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뽕나무 위의 삭개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야고보서 2:1)!”
교회 내의 형제 차별을 강한 어조로 책망하며 행위가 동반된 참된 믿음의 본질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성도들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차별하지 않으시며, 약한 자에게는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키에 대한 열등감(컴플렉스)으로 많은 어려움과 난관에 부딪혀 실의에 빠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키가 작으면 사관학교, 경찰 등 제복을 입는 직업은 아예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운동선수가 되고 싶어도 키가 작은 사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특히 외모는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키가 크고 작고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모는 겉으로 드러나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보더라도, 믿는 성도들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나 교회는 절대로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야고보서 2:9)”. 성도들은 타인의 복장, 사회적 지위나 신분, 경제적 능력 등 외모에 근거해 사람을 판단, 편애, 차별대우 등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정신의학자 멕스웰 몰츠는 현대인의 95%가 열등감이라는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C. S. 루이스는 “악마가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열등의식”이라고 말합니다. 위대한 성경 인물 모세, 엘리야, 바울도 열등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했던 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 왕 역시 다윗에 대한 열등감이 생겼습니다. ‘사울은 천 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군중들의 노래를 듣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사위인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많은 세월과 물질을 허비한 그는, 결국 열등감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며 역사 속에 불의한 왕으로 남겨지게 됩니다.
누가복음에는 삭개오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세리장이요 부자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키가 작다고 묘사됐습니다. 키가 작다는 것은 사회의 외면이나 부족함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 부족함으로 낮은 자존감을 느끼는 것을 심리학적으로 컴플렉스 혹은 열등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부분에서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완전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열등감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폐쇄적입니다. 열등감의 원인이 제거되기 전에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부족한 면이 자신의 전부인 양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들은 나만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다른 것을 통해 보상받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나게 보이려 노력합니다. 마치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알아보고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시며, “오늘은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평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어, 삭개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과 만나보고 싶은 열망이 마음 한 구석을 자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예수님을 바라보려 해도 수많은 군중들로 인해 바라보기조차 힘들어, 뽕나무 위로 올라가 예수님을 바라봤습니다. 그때 “삭개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머물러야겠다”고 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은 삭개오는 정신없이 나무에서 내려옵니다.
더구나 삭개오는 키가 아니더라도 늘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열등감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비록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비난은 받고 있지만, 세리가 되어 부자가 되는 것만이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돈은 자신의 작은 존재를 가리고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뽕나무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에게 속히 내려오라고 명령하십니다.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삭개오는 더 이상 위로 올라가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잘생겨지고, 더 멋있게 보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삭개오는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그를 받아들이시는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마음 문을 열고 나옵니다. 당시 백성들에겐 눈에 가시 같았을 삭개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더구나 외모조차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으니, 그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을까요?
이런 그를 주님께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신다는 것은 교제를 뜻하며, 궁극적으로는 죄의 용서를 뜻하기 때문에 삭개오는 매우 즐거워하며 주님을 영접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뿐 아니라 일반 유대인들에게도 ‘세리’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의 집에 머문다는 것은 그의 죄를 나누는 것을 의미하므로,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삭개오처럼 키가 작은 것은 본인의 탓도 아닐텐데, 그렇다면 조상 탓일까요? 아니면 하나님 탓일까요? 분명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기에 사람을 자유롭고 개성 있게 창조하지 않았을까 하는 농담도 해봅니다.
예를 들어 인간들의 키를 똑같이 만들고, 인물 역시 똑같이 만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인물과 키가 모두 똑같다면, 멋있고 아름다움을 구별할 수 없겠지요, 키 작은 사람이 있기에 키 큰 사람들이 멋있게 보이고, 못생긴 사람들이 있기에 잘생긴 사람들이 돋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열등감을 감추려고, 나를 드러내려고, 크고 위대하게 보이려고 뽕나무에 올라가려 했던 나 자신을 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강조하십니다. 네가 사랑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돈도, 명예도, 큰 키도, 뛰어난 외모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며, 오늘 너의 집에서 너와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등을 절대로 차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남루한 옷을 입었다 해서 사람을 괄시하거나 차별대우를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얼굴이 못 생겼다고, 키가 작다고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이제 사라져야 하겠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게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차별은 하나님에 대한 불충입니다. 심지어 장애로 태어난 사람들과도 하나님 사랑을 느끼고 품으며 나누어야 합니다.
차별하기 전에 먼저 정의롭고 공평하신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