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승의 러브레터] 목적을 잃지 않는 2023년 되기를
1. 교회의 존재 목적은 유지와 관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에는 만들어질 때부터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컵은 무언가를 담아 사람이 먹고 마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밥그릇은 밥을 담기 위함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공통의 목적을 상실한 사람은 개인의 목적으로 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목적 없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 죄인들로 여겨지는 사람들과 식사를 자주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잘 믿고 누구보다 지금까지 인정받아왔던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제자들에게 따져 묻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당신네들 선생이라는 사람은 가장 죄를 많이 짓고 비판받아 마땅한 애들과만 밥을 먹냐?”
그때 주님의 대답입니다. “의사가 병든 자에게 쓸데 있는 것처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말을 하신 이유는 바리새인이 의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리새인과는 밥을 안 먹겠다는 선언 또한 아닙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비유는 양 한 마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99마리로 살아가면서 한 마리의 가치를 잃어버린 무리들, 즉 바리새인들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똘똘 뭉쳐있지만 이미 구멍난 상태, 그래서 사실은 행복하지 않은 그들을 향한 사랑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탕자의 비유도, 돌아온 둘째를 향한 말씀이라기보다는 여전히 둘째를 향해 날카롭고 당당한 첫째를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 예수님을 필요없다 여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제사장 그룹. 사두개인 등 깨어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에게는 왜 하나님의 말씀이 귀로만 들릴 뿐 마음에 심겨지지 않고, 행동 변화로도 이어지지 않았을까요?
한 마디로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목적과 목표가 잘못 되면, 방향이 달라집니다. 1도만 틀어져도 큰일납니다. 오히려 열심으로 달려가면 달려갈수록, 최종 목적지와는 점점 멀어집니다. 그래서 무엇이 우리 인생에 목표인지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2. 성경에는 목적에 대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가 바로 그 분명한 명제입니다. 더함과 다함, 이 차이를 상실하면 안됩니다.
무엇이 인생에 가장 소중한 가치인지, 죽을 위기에 처하면 압니다. 튀르키예(터키)와 시리아 근방에 발생한 지진으로 연일 안타까운 소식이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참하게 무너진 현장에서 생명이 발견될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이처럼 반가울 수 없습니다.
죽을 위기에 처해본 사람은 압니다.
그 무엇도 생명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돈, 크고 화려한 건물, 달콤한 음식, 쾌락, 그 무엇을 더해도 생명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다하셨습니다. 그것이 다함의 가치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로마서 6:22)”.
반면, 더함은 덤입니다. 사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함의 가치를 주신 하나님께 나를 드릴 때, 하나님은 덤으로 주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더함을 위해 사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덧 덤이 주가 된 인생이 되어 불행해집니다. 믿음 생활도 거래가 되고, 사랑도 거래가 됩니다. 받아야만 행복해진다고 착각합니다. 다 주신 분의 은혜는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사라진 인생 또한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3.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을 상실한 교회는 수단을 목적 삼고 삽니다. 그러니 그 수단이 타인을 향한 폭력이 되어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고 섬기는 교회는 존재 목적이 무엇일까요?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조직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건물 안에서 예배드리고 조직도 있고 있어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은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수단과 방법이 목적이 되거나 평가의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어느덧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숫자로 드러나는 ‘운영과 관리’에 초점을 맞추어, 어느덧 회사처럼 전락해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성과로 드러나는 ‘잘함과 못함’이 기준 되어 성도와 사역을 평가합니다. 예배를 드리러 오면서, 말씀과 예배를 평가하면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면, 이 자체는 이미 예배를 받으러 온 것일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에서 목회하는지, 성도들 숫자는 몇인지, 한 해 예산 규모는 얼마인지, 헌금은 매달 얼마가 나오는지, 선교비로 얼마를 쓰는지, 어떤 사역이 시스템으로 잘 되어있는지 등으로 평가하고 있다면 ‘위험 신호’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목적과 수단을 바꾸지 마십시오. 수단이 절대화되고 평가 기준이 되는 현 시대에, 우리는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을 성찰해야만 합니다.
4. 목회에도 윤리가 필요해서, 목회윤리가 있습니다. 몇 가지 생각나는 것만 적어봅니다.
첫째. 올바른 개척정신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처럼 이미 복음이 있는 곳에는 굳이 가지 않겠다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나요?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교제하고 놀고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 위해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그것은 다함의 가치를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가 있는 곳에 교회를 세울수도 있습니다.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정말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곳 심령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세워진 것은 축복할 일입니다. 그러나 수단과 목적이 변질되지 않기 위해 점검해야 합니다.
둘째, 수평적인 협동 정신입니다.
내 수단과 목적을 어떻게 점검할까요? 소통입니다. 지역 교회 분들과 수평적인 이야기가 가능한가가 중요합니다. 꼭 연합 수련회나 프로그램을 같이 할 때만 주고받는 연락 말고, 일상의 소통 말입니다.
저는 가끔씩 지역 교회에 방문해 예배를 드립니다. AMCM을 가기도 하지만, 청년들과 함께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기도 합니다. ‘내 교회 중심’을 깬다기보다, 우리가 주님 안에 연합된 지체임을 잃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규모로 보면 제가 섬기는 교회보다 큰 교회가 인근 교회들과 연합하여 예배드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그런 제안이 들어온 적도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굳이 연합이 필요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체적으로도 크기 때문이지요.
꼭 필요한 것이 주 안에 하나 됨인데, 이미 자체적으로 커서 필요한 것이 필요없어졌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충분히 만족한다고 느끼는 착각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봉사와 헌신, 수직적 신앙생활이 대부분입니다.
셋째. 자립정신입니다.
개척을 하거나 담임목회자가 될 때, 참 보기 좋지 않은 경우들을 만납니다. 소위 나와 관계된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또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지금 현재 개척 혹은 섬기는 교회가 섬길 손길이 부족해서, 그렇다면 당연히 같은 마음으로 돕는 것은 너무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회에서도 헤어질 때는 인사를 하고 축복하는데, 교회만큼 헤어질 때 차가운 곳도 없습니다. 목회자의 윤리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내 필요 때문에 동역자와 성도를 마음대로 불러도 된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는 더함으로만 사는 자입니다.
내 사역에 더해질 것만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성도와 동역자가 이전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생각, 그가 사라짐으로 교회는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개척을 한다면 그 현장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람과 상황으로 먼저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다하셨기에, 그것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더해주시는 것입니다.
안타깝게 우리는 이 목적과 수단을 상실한 채 신앙생활과 목회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목회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목회 계획과 생활을 하고, 성도님들도 하나님을 위해 예배드리지 않고 내 이익에 따라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5. 최근 은혜받은 영화가 있습니다.
<극한직업>에서 범죄자를 잡으려던 경찰들이 잠복하던 치킨 가게 장사가 잘 되니 돈에 눈이 멀었을 때 받은 꾸지람을 잊지 마십시오. “지금 치킨집 하려고 범인 잡는 겁니까, 범인 잡으려고 치킨집 하는 겁니까?” 모두 웃고 있었던 극장에서, 제 심장을 찔렀던 말씀입니다.
늘 두렵고 떨립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목회했던 것일까, 내 자신을 위해 목회했던 것일까? 자꾸 방송에 나가는 것이 두렵고 떨리는 이유입니다. 나는 ‘달꿈 사역’을 하나님을 위해 하고 있을까, 내 자신을 위해 하고 있을까?
사랑하는 여러분, 애통하는 심령으로 우리 모두 함께 회개합시다. 여러분의 사역은 정말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먹고 살고 인정받기 위해 하는 겁니까?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는 정말 하나님이 원하셔서 그곳에 있는 겁니까, 아니면 여러분과 가족의 안정과 인정을 위해 있는 겁니까?
만약 후자라면 우리 자신의 열심과 하나님의 은혜로 아무리 규모가 커지고 사역이 알려지며 사람들이 모인다 해도, 그 공동체는 결국 사라질겁니다.
6. 저는 가끔 서글퍼집니다. 직분이 있다고 계급처럼 서로를 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너무 슬픕니다.
저는 누군가가 교회에 오면, 이전 교회의 사역자에게 연락을 하곤 합니다. 수평이동이 대세가 된 교회 문화에서, 이전 교역자에게 여쭤보고 왔는지 예의를 갖추기 위함입니다.
많은 교우를 떠나보낸 입장에서 빈 공간의 크기가 상당히 지속되고 그로 인해 상실감을 느끼는 사역과 지체들을 봐왔기 때문이기 때문에, 누군가 여기에 옴으로 그 교회에 영향이 없는지, 만약 그렇다면 정중히 돌려보내거나 다른 방법으로 협력하고 도울 수 있는 것은 없는지 묻기 위함이면서, 동시에 이전 교회에서 어떻게 양육했는지 지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교회와 연결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데 대형교회들의 경우, 아예 연결이 힘듭니다. 담임목사님과 통화하려면 비서실을 거쳐야 합니다. 전에 한 지체가 왔을 때 일입니다. 마음이 힘든 지체였습니다. 당연히 연락을 드려 상담 전화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신년 회의 기간에 들어가 일주일 동안 상담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님을 바꿔달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교구 목사님과 통화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모든 사역자가 신년 준비 기간이라 안 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제 상식에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주일 24시간 내내 준비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제 이름과 연락처를 남기고 교구 목사님이나 담당 목사님께 회의가 끝나면 꼭 연락을 부탁드린다고 전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이 전화해도 과연 일주일 회의가 있어 답을 못할까요? 교회를 옮기신 분이 장로님이었어도 과연 그러셨을까요? 사흘이 지나 다시 전화를 걸어서야 겨우 연락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열심히 살아가는 젊고 평범한 목사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갑자기 서글퍼졌습니다. 건강한 교회로 알려진 이 교회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목사님은 앞으로 어떤 영혼들을 만나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실까? 왜 이 교회에서 섬기고 계시는 것일까? 이 교회에서 배우고 예배드리는 교우들은 무얼 위해 예배드리고 있는 것일까?
여러분, 이것은 한 교회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형 조직이 되어 버린 한국교회 의 현주소요, 가깝고 편하며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과만 함께 있는 우리 모두의 현주소입니다.
회의와 일년의 계획, 일의 잘함과 못함, 큰 사역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한국교회, 그래서 잘하는 사람은 곁에 두고 싶고, 나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옆 교회에서라도 데려오고 싶고, 못하는 사람은 그냥 둬도 괜찮고, 내게 피해가 되거나 공동체에 필요없어 보이는 사람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우리 마음 말입니다.
7.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 회심하며 세웠던 수많은 2천 년 전 교회들을 생각해 보십시다.
고린도 교회, 에베소 교회…. 얼마나 대단한 교회였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고린도에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당시 음란하며 우상으로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그곳에서 해야 할 사역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곳곳을 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그를 가장 사랑하고 헌신하며 섬겼던 수많은 동역자들을 로마 교회로 보냈습니다. 로마서 16장은 그래서 뵈뵈로부터 시작해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며 너희는 “서로 문안하라”고 가르칩니다.
로마서를 받아든 지하 교회 성도들이 절대적 믿음의 보유자들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 조직과 사역을 지키기 위해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역을 확장시키고 유지·보수·관리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로몬이 자랑한 성전 예배당, 위대한 교회의 이름들, 고린도 교회, 에베소 교회, 마가의 다락방으로 알려진 초대교회 원형 장소, 로마 지하 교회 예배당…. 모두 다 사라졌습니다. 교회의 전통과 형태, 제도는 이미 다 사라졌습니다. 성경은 당시 교회들의 교인 숫자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자랑했던 교회들, 그 시절의 건물, 제도, 조직 모두 사라졌습니다. 만약 그것들이 꼭 지켜야 할 가치였다면, 하나님이 무너뜨리실 이유가 없습니다.
제도와 건물 등이 수많은 시간이 흐르며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과 비난가운데 사라지고 또 사라진 이유는,
어떤 건물도, 조직도, 사역이라는 이름을 건 프로그램도, 한 영혼의 크기보다는 작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은 건 오히려 진심으로 얼굴도 모르는 로마 교인들을 향해 편지를 쓰고, 남들에 대해 판단하고 정죄하며 어느덧 가시돋힌 공동체가 되어가는 그들을 향해 사역할 것이 넘쳐나고, 위기 가득한 고린도에서 도와줄 지체들을 기꺼이 보낸 사도 바울의 진심어린 권고들이 로마서가 되어 우리에게 영원히 역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목적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욕심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계속 더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내 사역과 내 건물과 제도, 내 사역의 완성과 확장이 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니 내 사역에 함께할 사람들의 숫자를 지키고 늘리기 위해 살아가다, 실상 한 영혼의 가치는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8. 주님께서 다함의 은혜로 세워주신 목회자이자 동역자인 여러분, 정직하게 돌아보십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이 필요한 겁니까, 하나님을 위해 사역을 하는 겁니까? 아마 모두 다 하나님을 위해 사역한다고 대답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 교우님들이 필요한 겁니까. 아니면 단체와 공동체 그리고 사역 유지와 확장을 위해 교우님들이 필요한 겁니까?
정말 주님을 위해 섬기는 마음으로 교회를 세웠다면, 이미 교회를 섬기는 것을 알면서도 내 사역을 위해 아무렇지 않게 ‘우리 교회로 와서 섬기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정말 그대의 교회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닙니까? 형제 교회의 귀함을 상실한 교회는 아무리 규모가 커지고 예배 행위가 뜨겁다 해도 주님의 교회가 아닌 사람의 교회요, 그 교회는 이미 운명이 다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 그 공동체를 섬기시는 겁니까, 아니면 옆에 사람의 만족과 내 만족을 위해 다니는 겁니까?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 이미 명령을 다 하셨는데 그 소명(召命)은 버리고, 사명(使命) 을 위해 산다 말할 수 있습니까? 소명이 사라진 사명은 使命(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 내리신 명령)이 아니라, 事名(개인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일)일 뿐입니다.
부디 2023년,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소명을 지우지 마십시오. 부르심 없는 달려감은 애초에 없습니다. 그 달려감은 반드시 누군가를 좌초하게 하고, 자기 자신도 깊은 잠에 빠져든 토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9. 2023년 2월도 벌써 갑니다. 토끼의 해라고 하지요.
달리기 전에 먼저 나의 자세를 바로잡으십시다. 우선 나를 점검해야 합니다.
원죄로 인해 죄의 속성 덩어리인 우리는 문제를 자기도 모르게 철저히 숨기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할 일에 초점을 맞추지 못합니다. 우리가 점검해야 하는 것은 바로 내 안에 계신 예수님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먼저 일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새해가 되면, 뭘 해야 할지 To do list를 세우는 것이 당연해진 우리는, 내 안에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지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무엇을 하려 하기 전에 그것부터 점검하십시다.
10.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자립하십시오. 영적 자립인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청년들이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립하고 독립했다 합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결코 여러분은 자립하지 않았습니다.
독립을 꿈꾸며 독립한 청년 여러분, 집을 얻어 혼자 산다고 자립입니까?
오히려 더 방탕한 삶에 의존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마음대로 자고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놀고, 그것에 시간을 쓰면서 자립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까? 자립이 아니라 세상에 고립된 것일지 모릅니다.
이제 한 가정을 일구어 자립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사람을 사랑한 이유는, 한손을 붙잡고 다른 한손으로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신 소명을 존중하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내게 주신 독립적 정신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사랑한다는 이유로 서로 마주보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까?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에게만 함몰된 인생이 된 것은 아닙니까? 이제 서로만 보지 말고 그 사랑의 힘으로 공동체를 향하고 돌보라는 말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면 말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와 교수가 되신 여러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진심으로 지적으로 자립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목회하면서 가장 쉽게 만나는 경우는, 지적으로 많이 배울수록 가장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공부를 많이 할수록 가르치려 하고, 내 수준에 안맞다 싶으면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립이 아니라 지적 고립입니다.
수많은 정보의 양과 공부를 통해 오히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강화시키려는 편향성을 지닌 지적 고립인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내가 공부한 것과 반대되는 정보와 주장을 접할 때 불편하셨다면 위기 신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반드시 무언가에 의존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는 술과 담배 유흥, 누군가는 사람들과 만나는 일, 누군가는 돈 버는 일과 시간, 누군가는 SNS와 같은 세계, 누군가는 유튜브나 책과 지식에 의존합니다. 어떤 것도 더 나쁘다 좋다 말할 수 없이 똑같이 의존적입니다. 똑같이 중독적이고 똑같이 편향적입니다. 그런데 서로가 더 나쁘다 평가만 합니다.
의존은 집착의 통로이고, 집착은 눈 먼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그런 사람은 내가 있는 세계, 지금 있는 사람, 지금 공간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떠나, 사람의 만족을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자립은 영적 자립인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생기는 고민을 남에게 묻지 마십시오. 먼저 주님께 묻고 구하십시오. 오직 주님만이 완전한 ‘자립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에게 의존하는 생활, 소위 후광 효과에 의존해 교회 이름을 뒤에 걸고 신앙생활 하지 마십시오.
12.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우들에게 의지하지 마십시다. 주님을 먼저 바라보고 가십시다.
성도는 교회의 운영과 관리, 확장을 위해 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프고 슬픈 한 생명을 위해 교회가 존재합니다. 그것이 가장 본질적인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쓸모 있어 보이는 존재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쓸모 없어 보이는 존재를 사랑하십시다.
관리와 유지, 보수, 확장을 위해 사역하기보다, 기꺼이 한 생명을 위해 공간과 시간을 나눌 수 있는 교회가 먼저 되십시다.
안식은 하나님이 먼저 마련하신 시간입니다. 쉴 필요가 없지만 쉴 필요가 있는 우리를 위해 ‘쉬어주심’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안식년이 된 겁니다. 내가 쉬고 싶어서 쉬는것이 아니라, 원래 이 안식을 누구라도 함께 쉬어야 하는 개념이기에, 나의 쉼을 통해 우리 집 종도 동일하게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희년이 됩니다. 모든 땅이 다 원래대로 돌아가는 겁니다. 불교의 자비와 그리스인의 은혜는 개념이 다릅니다. 위에서부터 일방적으로 나누어주는 개념이 아니라, 원래 내 것이 아니었다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규모 면에서 작은 교회가 자립을 해야 한다면, 규모 면에서 크다고 평가받는 교회가 나누십시오. 건물부터 주변 작은 교회들과 나누어 사용하십시오.
주변의 교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은, 자선사업에 선교라는 이름을 걸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사역에 함께 동참시키는 것입니다.
11. 교회 건물로 인한 고민은 목회자라면 모두 할 것입니다. 저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2000년 초반 분쟁으로 인한 아픔에 스스로 건물을 내려놓고 광야생활을 수년간 했던 교우들이 안착한 곳은 정릉 지하 창고로 쓰던 건물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으로 교회에서 건축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헌금을 사람을 세우고 선교하며 구제하는 곳에 먼저 사용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면 나머지는 주님이 더해 주시겠지 믿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그럼에도 지하에서 나올 길은 막막합니다. 여름이면 천장에서 물이 새는 게 당연한 교회입니다. 기도실이 무너져 주인에게 말씀드렸더니 그곳을 사용하지 말라 해서, 창고로 바꾸었습니다. 천장에서만 물이 새는 게 아니라, 이제는 매일같이 비가 안 와도 물이 샙니다. 비가 오면 바닥에 물이 스며듭니다.
곰팡이가 곳곳에 스며들어 페인트를 칠하고 벽지를 발랐지만, 다시 또 올라오곤 합니다. 교우들에게 얼마나 미안한 마음이 드는지 모릅니다. 상대적으로 젊은 교우들이 많은 교회인데, 이 장점을 살리려면 환경을 개선하라고 충고를 듣습니다.
네, 저도 잘 압니다. 앞으로 좋은 환경의 교회가 많아져, 젊은 사람들이 이런 교회는 오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아이를 가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환경이고, 나이 드신 분들에게도 좋지 않은 환경이니 이제 건축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방송에 나가서 한 번도 건물에 대한 고민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주가 되어야 할지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방송에 출연하면 목사님에게 돈이 생긴다고 오해하는 분을 만난 뒤, 모든 출연료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CBS <새롭게 하소서>와 같은 방송에 출연하면, 이런저런 전화가 참 많이 옵니다. 그중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전화도 옵니다. 있을 때는 드리고, 없을 때는 못 드린다고 정중히 말씀드리고 구청에 연락해 도와드리겠다 말씀합니다.
그러면 고맙다는 분도 계시지만, 버럭 화를 내시는 분도 있습니다. 제 통장에 남은 돈을 다드렸음에도 “어떻게 5만 원 주면서 그런 소리를 하냐”고 하십니다. 돈이 없다 말씀드리면 “무슨 돈이 없어 목사가! 정말 너무하시네요” 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저는 그 분들이 밉지가 않습니다. 정말 미안할 뿐입니다. 정말 몇만 원에 목말라 살아가는 그분들 인생이 서글퍼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꼭 기도를 해드립니다. ‘주님 돈에 목마른 인생 되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그 기도는 그분을 향한 것이지만, 동시에 저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저희 교회에는 노숙인 분들이 종종 오가십니다. 간판도 없는데 어떻게 알고 오시는지, 저를 찾습니다. 어떤 분은 제 앞에서 술을 드시기도 하고, 어떤 분은 용돈을 받아 가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저와 교회 형편을 보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목사님 내가 건물주에요. 빌딩 두 채가 있어요. 그런데 제가 지금 치아 치료를 해야 하는데 당장 돈이 없거든요. 있는 만큼만 주시면, 나중에 교회 건물 딱 드릴게요.”
호언장담이 아니라 허언장담인 걸 압니다. 아마 제가 먼저 돈을 구하는 사람이리라 믿나 싶습니다. 일단 속아주고 이용당합니다. 그리고 기도해 드립니다.
선교사님 자녀라는 분도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하시다 양육을 하지 않아 하나님을 버렸다가 암에 걸렸다는 청년, 자신이 깡패라며 으스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메일도 많이 받습니다. 격려도 있지만, 본인이 50억 자산가인데 말기암 환자라 기부할 곳을 찾는다며 저를 알게 되서 연락했다는 겁니다. 코트디부아르에 살고 있는데, 당장 기부할테니 은행 정보와 본인 신분증을 달라는 분도 계십니다. 당연히 피싱이지요. 그런데 메일 피싱도 사람이 보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분들에게 답장을 드립니다.
“선생님, 한국에서는 신분증을 공유하는 것이 피싱에 이용됩니다. 그래서 드릴 수가 없습니다. 선한 마음이셨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아마 주님이 더 귀한 곳으로 사용해 주시리라 믿고 기도합니다. 정말 말기암이시라면 예수님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혹시 거짓이 맞다면, 지금이라도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만 용서가 있고, 자유가 있습니다. 앞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기도제목이 있으면 보내주세요”라고 보냅니다.
이 모든 것은 저 스스로 조금만 목적이 달라지면 방향이 달라질 것이요, 그래서 수단이 목적된 삶을 살게 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목회자, 교우, 그리고 모든 분들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권합니다. 2023년, 삶을 돌아보고 목적을 잃지 않는 소명의 사람이 먼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때가 되면 더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미 다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개인의 이익을 위한 사명자가 되지 않도록 맡겨주신 소명을 위해 살아가는 소명자가 되도록 살아가십시다. 토끼처럼 빨리 빨리,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느리더라도, 목표를 잃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류한승 목사
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