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올바른 판단과 끊임없는 기도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누가복음 18:3-8)”.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주 내용은 어떠한 환경과 여건이 나를 괴롭힐 찌라도 절대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믿고 쉼 없이 기도할 것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특히 누가복음 18장의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는 기도생활에 있어 인내와 확신을 의미합니다. 거듭되는 교훈에도 영적 우매함을 떨치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천국 시민의 생활 원리와 구원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의 어떤 무엇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서만 온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정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가 불의한 재판관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인간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 중 불의한 재판관과 한 과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말씀 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올바른 판단’이라는 단어가 4번이나 나옵니다. 재판관에게 지속적으로 말하는 과부는 정말 징그러운 찰거머리처럼 재판관을 끈질기게 괴롭힙니다.
오늘의 주인공 과부는 아마도 돈 문제를 가지고 왔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러나 재판관은 뇌물을 바라면서, 여인의 가련한 문제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여인은 너무나 가난해서 바칠 돈이 없었고, 유일한 무기는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조르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과부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굳건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결단력을 보임으로써, 불의한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재판관에게 지속적으로 나아가 부르짖는 과부의 행동은 오롯이 하나님께 청하는 또 다른 모습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특히 기도는 예수님과의 솔직한 만남이자 솔직한 대화입니다. 이 만남과 대화는 신앙적으로 바라볼 때 예수님의 개방성에 나 자신의 마음을 개방함으로 솔직한 만남과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께 대한 의지와 신뢰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 의지와 신뢰가 선행되지 않기에 기도가 힘들다고 신앙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기엔 나 자신의 인내심이 너무 약한 것도 사실입니다. 기도하기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기도하기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기도의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예배를 통해, 감사를 통해, 속죄 행위를 통해 기도를 드릴 수 있지만, 하나님께 대한 근본적 의지와 신뢰가 깊은 내면에서 울리며 느껴오는 것이 신실한 기도입니다.
자연 동굴 속 바위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지면 청아한 소리가 나듯, 하나님이라는 바위에 나의 기도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 그래서 내 영혼의 한 방울이 하나님께 스며드는 것, 그것이 기도의 진실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깊은 내 마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울림이 기도라면, 예배 중 습관적으로 주위 사람들 이목을 끌기 위해 내뱉는 형식적 기도에는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신실한 기도는 겸손한 기도, 신뢰의 기도, 끈기 있는 인내의 기도, 주님의 시선에 주목하는 우리 신앙인들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오늘 불의하고 매정한 재판관과 끈질긴 과부와의 싸움을 볼 수 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는 둘 다 ‘황소고집’입니다. 하지만 더 집요한 과부의 승리로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끈질긴 과부의 기도가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을 자비로 바꿔 놓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다가와 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미완성인 상태에서 승리에 찬 종말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중간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박해와 고통 앞에서 그 날이 너무 더디 오는 것 같고 주님께서는 너무 멀리 계신다는 부정적 생각에서 오는 실망감과 좌절감, 두려움이 밀려올 수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사도행전 3:2-6)”.
주님를 부인하고 생업으로 돌아갔던 베드로가 병자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도망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돈이 많은 부유한 사람이었다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과연 일으켜 세울 수 있었을까요? 행여 일으켜 세울 때 앉은뱅이가 일어나지 못했다면, 얼마나 우스운 꼴이 되었겠습니까?
하지만 베드로는 확신에 찬 신실한 기도와 용기 그리고 믿음이 있었기에,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놀라운 기적과 3천 명을 회개시킨 명설교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 말과 행동의 본이 되는, 이 시대 목회자들을 향한 모범 사례 아닐까요?
벳새다 뜰에서 많은 무리를 위하여 한 소년이 가져온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가 남은 기적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먹을 것이 없다는 제자들의 말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할 음식은 고작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라고 합니다.
만약 제자들에게 5천 명을 먹일 수 있는 돈이 있었더라면, 과연 이러한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물론 제자들이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하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은 오롯이 신실한 기도와 확신에 찬 믿음만이 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공생애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더라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도록 명령하십니다.
오늘 불의한 재판관과 한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는 오늘 이 시대를 향한 외침입니다. 죄를 지어도 아무 감각이 없고, 하나님을 믿노라면서도 행함이 없으며,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눌린 자들과 어려운 이웃을 향한 긍휼의 마음은 돌덩이로 변하고, 주님을 또 다시 십자가 형틀에 매다는 이 시대 중직자들과 불의하고 사악한 사람들을 향해, 과부는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까지 끈질기게 매달려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