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있는 것에 최선 다하다 보면, ‘존재’를 놓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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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한승의 러브레터] 사탄의 시험 2-2. 높이 높이 가다 혼자가 되다

▲예수의 두 번째 시험(The Temptation of Christ, Sandro Botticelli, 1093).
▲예수의 두 번째 시험(The Temptation of Christ, Sandro Botticelli, 1093).

지난 시험 내용에서, 사탄이 우리에게 두 가지 시험 문제를 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첫째는 변화의 시험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이미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다시 옛사람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래서 돌의 가치를 떡으로 바꾸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스스로의 가치를 전락시키는 삶으로 변화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자신의 가치가 빛나는 순간은 세상과 다름인데, 세상을 닮아가는 모습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완전한 변화에는 올바른 질서가 필요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변화의 시험에 필연적 시험 내용 가운데 하나는 ‘실용의 시험’입니다. ‘뭐가 쓸데 있는가?’라는 주제 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쓸모 있어 보이는 것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존재를 놓칩니다. 내 생각에 떡처럼 보이는 일에, 내 배를 채워주는 일이 쓸데 있다 생각하니 돌은 가치 없어집니다.

잠깐 길 좀 편히 가자고 산을 뚫고 파헤침에는 용인이 쉽습니다. 미련하게도, 휴가 때면 가는 곳은 돌과 바다와 나무와 산으로 향하면서, 삶에서는 떡을 우선시합니다. 에서가 보인 팥죽의 삶이 우리 모습입니다.

정말 필요한 것, 쓸데 있는 것은 즉흥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넌 쓸데 있다, 없다’로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죄인인데 우리에게 ‘거룩하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가치를 알아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가치를 알아주시는 유일한 분, 그 하나님의 가치를 놓치고 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1. 오늘은 두 번째 시험을 나누려 합니다. 바로 ‘높이의 시험’입니다. 높이의 시험에 꼬이면 생기는 무서운 현실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두 번째 시험을 제시합니다. 누가복음 4장 5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증거합니다. “예수님을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예수님의 목적은 모두를 구원하는 일입니다. 천하만국은 구원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에게 부여받은 사명을 사탄이 훼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수정합니다. “이끌고 올라가”.

시험은 끝나지 않습니다. 9절에 보면 세 번째 시험에서도 성전 꼭대기로 올라가게 합니다.

2. ‘오름의 시험’, 우리는 높이의 시험 앞에 봉착해 있습니다. 그것은 늘 반복됩니다.

높이의 시험이 다다르는 곳은 ‘소유’입니다. (다음 주에 살펴보려 해요.)

사탄은 예수님을 높이 끌고 가 나에게 절하면 모든 것을 줄 것이라고 속삭였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욕심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높이, 더 많이’입니다.

“더 잘해야 한다, 더 알아야 한다, 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뇌리에서 말씀의 가치는 사라집니다.

일단 먼저 올라가고 난 뒤에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생각한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가 아닌 세상의 높이를 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거기서 우리는 무서운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음을 말입니다. 예수님이 올라간 성전 꼭대기. 사탄이 이끌고 간 가장 높은 곳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단지 예수님과 예수님을 유혹한 사탄뿐입니다.

늘 부대끼며 살아왔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밑에 보이는 사람들은 내가 정복해야 할 대상처럼, 개미처럼 작아집니다.

3. 사랑하는 여러분,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일단 더 성장해야 한다고 부추기는 속삭임에 속아 살지 마세요.

뭔가 높아 보이는 그 사람을 좇아 살면, 여러분도 그 사람 곁에 있을 거라는 착각을 벗어야 합니다.

그 높이에 올라가면, 비로소 여러분이 마주하는 것은 내 옆에 아무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곳에 있는 것은 단지, 혼자 된 외로움과, 외로움으로 인도한 사탄의 속삭임뿐입니다.

결국 그래서 예수님은 골짜기에 인생의 목적지를 두셨습니다. 그분은 모두가 버린 골고다 골짜기에 사역의 중점을 두셨습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여덟 번째 편지에서, 삼촌 악마는 조카 악마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가 인간 영혼 하나를 제 것으로 확보하기 위해 꼭대기보다 골짜기에 더 의존한다는 걸 알면 아마 좀 놀랄 게다. 예수가 특히 아끼는 인간들은 그 누구보다 길고도 깊은 골짜기를 통과해야 했다. 그 이유를 알겠느냐?

예수는 피조물들이 제 힘으로 서게 내버려둔다. 흥미는 다 사라지고 의무만 남았을 때도 의지의 힘으로 감당해낼 수 있게 하겠다는 속셈이지. 인간은 꼭대기에 있을 때보다 이렇게 골짜기에 처박혀 있을 때 오히려 그 작자가 원하는 종류의 피조물로 자라가는 게야.’

4.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올라가 올라가 외칩니다. 찬송가처럼 ‘독수리같이’ 올라가는 것에 취해 있습니다.

실은 높이 올라가는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면서,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 채 말입니다.

내면 가득히 천하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일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천하를 얻을 줄 알았지만, 실은 온통 내가 버린 골고다만 가득합니다. 그렇게 혼자가 되어 버립니다.

5. 우리는 높이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높이 세워지는 아파트를 보며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가장 높이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입으로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실제 삶에서 무수히 많은 골고다를 버리고 등지고 있지는 않은가요?

옆에 있던 냄새나는 타자, 불편한 타자는 아래로 아래로 둔 채, 그 위로 올라가 새로운 공간과 공기를 마시며 자유로움을 착각한 존재가 된다면, 우리는 본래 함께였던 이웃들이 사라지는 삶을 향해가는 것일 뿐입니다.

6. 가장 낮은 곳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상, 그곳은 살기 좋은 곳일까요?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초호화 인테리어들이 즐비해도,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라지면 지옥이 아닐까요?

미가서 2장 12절 말씀은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흥미가 아니라 찔리는 말씀입니다.) 미가서는 모레셋 사람 미가, 즉 예루살렘 서남쪽 30km에 위치한 작은 농장마을 출신의 미가가 증거한 말씀입니다.

그 시대 지배자들은 멸망 직전인데도 탐욕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왕이 바뀌가 바뀌어도 변치 않았습니다. 서로를 빼앗고 집을 빼앗는 삶을 향해, 하나님은 ‘이것은 너희가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땅에 소망을 주셨습니다. 소망의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의 양 떼 같이 하며 초장의 양떼 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미가서 2:12)”.

절망의 땅에 남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소망뿐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무슨 단어로 끝나는가? ‘크게 떠들다’. 그 소망의 땅에는 사람들이 크게 떠드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7. 곰곰히 말씀을 정독하다, 멈춰야 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 소리, 나를 높이 여겨주는 소리에만 취한 시대는 사람들의 소리를 소음으로 여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아이들 목소리도 소음이 된 시대입니다.

어린 시절 골목 하면 떠오르는 광경은,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입니다. 집집마다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입니다. 아이들은 뛰어 노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소음이 되었습니다. 내 생활에 방해가 된다며, 이웃을 향해 폭언과 폭행을 가합니다.

이웃이 내는 ‘의도치 않은 소리를 소음으로’ 여기면서, ‘내가 의도적으로 타인을 향해 내는 폭언과 폭행 일그러진 얼굴에는 전혀 민감하지 않은 세상’. 우리들의 일그러진 마음은 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인천작가회의 회장 손병길 씨는 이렇게 스스로를 돌아보며 글을 썼습니다. ‘가끔, 고민을 나누는 이웃이 있는가? 음식을 나눠 먹는 이웃이 있는가? 꼭 친한 이웃이 아니더라도 만날 때마다 거리낌 없이 인사를 나누는 이웃이 있는가? 나는 이 질문들 앞에서 서슴없이 서러워진다.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 순간, 나는 완벽히 이웃을 잃어버렸다.

이웃 잃은 자들의 슬픔. 그래,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동네 사람들과 나는 이물 없는 마을에서 살았다. 앞집 옆집 가리지 않고 이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동네 아이들을 키웠다. 집집마다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마을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어깨를 걸듯 옹기종기 모여 살던 집들이 한 층 두 층 쌓이더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층아파트가 됐다. 아이들이 뛰놀던 골목길도 수직으로 일어섰다. 왁자한 발소리가 사라졌다. 가파르고 각진 계단이 됐다.

이웃과 함께 웃으며 나누던 생활 속 이야기들은 어찌 됐는가? 모든 소리는 층간소음이 되고 고소·고발 사건이 됐다. 사소한 일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극심한 분쟁이 되어간다. 크고 작은 경조사조차 마을 일이었던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마을을 잃어버렸다. 이웃도 잃어버렸다. 우물쭈물하다가 그만, 혼자가 되어 버렸다.’

완벽히 이웃을 잃어버린 이유를 손병길 씨는 이렇게 회개합니다. ‘우물쭈물하다가 그만 혼자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삶은 소리가 사라진 각진 계단으로 이루어진 삶입니다.

8. 너무도 당당히 붙어있는 노 키즈(No Kids)존. 옆 테이블 아이가 시끄러우면, 예절 교육을 못받은 아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스스로는 떠들고 자랐으면서 이제 떠들 공간이 없어진 아이들에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아이가 떠드는 ‘당연함’을 수용 못해주는 어른은, 어른 교육을 못받았나 봅니다.

대체 왜 이런 삶이 되었을까 생각해보니 간단합니다. 수평을 일구고 살았어야 할 사람들이 이제 수직적 공간에서 행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내 옆집 옆집이 아니라,
내 위의 집 내 아래의 집.

위로 올라갈수록 커리어가 높아진다고 착각하는 세상. 독립적 공간을 사랑하는 우리의 실상은 누군가 이웃이어야 할 사람을 짓밟고 짓밟고 또 짓밟아 올라가 결국 왜 아무도 내 곁에 없느냐고 아우성을 치는, 아니 어쩌면 그 아우성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력과 인정, 결국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면서도 타자를 인정할줄 모르는 높이의 삶. 그러나 결국 휴가철 가는 곳은 소음을 소리로 여겨주는 시골에 가서, 내가 잊어버린 넓이의 삶에 대한 여유를 되찾고 오지 않습니까.

9. 삶에서는 여전히 소리를 소음으로 여기고 또 다시 위로 위로 향해 가면서 골고다를 버리고 있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리 삶을 향해, 미가서 2장 13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13.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

이것이 소망입니다. 하나님이 선두에 가신다. 여기 선두(로쉬)는 층의 꼭대기입니다. 무너진 우리의 수평을 위해 예수님이 수직 낙하하셨습니다. 우리가 버린 골고다를 향해 예수님은 선두로 향하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것은 낮은 곳에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이가 아닌 낮음을 말씀하시는 것은 경쟁과 눈치, 속임과 스스로를 드러내다 외로운 인생이 아닌,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경험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높이오르는 것은 언제나 목마르지만, 채움받는 것은 언제나 흘러 넘칩니다. 흘러 넘쳐 내 주변까지도 변화하게 되는 놀라운 삶으로 초대되는 것입니다.

10. 교회는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배에 있어 중요한 자세는 ‘정숙과 침묵’이 아닙니다.

생명샘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주의가 산만한 어린이를 둔 부모가 있었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아이인데, 당연히 그 아이와 함께 예배드림이 부모의 마음에는 불편함입니다.

세상에서는 언제나 자식교육 못시켰다고 생각하며 손가락질받아 무거운 부모 마음은, 마찬가지로 정숙을 예배의 주 요소로 가르치는 한국교회에서 더 위축됩니다.

거룩하고 장엄한 예배 시간에 뛰어다니는 아이를 보면서 불안해 하는 부모는 예배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마치 죄인이 된양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정숙이 중요한 예배의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소음이 소리가 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11. 거룩의 의미는 ‘죄인된 자에게 향한 하나님 말씀’입니다. 죄인을 향해 ‘너도 거룩하다’는 것, 그것이 거룩의 정체성입니다.

거룩의 삶은 그에게 오롯이 주어진 책임이지, 우리가 목소리로 규정짓는 정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당탕탕 뛰어다니는 아이를 보고서도 그 행동을 제지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진심을 향해 ‘너도 거룩하다’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판단받아 만신창이 된 심정으로 찾아온 부모에게, 그 아이가 진심으로 수용되는 넓이의 공간에서 부모는 비로소 너른 마음을 만납니다.

그 낮은 곳, 가장 넓고 깊은 곳에 내 모든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뿐 아닙니다. 그 누구의 어떤 죄성도, 고막을 찢는 괴성도 수용해줄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 도중 우당탕탕 강대상을 가로질러 나가는 여청년이 있습니다. 그 모습도 그 소리도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

12. 교회에서 여러 분들을 초대하여 말씀을 듣는 일이 많습니다.

그것은 저 스스로가 듣는 종의 자리임을 잊지 않고, 교우들에게 우리 교회 밖에서 역사하시는 더 크신 하나님을 경험시켜 드리기 위함입니다. 더불어 이곳에 오시는 분들에게는 말씀을 증거할 기회를 열어, 건물과 건물이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여러 지체들을 초대하다 보면, 마음 아픈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름이 알려진 상당히 많은 간증자, 사역자들이 크고 높은 곳을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초대 메시지에 아예 답도 안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답변서도 진심된 목회의 공유나 목적의 나눔 없이, 시간과 사례의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방송과 큰 무대, 대형교회와 사례비, 그것이 하나님 부르심의 정직하고 중요한 기준이라면 말씀과 간증 시간에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목소리를 낼 때는 가장 낮은 환경에 있던 자신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삶에서는 큰 것을 좇습니다.

삶의 목소리와 강단에서의 목소리가 일치되지 않으면, 그것이 소음입니다. 그곳에서는 낮은 곳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해질 리 만무합니다.

여름과 겨울 휴양철이 되면 간혹 초대해 주시는 교회와 집회가 있습니다. 초대를 응할 때는 계절별로 한 곳만 정합니다. 맡겨주신 사역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저를 필요로 하여 부르는 곳이 있을 수 있기에,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사례비는 대부분 받지 않습니다. 그래야 규모가 작은 교회도 부담없이 저와 함께할 수 있고, 저 역시 무엇이 우선인지 잊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가 중복됐을 때도 원칙이 있습니다. 큰 집회가 우선이 아니라, 먼저 불러주신 곳입니다. 크고 작음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높고 낮음은 하나님 기준이 아닙니다.

그중에 믿음이 적은 자들이 삶에서 높이와 돈, 인기와 명예만 추구하다 외로워진 이들이, 잠시라도 내가 돌아서야 할 곳이 어디인지 깨달을 수 있다면 어떨까요.

뿐만 아니라 저와 함께 하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높이를 좇는 삶에서 멈춰 하나님의 채워주심 자리에 함께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제게는 이미 우당탕탕 소리내어주는 아름다운 지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13.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목소리를 주심은, 여러분이 높이, 더 높이 올라가게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소리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구석구석 넓이의 공간 모두에게 울려퍼지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심은, 아름다운 소리와 나를 인정해 주는 속삭임을 들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소외받고 판단받아 찢어진 괴성을 지르는 이의 소리를 듣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우리 마음도 깊어지고 넓어질 것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실력, 인정, 가치와 같은 높이를 추구하는지도 모른채 살았다면, 여러분이 버리고 있는 골고다를 향해 다시 가시기 바랍니다.

높이의 삶, 그곳으로 인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취하면 결국 여러분을 고립시키고 외롭게 만들 뿐입니다.

골고다를 향하는 결정을 내린 즉시, 눈을 들어 보십시오. 선봉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계십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소리를 잊지 마십시오. 그곳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치시고도 “다 이루었다” 외치신 주님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는 소음이 소리가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물쭈물하다가 그만 혼자 된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장애인의 날 기념예배에서 말씀을 전한 류한승 목사. ⓒ크투 DB

▲장애인의 날 기념예배에서 말씀을 전한 류한승 목사. ⓒ크투 DB

류한승 목사
생명샘교회, AMCM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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