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의로운 사람, 요셉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19-20)”.
이제 대림절이 끝나는 마지막 한 주입니다. 2022년 한 해 역시 역사 속으로 떠나는 날이 점점 다가옵니다, 그동안 바쁘게 살아온 날들 가운데 잠시 쉼표를 주는 시간, 복잡했던 마음을 버리고 떠오르는 태양처럼 환하게 비칠 2023년을 꿈꿔봅니다.
올해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던 삶을 비우고, 평화의 왕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구주의 탄생을 알린 동방박사의 선한 행동처럼, 대림절의 마침과 함께 세상에 구원의 아름다운 선물과 산 소망을 주실 구주의 탄생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더하신다’, 어머니 마리아는 ‘높여진 자’라는 뜻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되시는 예수의 부모로 선택하신 분들입니다.
특히 요셉은 의로운 사람, 신앙의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남의 사정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고도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나님의 뜻을 잘 받아들이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마리아도 신앙의 사람, 말씀에 절대 순종한 사람입니다. 처녀 잉태에 순종한다는 것은 그 시대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한탄함은 물론,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찾아오는 것인가 하고 극단적 선택까지 생각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이해했고, 하나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설상 그것이 자신의 일생을 망치는 일일지라도 불평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며 긍정적으로 따르는 신앙인이었음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대림절이 끝나면, 곧 연말이 찾아옵니다. 연말이 되면 올해는 긍정적인 결실을 거두며 살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처하면서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거나 남들만큼 성과가 없었다면, 왠지 모를 불안과 초조의 마음이 생깁니다.
인지심리학에 의하면,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감정은 불안이라고 합니다. 불확실하고 모호한 상황일수록 불안감은 커지고, 불안한 상태 이후 오는 분노와 슬픔이 어느 때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속 요셉 역시 불안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아이를 가진 마리아로 인해 지금까지 자존심처럼 지켜온 의로움이 무너지는 상황입니다. 돌팔매질당해 마땅할 죄이지만, 결혼을 약속한 임신부에게 돌을 던지는 것 또한 의로운 일이 아닙니다.
결국 요셉이 선택한 최선의 방법은 파혼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불안과 초조,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확신한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마리아가 정결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볼 수 없지만, 그가 느낀 배신감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주위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끊고자 하는” 마음을 정했던 것입니다.
파혼을 결정한 그날 밤, 꿈속에서 주의 사자 천사가 나타나 말씀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인간적인 생각으로 한쪽 면만 보고 결론을 내버린 그때, 천사가 꿈에 나타나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불확실한 미래에 확신을 전해준 것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생각을 최선으로 여겼습니다. 마리아도 살리면서 자신이 홀로 고통을 짊어지고자 한 것입니다. 평범한 우리 생각에도 참으로 현명한 방법이었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용히 끊음으로서 돌에 맞아 죽을 마리아를 살리면서, 세상의 기준에 따라 정절을 지키고 자신의 분노를 가슴에 묻어두는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방법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명령하십니다.
그 순종의 결과로 요셉에게는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임하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새롭게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곳입니다. 그 나라는 바로 요셉과 같은 순종이 있을 때만 임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과 세상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요셉처럼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상황과 여건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확신해야 함을 성도들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종종 잊고, 불안이 불러온 편향적 생각으로 섣부른 판단과 결정을 할 때가 허다합니다. 우리가 번뇌하며 걱정했던 그 결정의 순간,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지 기억하십니까?
무엇인가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거나, 불안한 마음으로 슬픈 감정이 들어 힘들어하는 신앙인들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청해 보시면 어떨까요? 그 고백을 듣는 영혼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불안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사실상 컴퓨터와 마찬가지인 스마트폰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시대입니다.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뿐 아니라 보행 중에도 유·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뿐 아니라 영화나 방송 같은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즐기는 놀라운 시대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다만 귀를 막고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한 나머지 사고나 범죄에 노출되는 정도가 심해지고, 주변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 발생하는 타인과의 갈등은 새로운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어 아쉽습니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최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로 우리 삶은 점점 더 개인화되고, 타인의 말을 듣기보다 자기 주장에 더 익숙해졌습니다. 때로 아예 눈과 귀를 닫아 정상적인 대인관계 파괴를 우려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을 맞기도 합니다.
일상생활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이런 현상이 혹시 신앙생활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다 인류 구원을 위해 오실 아기 예수님의 숨소리, 그 이후 그 분이 하실 말씀조차 듣지 못하는 상황이 될까 두렵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 중 요셉은 자기 생각과 주장을 물리치고, 꿈에 나타난 천사의 메시지에 의지하고 순종했습니다. 요셉의 선한 믿음에서 보여주는 깊은 태도에, 우리 신앙인들도 듣는 귀를 열어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참된 순종을 배워가야 하겠습니다.
불안과 공포, 번뇌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오롯이 주 안에서 순종하는 길임을 명심하고, 자신의 뜻과 생각, 방법과 판단으로 섣부른 죄를 범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들은 믿음으로 주님의 오심을 묵상하고 찬양하며, 순종의 참 의미를 더 깊게 묵상하는 성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