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욱의 ‘연애는 다큐다’ 112] 부부 사이 정상화하려면 ‘서열 정리’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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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들은 다들 비슷한 시기에 결혼했는데, 아직까지(?) 이혼한 친구는 없고 다행히 그럭저럭 살고 있다. 그중 최근 몇 년 동안 부부 간 문제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낸 친구가 있어 만나게 되면 꼭 안부를 묻곤 한다.
“요즘은 어떻게, 잘 지내냐?”
물론 아내와 잘 지내느냐는 뜻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친구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말한다.
“응. 우린 뭐 상하관계가 확실하기 땜에….”
이 대목에서 웃음이 터졌다. 자기네 부부는 서열정리가 끝나, 지금은 아내를 상전으로 모시면서 그냥 조용히 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야, 너네는 상하가 아니라 거의 주종관계 아니야?”
다들 웃으며 이렇게 놀려댔지만, 누구보다 가정을 지키려는 그 친구의 고뇌와 인내의 시간을 알기에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것이 깨지거나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면 여러 사람이 힘들어진다. 가정에서도 관계는 삶 자체라고 할 수 있는데, 한쪽이 어떤 무리한 관계 설정을 시도할 때 혹은 현재의 관계를 거부할 때 갈등과 문제는 끊이지 않게 된다.
친구는 오래 전에 닥친 고난의 파도를 넘으면서 대부분의 요구를 수용하고, 조금 더 손해본다는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아내한테 져주면서 가정을 유지한다(물론 양쪽 말은 들어 봐야 하겠지만). 그것은 자기가 택한 길이었고, 덕분에 가족의 평화와 유지라는 바라던 목적을 어느 정도 이루었다.
아무리 비정상적인 관계라도 상대방이 수용한다면 그 관계는 유지된다. 하지만 그 관계는 건강한 것일까? 그대로 덮어 두어도 괜찮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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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이라고 하면 왠지 수직적이고 강제적이며 부정적인 느낌이 든다. 상명하복의 계급이나 차별로 이어지는 신분제도처럼 딱딱하고 비인간적인 생각부터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서열’이라는 말의 뜻은 ‘어떤 기준에 따라 순서대로 늘어서는 것’으로 상하관계의 의미는 딱히 없으나, 부정적이고 강제적인 뜻으로 자주 쓰여 ‘차례’라는 말로 순화할 것을 권고받는 단어다.
남녀 관계에 있어서도 서열이라고 하면 유교의 잔재가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여필종부(女必從夫) 같은 말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성경적으로는 이 ‘서열’이라는 말을 ‘질서’로 바꿔야 한다. ‘질서’는 차례나 서열보다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인데, 가족 간에는 이것을 각기 다른 역할과 기능, 그리고 자기 포지션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각자 역할에 따라 질서 있게 행하면 많은 일이 순조롭다. 이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지체’와 같은 것으로, 자기 역할이 있는데 다른 역할을 바라거나 참견하면 몸이 기능할 수 없다는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그 질서를 어떤 불문율처럼 여기는 경우가 꽤 있다. 물론 가부장적 사고를 지닌 가장들이 그런 생각을 많이 할 것이다. 하지만 질서는 늘 획일적인 개념이 아니다. 화장실은 급한 사람 먼저이고, 식사는 먼저 온 사람, 배고픈 사람부터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먼저 배려하고 다른 가족들이 그가 하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 이것을 잘못됐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보통 재난이 닥쳐도 여성과 아이들을 먼저 구하는데, 서열이 높아서가 아니라 약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남편들이 아내보다 낮은 위치를 자처하는 경우는 기싸움에서 밀려 그런 것도 있겠지만 배려하는 차원에서, 다툼보다 낫기 때문에, 가족 전체를 위해 권위와 위치를 양보하는 상황일 수 있다. 필요에 따른 기능적 질서로 이해하고 참는 것이다. 이런 사례가 적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정의 질서를 그렇게 만드시지 않았고,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만드셨기 때문에 남자는 성경 말씀을 몰라도 본능적으로 자기 위치를 알고 있다.
유교적 권위의식이 없는 사람에게도 반드시 남자로서의 위치에 대한 자각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기본이 깨진 가정은 겉으로 멀쩡해 보여도, 궁극적으로는 제대로 된 길을 가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자기네 부부는 아내가 더 상전이라 상하관계가 확실하다고 농담하던 내 친구도 특별한 이유로 평화를 위해 잠시 양보하고 사는 것이겠지만, 자기 위치에 대한 자각은 분명하다. 그 농담이 웃픈 것도 모두가 느끼는 질서와의 부조화 때문이다. 당연한 일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계획대로 움직이는 질서의 신이시다. 하나님이 없는 곳은 무질서하기 마련인데, 욥은 자신의 고난에 절망하며 이렇게 말한다.
“어둠의 땅은 어둠 그 자체와 같으며 사망의 그늘진 땅은 어떤 질서(order)도 없고 거기서는 빛이 어둠 같으니이다, 하니라(욥 10:22)”.
질서가 없는 곳은 사망이 드리운 어둠의 땅이다. 그래서 질서가 없는 가정도 생명력 없는 곳이 되기 쉽다. 그분이 원하시는 가정의 질서는 서로 존중하며 자기 자리에서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든 나름의 질서를 만들고자 애쓰지만 하나님의 순리에 어긋나는 것은 일종의 파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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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체가 자기 위치를 지키지 못하면, 다른 지체가 대신 감당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몸은 그럭저럭 굴러가겠지만, 삐걱대기 쉽고, 건강하기 어렵다. 자의든 타의든 오늘날 많은 가정들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기가 정상적인 자리를 지키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남편이 가족을 부양하지 않고 밖으로 나돌거나, 아내가 남편을 넘어 머리가 되려 하면 가족 공동체가 비정상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는데, 그 원인 제공은 서로가 했을 수도 있다.
밖으로 도는 남자가 집에서 존재감을 못 느끼도록 아내가 남편 대접을 안 했다고 주장할 수 있고, 아내가 가장 역할을 해야 할 만큼 남편의 능력이 부실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재욱 작가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등 40여 종
https://blog.naver.com/woogy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