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넷째 주일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매미처럼 처절하게, 풀벌레처럼 고요하게.”
화요일 저녁 모처럼 큰 마음을 먹고 산행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선광현 목사님이 조금 늦게 도착한다고 해서 혼자 먼저 걸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로 오는 성도들을 만났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저녁 8시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오는 분들이었습니다. 성도들과 마주치면서 인사를 하였습니다. “아, 기도하러 오시네요. 저는 오랜만에 산행을 하러 갑니다.” 그런데 순간 멈칫했습니다. 성도들은 기도하러 오는데 저는 산행을 가고 있었으니까요. 순간 “나는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중세시대 수도사 성 버나드가 말한 ‘하나님과 나의 합일의 4단계’가 떠올랐습니다. 첫째, 나를 위한 내 사랑의 단계입니다. 둘째, 나를 위한 하나님 사랑의 단계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 사랑의 단계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위한 내 사랑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합일의 경지에서 나를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주님과의 합일의 경지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며 하나님 사랑이 내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밟고 나를 사랑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숨 쉬고 먹고 마시는 것조차 주님과의 깊은 합일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산행을 할 거야”라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길을 걸으며 예수님을 태운 나귀를 생각했습니다. 이건 오리겐이나 이레니우스가 했던 풍유적 해석인데, 잠시 그걸 받아들였습니다. “내 한 발은 온유의 발이 되고, 내 한 발은 겸손의 발이 되리라. 내 한 무릎은 기도의 무릎이 되고, 내 한 무릎은 순종의 무릎이 되리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산을 올라갔습니다.
산에서는 풀벌레들이 얼마나 위대한 합창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순간 여름 내내 처절하게 울어대던 매미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1-2주 전만 해도 목이 터지도록 사랑의 연가를 불러대던 매미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어느 순간 저의 기도는 잠시 멈추고 사색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그 옛날 신학생 시절 무등산에서 기도했을 때는 왜 풀벌레 소리를 듣지 못했을까. 매미 소리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 그때는 저의 인생이 매미처럼 처절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고요한 밤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지는 풀벌레 소리가 하나님을 향한 기도 소리로 들리고 찬양 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만큼 저의 삶이 성숙해지고 감성의 지평과 사색의 여유가 생겨났다고 할까요.
저는 정상에 올라와 벤치에 앉아 기도를 하였습니다. “주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맑은 공기를 마시며 기도할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살아있음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땀을 흘릴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풀벌레 소리와 함께 고요한 기도를 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언제까지 이렇게 땀을 흘리며 산행을 하고 또 이 땅에서 기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살아있는 동안에 때로는 매미처럼 처절하게, 때로는 풀벌레처럼 고요하게 하나님 사랑의 연가를 부르겠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문득 산에 올라오다가 마주친 이주연 집사님이 생각났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소개해 주신 분입니다.
집사님은 기도하러 교회에 오는데 저는 산행을 하러 가서 조금은 겸연쩍은 마음으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집사님, 우영우 드라마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기도는 잘하셨나요?”
그런데 집사님의 첫 마디가 저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습니다. “목사님, 혼자 산에 가셔서 어떡해요. 신변 보호를 해 드려야 하는데…. 우리 목사님 혼자 산에 가시면 어떡하냐고 집사님들과 걱정을 하였어요.”
순간, 이렇게 담임목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걱정해 주는 성도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매미는 7-8년 동안을 땅 속에 있다가 성충이 되어 잘해야 1-2주를 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어떻게든 짝을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2세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렇게 처절하게 연가를 부르는 것입니다. 입추가 지나면 저녁에도 더 애처롭게 구애의 연가를 부르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저 역시 제 인생의 겨울이 오기까지 때로는 매미처럼 처절하게, 때로는 풀벌레처럼 고요하게 기도하고 사명의 노래, 목양의 연가를 부를 것입니다. 그런 묵상을 하는 동안, 선 목사님과 송 집사님이 뒤늦게 도착을 하였습니다.
그날 밤은 정말 산속에서 홀로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고요 속에서 드린 목양의 연가요, 적요의 기도였습니다.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