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을 가는 이유

|  

[하민국 칼럼] 오랜만에 꾸린 배낭

▲지리산국립공원 10경 중 1경 천왕봉 일출 모습. ⓒ국립공원공단

▲지리산국립공원 10경 중 1경 천왕봉 일출 모습. ⓒ국립공원공단

엊그제는 기생 눈썹 같은 그믐달이 행주대교에 매달려 유유히 흐르는 세월의 강을 도강(盜江)하더니, 어느새 잘 성근 사내의 육감처럼 둥근 달이 되어 단풍을 넘는다.

아무리 유속 같은 세월 속절없다지만, 우리의 일상은 얼마든지 진한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소중한 만사연의 일생이다. 자칫 그날이 그날 같은 환경 안에서 지루함을 느낄 수 있으나, 그런 중에 변하고 변하는 것이 세상만사 정한 이치이고 보면 오늘이라는 시간은 다시는 오지 않을, 풍요롭게 채워야 할 존귀한 생명의 시간이다.

그래서 인생은 오늘이 소중하다.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기에, 모두들 다가올 병사(病死)의 시간조차 까맣게 잊고 살아간다. 설령 회한의 그날이 성큼성큼 다가올지라도, 지금 이 순간 생명으로 오늘을 걷는 것은 가장 소중한 희열이다.

인생은 누구나 한 치 앞을 측량할 수 없는 피조물의 연약함을 지녔다. 그러나 창조주의 불꽃같은 지킴으로 안식할 수 있는 은혜 또한 피조물의 것이어서, 모든 피조물은 얼씨구 좋구나, 좋다 하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나그네 길을 걷는다. 그래서 인생은 어떤 환경에 존립하든지 창조주의 품안에서 푸르른 날이다.

이름 모를 들꽃의 향연은 벌써 아득한 옛 기억으로 서러운 별리의 고개를 넘었고, 이글이글거리는 햇살을 어깨에 메고 예고 없이 소나기를 쏟아내던 그 여름도 파도에 휩쓸렸다.

만추(晩秋)다. 옷깃을 여미고 다정으로 걸어야 할 시골집 돌담길에 쌓이는 낙엽의 시간에 섰다. 천년 애환을 듣다가 실어증에 걸린 당산나무 그늘 근처 호젓한 찻집 창에 턱 궤이면, 곱고 높은 하늘 구름 정겹다. 산들바람 지난 자리마다 꽃단장한 신부의 얼굴처럼 낙화를 앞둔 잎새의 조화는 창조주의 경이로움으로 탄성이 절로 난다.

실로 오랜만에 배낭을 꾸린다. 지리산을 향하는 여정은 벌써부터 설레임이다. 스무 살 정열을 삭이며 오른 산, 대학 동아리들과 무리지어 오른 산, 일곱 살 아들의 고사리 손을 잡고 으른 산.

계절마다, 상실의 때마다 무심히 찾게 되는 산, 무심의 세월 지난 혼돈의 가슴으로 성큼 다가온 산, 그 산의 둔중한 품에 안겨 통곡이라도 해야 할 애증들을 몽땅 털어놓고 내려올 그 산은 그 자리에 변함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다.

지리산은 이미 가을을 단장한 겨울이다. 지리산을 왜 자주 가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그 산은 실의와 좌절, 고뇌와 근심, 투기와 허영, 인연과 별리, 나눔과 봉사, 지혜와 명철, 희망과 비전, 무소유와 해탈의 무심까지 모두 내려놓을 수 있는 거대한 소각장이 있다고 대담하기 싫다.

하민국 목사
웨민총회신학장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구독신청

에디터 추천기사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한국교회 비전대회’

선교 140주년 한국교회 “건강한 교회 만들고, 창조질서 수호를”

복음은 고통·절망의 역사 속에서 민족의 희망 돼 분열·세속화 얼룩진 한국교회, 다시 영적 부흥을 지난 성과 내려놓고 복음 전하는 일에 달려가며 다음세대 전도, 병들고 가난한 이웃 돌봄 힘쓸 것 말씀으로 세상 판단하며, 건강한 나라 위해 헌신 한국교회총연…

 ‘AGAIN1907 평양대부흥회’

주님의 이름만 높이는 ‘제4차 Again 1907 평양대부흥회’

탈북민 500명과 한국 성도 1,500명 참석 예정 집회 현장과 이후 성경 암송과 읽기 훈련 계속 중보기도자 500명이 매일 기도로 행사 준비 1907년 평양대부흥의 성령 역사 재현을 위한 ‘AGAIN 1907 평양대부흥회’가 2025년 1월 6일(월)부터 11일(토)까지 5박 6일간 천안 호서…

한기총 경매 위기 모면

한기총 “WEA 최고위층 이단성 의혹 해명해야”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정서영 목사, 이하 한기총)이 WEA(World Evangelical Alliance) 최고위층의 이단성 의혹에 대한 해명을 요청했다. 2025 WEA 서울총회 조직위원회 출범을 앞두고 한기총은 13일 입장문에서 “WEA 서울총회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WEA 국제이사…

김종원

“다 갈아넣는 ‘추어탕 목회’, 안 힘드냐고요?”

성도들 회심 이야기, 전도용으로 벼랑 끝에 선 분들, 한 명씩 동행 해결 못하지만, 함께하겠다 강조 예배와 중보기도 기둥, 붙잡아야 제게 도움 받지만 자유하게 해야 공황으로 섬기던 교회 결국 나와 책 속 내용, 실제의 ‘십일조’ 정도 정말 아무것도 없이 …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제42회 정기총회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새 대표회장에 권순웅 목사 추대

세속의 도전 속 개혁신앙 정체성 확고히 해 사회 현안에 분명한 목소리로 실시간 대응 출산 장려, 청소년 중독예방 등 공공성 노력 쪽방촌 나눔, 재난 구호… 사회 책임도 다해 총무·사무총장 스터디 모임으로 역량 강화도 신임 사무총장에는 이석훈 목사(백석) …

저스틴 웰비 대주교

英성공회 수장, 교단 내 ‘아동 학대 은폐’ 논란 속 사임 발표

영국성공회와 세계성공회 수장인 저스틴 웰비(Justin Welby) 캔터베리대주교가 아동 학대를 은폐했다는 스캔들 속에 사임을 발표했다.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에 따르면, 웰비 대주교는 12일(이하 현지시각) 영국성공회 웹사이트에 게재한 성명에서 “찰스 3세의 은…

이 기사는 논쟁중

인물 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