 사실 여부보다 세 사람의 우정이 보여주는 감동이 더 중요하다. 하극상과 배신이 난무하던 난세에 이런 우정과 협력은 두고두고 감동 소재가 된다.
정치에는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란 말이 자주 등장한다. 공직에 임명된 자들이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국가와 국민에게 충성해야 하고, 임명권자에게 올곧은 건의와 충언도 하면서 당장보다 긴 역사에서 국가에 유익하고 정권(정부)이 성공하도록 해야 될 것이다.
정권과 공직자는 퇴임 후에야 정확한 평가가 나온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되기 바란다.
“놀음판 돈은 새벽 문턱 나갈 때 봐야 안다”고 했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공직자 임명과 그들의 처신이 중요하다. 만능의 무결점 인간이란 없겠지만 진영 밖에서도 등용하기 바란다. 아직도 곳곳에 좋은 인재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김형태 박사
한남대학교 14-15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