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동기와 방향, 그리고 선택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필요한 것이 바로 계기(동기)일 것입니다. 동기가 부여된다면 방향이 제시되고, 방향이 정해지면 선택은 필수가 되며, 선택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을 통해 최후 카드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목표로 하는 선한 것들을 이뤄주시며,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결정해 주십니다.
계기란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바뀌게 되는 원인’, 동기는 ‘어떤 일이나 행동을 일으키게 하거나 마음을 먹게 하는 원인이나 계기’를 각각 말합니다.
행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목적 없는 동기는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개인의 기질, 자라나는 환경, 자아상을 비롯한 수많은 요인이 개입될 가능성은 있지만, 일반적으로 어떤 목적을 더 강하게 필요로 하거나 원할수록 그 목적을 더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다고 봅니다.
인지심리학자들은 사람이 어떤 동기를 갖고 있으면, 그 동기와 관련된 분야의 인지 능력이 민감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강한 성취욕을 가진 사람들은 ‘성취’와 관련된 낱말이 스크린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도, 재빨리 그 낱말을 알아보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보다 동전을 터 크게 보거나 더 크게 기억합니다. 배고픈 사람은 음식의 자극을 다른 자극보다 더 크게 느낍니다. 문명의 발전은 부분적으로 그 문명권 사람들의 성취동기 수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방향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적 의미는 ‘어떤 방위를 향한 쪽’입니다. 동기부여나 계기가 이뤄지면 방향이 설정되고, 그 다음에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선택이란 여럿 가운데 골라 뽑이며, 일반적으로 가능한 몇 개 행위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 행하거나, 행위 자체를 완전히 거부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윤리적 선택에는 옳고 그름, 선함과 악함, 더 나은 것과 더 나쁜 것 등의 양자택일이 있습니다. 최종 결정이란, 어떤 일에 대한 방향이나 태도를 분명하게 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는 계기와 방향까지는 좋았으나, 선택이라는 최후 카드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본인은 물론 이웃과 나라에까지 낭패를 겪는 경우를 봅니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의 남편 아비멜렉은 자신이 살던 유다 베들레헴에 심한 흉년이 들어 식구들을 데리고 이방 나라인 모압으로 이사를 하여 거류하다 결국 아비멜렉은 죽습니다. 두 아들도 결혼했지만 자식도 낳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이젠 며느리 둘과 자신만이 남아 고향인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던 중, 시어머니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각자 고향인 모압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고 간청했습니다. 며느리 중 한 사람인 오르바는 고향으로 갔고, 남은 며느리 룻은 어머니를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그토록 돌아가라고 강권하며 애원했지만, 며느리 룻은 나오미가 더 이상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 않도록 ‘명언’을 남깁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 지라(룻기 1:16-17)”.
며느리 룻은 오르바처럼 돌아갈 수 있는 여건이나 계기, 그리고 방향이 정해졌음에도 어머니와 함께 가겠다는 선택을 함으로써, 어머니의 고향인 유다로 돌아와 보아스라는 남편을 만났고, 이스라엘의 가장 존경받는 위대한 다윗 왕의 계보에 오르는 큰 영광을 얻게 됩니다.
젊은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계기와 방향이 설정됐음에도, 그의 명철한 지혜와 올바른 판단과 옳은 선택 결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여삐 여기사 보아스를 만나게 해주셨고, 보아스를 통해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을 탄생케 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는 단초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특히 며느리 룻은 여자의 몸으로 고향과 조상들이 숭배하던 신들을 버리고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시어머니 나라의 백성이 되고, 시어머니가 묻히는 곳에 묻히겠다는 설득력 있는 말은 가히 여자가 아니라 남자들도 하기 힘든 것입니다. 어려운 난관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지혜와 언변에 정말 탄복할 따름입니다.
룻 같은 며느리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놀라운 재주를 겸비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외교장관을 해도 무리 없이 목적을 달성한 여장부입니다. 룻의 명철한 판단과 올바른 선택은 우리 신앙인들은 물론, 비신앙인들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예수님을 끌고 갔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오늘 밤 닭 울기 전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말씀을 들었지만, 결코 자신은 그리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째 부인한 뒤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올라 밖에 나와 심히 통곡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냥에 스승을 팔아넘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양심 운운하며 죄를 면피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 끝나는 날까지 그의 이름은 용서받지 못한 죄인으로 길이길이 남게 됐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수제자로서 참으로 비겁한 짓을 했지만, 깊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옳은 선택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우뚝 섰습니다. 하루에 3천 명을 회개시키는 놀라운 기적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처형되실 때, 두 강도 중 하나는 죽음 직전 주님을 영접하는 옳은 선택으로 천국을 차지하는 놀라운 쾌거를 이룩했습니다. 반면 다른 편 강도는 죽으면서까지 주님을 욕하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어둠의 세계로 가고 말았습니다.
이는 선택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여실히 증명하는 사건이자 교훈으로 남겨지게 됐지만, 여전히 그 선택을 아직까지도 미루는 분들이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과거에는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부모님과 가족 공동체로부터 물려받았으나, 현 시대는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가치관이나 신념이 무엇인가? 내가 무엇에 헌신하고 있는가를 보면, 내 가치관과 신념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이나 말로 내 가치관이나 신념은 이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자기 합리화를 위한 포장용 가치관이나 신념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에 헌신하고 있는지 봐야 더욱 명확히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선택하고 헌신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의 가치관이고 그것이 내가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숭배합니다. 무엇을 숭배하고 따를 것인가 심사숙고하고 철저히 고민하고 선택해야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중이 따르고 선택한 것을 쉽게 따라가는 군중심리가 항상 작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중이 선택하고 따라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선택일까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대중들이 숭배하는 황금과 권력, 외모는 허무하고 덧없는 것입니다. 황금을 얼마나 가지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아무리 많은 황금이라도 인간은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또 얼마만큼 권력을 가지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을까요? 비바람이 명령을 들을 수 있을까요? 외모가 만족스러우면, 평생 즐겁게 살 수 있을까요?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영원한 세계의 가치관과 신념을 중요시하는 선택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선택이 곧 우리의 신앙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