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이단자들 23] 롤라드 신앙운동 (2)
위클리프 사상 존중하고 따르는 사람 롤라드인
교회와 사제 대신 ‘성경’ 신앙과 행위 최고 권위
교회와 국가까지 롤라드 신앙운동에 위협 느껴
결국 비난받고 파문되고 추방당해 이단자 되다
2. 롤라드인들
롤라드인들은 위클리프의 사상을 존중하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롤라드(Lollard)라는 말은 ‘중얼거리는 자’를 뜻하는 중세기 네덜란드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유럽 대륙에서 이 용어는 경건한 체 하지만 이단성을 지닌 채찍질 고행자들, 베긴회, 프라티겔리파, 스웨스트리온파와 같은 집단을 지칭했다.
영국에서는 이단을 모두 포괄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로마 교회에 반항하면서 중얼대는 불평분자들을 일컫는 용어였다. 중세 후기 영국인들은 위클리프주의자들, 특히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새로운 신앙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을 경멸조로 비하하여 ‘롤라드인들’이라고 불렀다.
롤라드 신앙운동은 교회개혁을 외치는 공동체 형성에서 출발했다. 위클리프가 세상을 떠난 뒤 말년에 시간을 보내던 루터워드에서 옥스퍼드 학자들과 사제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었다. 런던의 감독 코트니는 이 사실을 알고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금하고, 옥스퍼드의 롤라드파 주요 인사들을 탄압했다. 이때부터 이 운동 가담자들을 ‘롤라드인들’이라고 불렀다.
롤라드인들은 학식 있는 자들, 교육을 받지 못한 농민들, 교황과 로마가톨릭교회의 권위를 부정하는 자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은 화체설 교리를 비판하고 제도화된 교회 의식들과 교리들을 거만한 접신술(接神術) 또는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사술(邪術)로 여겼다. 로마 교회 사제의 부당한 학대에 울분을 품고 저항하는 자들, 정치적인 성격을 지닌 행동주의자들도 있었다. 교구 세금 상납을 거부한 신도들이 적극 가담했다.
롤라드인들의 활동 본거지는 여러 곳이었다. 옥스퍼드, 레스터(Leicester)를 포함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여러 곳에 산재했다. 레스터 지역은 롤라드 신앙운동을 환영했다. 길을 가는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은 틀림없이 롤라드인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어디에서나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확신하는 것을 전했다. ‘청빈한 사제’처럼 살았다. 탁발수도사와 마찬가지로 신발도 신지 않고 지팡이만을 짚고 둘씩 짝지어 다니기도 했다.
롤라드인들은 성경을 사랑했다. 그들은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최고 권위로 여겼다. 위클리프의 서기 존 펄베이는 수많은 문서들을 참고해 개정 영어성경을 출판했다. 상당수의 롤라드인들이 나중에 로버트 반즈가 출판한 윌리엄 틴데일판 영어 신약성경을 구입했다.
롤라드 신앙운동의 지도자 니콜라스 헤리퍼드(Nicholas of Hereford)는 불가타판 라틴어 성경을 최초로 영역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헤리퍼드는 옥스퍼드 대학 캠퍼스에서 롤라드인들의 집회를 개최했다.
집회에서 로마 교회 성직자 계급에 대항한 위클리프의 사상을 소개하고 변함없는 지지를 표했다. 그 결과 헤리퍼드와 옥스퍼드에 있던 모든 위클리프 추종자들은 파문되고 추방당했다. 교회는 롤라드인들을 이단자, 이단자 위클리프의 추종자라고 비난했다.
롤라드 신앙운동은 비난을 받으면서 점차 지하운동으로 확산됐다. 롤라드 신앙에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을 규합했다. 롤라드인들은 1395년경 영국 의회 안에 막강한 세력을 확보했다. 교회개혁을 위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12 항목’으로 정리해 의회에 제출했다.
롤라드인들이 의회에 제출한 ‘12 항목’은 로마 교회가 싫어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로마 교회에 대한 영국 교회의 복종, 화체설, 성직자 금혼제 등을 거부한다. 성직자의 도덕성 추락, 물질 신성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반대한다. 또 성지순례, 형상, 예술품, 장식품에 대한 교회의 지나친 관심을 정죄한다.
고위 성직자들의 세속적 직위와 지배활동, 성직자의 세속사 재판 활동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전쟁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이 항목에는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예식을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여기는 교리는 옳지 않다고 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흥미롭게도 ‘12 항목’은 설교자들과 국민들이 영어 성경을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음을 강조하지 않는다.
롤라드 신앙운동의 교리적 기초는 위클리프가 천명한 신학적 주지들이었다. 롤라드 신앙운동은 점차 자국어 설교와 토론 모임으로 전환됐다. 롤라드인들은 대중에게 설교할 때 영어를 사용했다. 현실감 있는 신학적 주제들을 중심으로 토론을 했다. 신학, 교회론, 정치학에 대한 위클리프의 사상을 반영했다.
롤라드 신앙운동은 세 단계를 거쳐 진행됐다. 첫 번째 단계는 옥스퍼드 시기(1378-1413)였다. 주요 인물들이 위클리프의 사상과 저작물을 중심으로 학문적 역량을 키우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점차 조직을 강화하고, 의회에 교회개혁을 촉구하는 상소문 ‘12 항목’을 제출할 정도로 발전했다.
영국 의회는 1381년에 롤라드인들을 탄압하는 최초의 법률을 제정하고 추종자들을 검거했다. 옥스퍼드를 떠난 위클리프의 제자들은 각지로 흩어져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설교했다. 영국 의회는 1401년에 ‘이단 박멸’ 정책을 반포하고 롤라드인들을 사형시키겠다고 공언했다. 롤라드 신앙운동은 영국국교회에 위협적인 세력으로 부상한 것이다.
대감독 토마스 아룬델(Thomas Arundel)은 위클리프 사상이 설교에 등장하는 것을 방지하고 위클리프주의의 확산을 억제할 목적으로 ‘법령(Constitutions)’을 공표했다. 교회 권력자가 인정하는 자만 설교를 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롤라드 신앙운동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점차 발전했고 구성원이 10만 명을 넘어섰다.
롤라드인들은 헨리 5세의 집권 초기에 불운한 반란을 일으킨 존 올드캐슬 경(Sir John Oldcastle)과 불행한 인연을 맺었다. 올드캐슬은 1413년에 롤라드 신앙운동의 기본 신조에 동의했다. 그는 신앙 때문에 감금을 당했고 옥에서 풀려난 뒤 정부를 전복하려는 마음을 먹었다. 다수 기사들이 반란에 동참했고, 군사들이 런던을 공격했다. 그러나 전황은 역전되었고, 전선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반란자 약 40명이 처형당했다.
두 번째 단계는 지하운동 시기였다. 정부는 1414년에 롤라드인들에 대한 종전의 법률 규정을 더욱 엄격하게 통제하는 쪽으로 강화했다. 헨리 6세 집권 초기 롤라드인들의 처형이 잇따랐다.
끈질긴 탄압이 계속되자 롤라드 신앙운동의 세력은 쇠퇴했다. 콘스탄츠 공의회(1415)가 위클리프의 저작물이 담고 있는 신학적 주지들을 이단 사상으로 정죄하고 올드캐슬의 반란이 실패하자, 위클리프의 제자들과 추종자들과 롤라드인들은 반역자로 낙인찍혔다. 그 때부터 이 운동은 지하로 퍼져나갔다.
세 번째 단계는 잉글랜드 북부 지역의 민중 사이에 새벽별처럼 빛나는 신앙 형태로 존재하는 시기였다. 성직자를 반대하는 개혁 설교자, 선동가, 일반 시민들, 위클리프의 사상을 선호하는 옥스퍼드의 학자들, 학생들이 롤라드 신앙운동에 가담했다. 시골로 확산된 왈도파 운동과 달리, 이 단계의 운동은 인구 밀집 지역 이곳저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롤라드인들은 이단으로 지목받는 상황에서도 교회의 성인숭배, 성직자의 부당한 수익, 성지순례, 형상을 숭배하는 관습 등을 비판했다. 위클리프의 정신과 열정을 따라 미신적이고 비성경적인 교회의 행태에 공분(公憤)하면서 교회 개혁을 촉구했다.
롤라드 신앙운동은 사회적 취약성 때문에 결정력을 가진 종교개혁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롤라드인들은 영국 종교개혁 시기에도 신앙적 이유 때문에 순교를 당했다. 이 운동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취약했는지 말해준다.
롤라드 신앙운동은 영국 사회의 저변으로 확대되었고, 다가오는 영국교회의 개혁의 길을 마련하고 있었다. 국가와 교회는 롤라드 신앙운동에 위협을 느끼고 나머지 박멸정책을 펼쳤으나 완전히 소멸시키지 못했다. <계속>
최덕성 지음, <위대한 이단자들: 종교개혁 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제7장 1부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