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승의 러브레터] 하나님이 본래 부르셨던 자리
1. 새해가 되었습니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다들 계획이 있지요. 다이어트를 하겠다, 독서를 하겠다, 기타 등등. 그래서인지 헬스장은 연초에 가장 사람이 많답니다. 여행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공부 계획을 세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교회 공동체적으로 목표가 있겠지요. 아마 새로운 터에서 출발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너’가 존재하는 겁니까, ‘너’를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까? 교회는 무엇을 위해 세워진 겁니까? 저와 여러분은 교회에서, 그곳에서 무얼 위해 일하는 겁니까?
2. 한국 사람처럼 우리를 좋아하는 집단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는 아주 중요한 두 개의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나와 너 입니다. 우리라는 단어는, 화자인 나로부터 시작해 청자인 너를 포함한 복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나와 너의 관계가 있을 때 저절로 완성되는 것이지, 먼저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우리라는 집단의 중요성이 아니라, 너를 나와 동등한 가치로 여겨줌이 가능할 때 아름다운 공동체가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 것은 잃어버린 한 사람 한 사람을 찾는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3. 남자가 처음 여자를 보고 내뱉은 아름다운 시적 문구가 사랑 고백이 되었을 때의 감동,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갈비뼈가 사라진 내게 당신이 나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임을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당신이 내 부속물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관계 즉 내가 너에게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나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겸손입니다. 네가 있어서 나는 비로소 ‘온전한 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름이 아름다움이 될 수 있습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아름다운 우리’가 자연스럽게 꽃피워집니다.
3. 그러나 죄가 들어오면 완전히 해석이 달라집니다. 너는 완벽한 나에게 흠을 준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니 내 감정과 상황에 문제가 생기면, 모든 탓은 ‘너’ 때문이 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가 아니라, ‘낮게’ 여깁니다.
내가 인정하는 너는 나보다 잘하는 존재입니다. 나보다 잘 알고 잘 해내는 존재들이 인정됩니다. 활짝 핀 개화된 꽃만 완전한 존재로 인정함은 대부분의 시간 봉오리였던 꽃의 존재를 패싱합니다.
그런 ‘나’로부터 출발된 ‘너’와의 관계가 아름다울 리 없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는 언제나 개인의 가치를 말살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공동체의 가치가 훼손되면, 언제나 ‘너’의 탓이 될 수밖에요. 그렇게 우리는 누구라도 쉽게 공동체의 힘으로 폭력을 휘두르게 됩니다.
4. 작년 말, 한 사역자가 오래 섬긴 교회를 떠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섬겼지만, 지병이 있는 터라 몇번 사역을 빠질 수밖에 없었음에도 지병이 있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이므로, 가끔 빠질 수밖에 없었던 사역의 자리에서 부재는 불성실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담임목사가 패싱해버린 것입니다.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사역 때문에 존재를 버리는 교회는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그 교회뿐 아니라 우리 사는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5. 교회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함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 깨달은 존재는 ‘나’입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거친 성품에 아는 것도 없으며 타인을 향한 시기와 멸시로 살아온 사울 같은 우리를 그럼에도 지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우리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믿음을 고백한 우리가 이곳에 모였다는 것은, 이제 그 은혜로 다른 영혼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그때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영혼을 살리는 따스함으로 스며들어 죄를 씻겨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죄인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평가합니다.
5. ‘한국교회가 위기다’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위기는 사역에 있지 않습니다. 위기는 존재가 사라지고, 집단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은 사라지고, 나는 OO교회 장로 집사 목사만 남은 겁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는 사라지고, 집단의 성과와 개화된 꽃만 남은 겁니다.
위기는 소명의 상실입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신 자리는 여러 이유로 떠나고, 계속 떠나 여전히 그 자리에서 예배드리나 하나님이 불러주신 자리에 대한 응답은 사라진 것입니다. 불러주신 자리에 대한 응답은 없으니 나 또한 그 누구의 이름을 부르지 못합니다.
모여지는 숫자는 귀히 세고 보고하며 그것으로 평가합니다. ‘몇 명 모이는 교회’로 말입니다. 그러나 부재된 자리, 영혼의 이름은 부르지 않습니다.
소명은 “한승아!” 이름을 부름으로 시작하건만, 우리가 카운트하는 영혼은 이름일까요, 숫자일까요?
6. 이런 통계를 봤습니다.
250명 이상이 대형교회인데 그 교회가 10%입니다. 90%는 그러니까 중소형교회입니다. 문제는 교인들의 70%가 대형교회를 다닌다는 겁니다. 통계를 보면 너무 갭이 커지고 있습니다.
아마 100명 이하 교회의 상황은 점점 열악해질 겁니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교회의 대형화를 부추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너라는 존재의 의미를 축소시킵니다.
소형교회를 대형교회 선교를 위해 필요한 부속물 같이 여기는 악습은 이제 사라져야 합니다. 작은교회에서의 섬김은 빛이 나지 않고 고단할 뿐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작은 교회일수록 섬김의 숫자는 늘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대형교회에서 섬기는 분들, 해외로 가서 봉사하시고 섬기는 분들, 오지에 가서 온갖 더러운 일을 다하면서도 자발적으로 작은교회에 가 섬기려 하는 분들은 거의 못보았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아프리카 땅끝 선교사라는 타이틀을 걸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너를 잃어버린 채 살고 있는 우리 모습 말입니다.
7. 저는 생명샘교회와 달꿈학교를 섬기면서 교육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가르침, 즉 내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의 기준에서의 한국식 교육은 바로 여기 오는 지체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건 직분자 혹은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 사역자, 그러니까 우리라는 원래 집단에게 필요한 것이구나. 영혼을 잃어버리고, 성과, 결과물, 세상의 가치관으로 영혼을 평가하는 우리에게 교육이 필요한 것이구나.
예의를 가르치나 예의없고, 존중을 가르치나 존중하지 않는 우리에게 교육이 필요합니다. 결과물로 평가하나, 존재를 보지 않는 우리에게 교육이 필요한 겁니다.
8. 우리는 늘상 사역으로 존재를 판단하는 우를 범합니다.
그러니 나에게 네가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라는 틀 안에서 네가 필요하다고 말해왔습니다. 우리를 무너뜨릴 것 같은 존재는 다가 오지 말라고 안전선을 긋기도 합니다. 서로의 담장을 허물라고 했더니, 빗금을 친 겁니다.
우리라는 틀 안에서 규정짓는 평균치에 미치지 못하는 존재는 스쳐 지나갑니다. 아니 스쳐 지나가게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사역단체, 교회들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역이 중요해서 놓친 존재가 얼마나 많습니까? 개화된 꽃만을 목표로 하다보니 놓친 씨앗들은 얼마나 많이 민들레처럼 홀씨 되어 날아갔습니까?
일 잘하고 많은 수가 모이고, 예배 참여인원이 늘어날지 모르지만 그 영혼도 어차피 숫자로 보고 있다면, 그건 위험한 상태입니다. 그 존재의 생각에 완벽함을, 빠름을 추구한 우리는 누군가의 꽃 피워냄을 방해했던 존재임에 고개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주인 되는 곳 뒤에서는 생명이 자라날 수 없습니다. 짙은 어둠은 내가 주인 되어가기 때문인 현상임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스쳐 지나간 존재 , 달꿈을 스쳐지나간 존재, 저를 스쳐 지나간 존재들 앞에 저는 언제나 주인이었을지 모릅니다.
9. 2023년이 토끼해라고 합니다.
토끼는 빠릅니다. 본인이 빠르고 잘 뛴다고 해서 거북이를 무시했습니다. 올 한 해를 계획하는 사역자들과 직분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습니다.
한 영혼을 귀히 여기지 못하는 사역은 애초에 위험한 사역입니다. 우리라는 틀 안에서 아무리 크고 화려한 것을 목표로 한다 해도, 숫자에 속아 영혼을 잃지 마십시오. 꼭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왜 그 일을 해야 하는 걸까? 정말 한 영혼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우리를 위해서인가?
혹시 예배자이신 분들은 그곳에서 드리는 예배와 섬김의 이유가 정말 ‘너’ 한 영혼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나’의 만족을 위해서입니까? 집단의 힘이 필요한 이유 때문은 아닙니까? 점검하지 않고 가는 길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여러분에게 잠시 그것이 조금 빨리 뛰어가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영혼을 사랑해야 하는 푯대에 도달하지 못할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다.
여러분도 그런 한 영혼이었던 것을 기억하셔서 큰 사역, 큰 계획, 완전하고 완벽함, 나의 편안함을 위한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본래 부르셨던 자리를 돌아보고 잃어버린 한 영혼의 이름을 불러주는 귀한 2023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