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칼럼] 이름은 곧 빛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사전적 의미의 이름이란, 어떤 사물이나 단체를 다른 것과 구별하여 부르는 일정한 칭호입니다. 사람의 성(性) 뒤에 붙여,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부르는 명칭이기도 합니다.
이름 외에 상호(商號)는 상인이나 회사가 영업상 자기를 표시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이름 명칭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상호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인데, 우리나라에 근대적 의미의 상업이 등장한 것이 극히 최근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시대는 상호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두드러집니다. 상호에 따라 상품과 회사의 흥망이 좌지우지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소비자들의 관심도가 높은 상호는 회사의 얼굴이요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큰 역할을 하며, 기업의 명운이 걸릴 정도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지명(地名)이란, 마을이나 지방, 지역, 산천 등의 이름입니다. 대개 우리나라 이름은 뜻글자이므로 좋은 뜻을 많이 사용하지만, 요즘 세대들 이름은 주로 부르기 쉽고 듣기 좋은 이름으로 많이 사용하는 추세입니다.
이전 시대는 어른들이 자녀의 이름을 성의 없이 지었습니다. 남자는 ‘몽돌’, 여자는 ‘몽침’, 더구나 막내딸에게 붙여진 이름은 ‘끝순’이라고 지어 많은 놀림을 당해, 자라서는 개명하는 사례들이 속출하기도 했습니다.
옛 시대에는 머슴이나 종 이름을 천하게 지어 웃음거리가 됐고, 천한 이름을 가진 머슴들과 종들은 결국 이름대로 생활하게 됐습니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삶이 끝나고 나서도 지속될 무언가에 인생을 투자하라는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녀를 낳으면 맨 먼저 하는 일 중 이름을 짓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이름대로 된다는 옛말에, 좋은 이름을 지으려 합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기 위해 작명가에게 찾아가 거금을 들이기도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당연히 믿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작명가들은 이름은 후천운(後天運)을 열어준다고 말합니다. 타고난 사주(四柱)는 선천운(先天運)이니 어쩔 수 없지만, 거기에 머무를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습니다. 선현들은 이 점을 간파하고 음양오행 사상에 바탕을 둔 슬기를 발휘했고, 사주의 선천운을 살펴 그것을 이름으로 보완하고 후천운을 열게 한 것입니다.
작명가들은 좋은 이름이 후천운을 잘 열 수 있도록 기원하는 마음으로 지극정성을 담아 그 뜻을 함축해낸 마음의 꽃이라고 합니다. 각자 이름에 따라 개운(開運) 향방이 달라지므로, 적성과 진로에 맞는 좋은 이름으로 행복한 삶의 출발이 되시기 바란다면서 자녀들 이름을 부모가 직접 지어주는 것도 아주 바람직한 일이라고 합니다.
필자도 오래전에 아는 친구로부터 아들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망설이다 결국 이름을 지어준 일도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궁금합니다. 필자의 집 자녀들 이름 역시 필자가 작명했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대개 믿지 않는 비신앙인들은 자녀들 이름을 작명가에게 돈을 주고 짓거나, 아는 지인에게 부탁하거나, 사찰에 시주하며 짓기도 합니다. 거금을 들여서라도 작명을 의뢰하는 목적은, 자식의 출세나 명예가 자신의 자존심이고, 권력을 누리거나 이루지 못한 꿈을 대리만족하기 위한 욕심에서 비롯된 풍토가 아닐까 싶습니다.
영국 속담 중 “생명을 빼앗기는 일은 있어도, 이름을 빼앗기는 일은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이름은 아무나 몰래 가져다 쓸 수 있는 장물이 아닙니다. 특히 지난해 이태원 참사로 두 야권 성향 매체가 희생자들 실명을 유족들의 동의도 받지 않고 공개한 것은 분명 이름 훔치기, 도명(盜名)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름은 본래 아브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람의 본래 이름은 ‘존귀함’이라는 뜻이며, 아버지 데라가 지어줬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나이 99세 때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뜻은 ‘열국의 아버지’, 아내 사라는 ‘열국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 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 2:19)”.
성경에서 사용되는 이름은 사람이나 물체의 속성과 관련 있습니다. 아담도 동물들의 속성에 따라 각각 이름을 지었습니다. 필자의 생각으로, 아담은 최초의 인간 작명가였습니다.
우리 이름에는 자음과 모음의 단순한 조합을 넘어 강력한 의미와 힘이 담겨 있습니다. 옛 어른들께서는 “이름대로 된다”고 늘 말씀하셨고, 그래서 자녀를 임신한 부모들은 어떤 이름으로 지을지 상당히 고민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향해, 아직 일어나지 않는 때에 언급하시며 천재지변과 인간의 박해로 인한 혼돈과 고통에 대해 묘사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 때문에 보다 혹독한 시련을 겪을 것이라며, 인내를 당부하십니다. 지금은 양상이 조금 달라졌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좋든 싫든 부모님이나 집안 친척들의 뜻과 희망이 내포된 이름을 부여받았습니다.
특히 말씀과 성찬의 식탁에 참여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세례에 동참함으로써 구원의 보증인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받았습니다.
기적의 소문이 퍼지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시고 갈릴리를 떠나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고 묻자, 주변 환경과 경치에 심취돼 있던 제자들이 스승의 물음에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합니다.
“세례 요한, 그리고 엘리야, 예언자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군중들이 많습니다”고 대충 답합니다. 하지만 군중들의 심리를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 궁금하셨던 바는 그런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진심을 알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마 16:15)?” 제자들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사이,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이 말씀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면서 진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름까지 지어주시며 교회를 맡기신 것입니다.
교회의 정통성은 법적 측면과 본질적 측면을 다 지니는데, 베드로가 인정한 후계자나 그 후계자들로 이어지는 것이 법적 정통성이라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고 믿으며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본질적 정통성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제자가 되어 그 분의 가르침을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분을 알아보고 믿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세례를 받는 것도 물론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신앙을 고백하고 간증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 위에 세워진 교회에 엄청난 축복까지 내려 주십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는 엄청난 축복을 베드로에게 내려주신 것입니다.
이름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 속에 숨어 있는 부모의 마음, 그리고 신앙고백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름의 귀한 뜻과는 거리가 멀게 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아도니야, 압살롬, 사울, 아간, 가룟 유다 등입니다. 단 야곱은 ‘찬탈자, 속이는 자’라는 뜻의 이름인데, 그 이름을 지어준 분은 아버지 이삭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왜 야곱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까요?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해서 그랬을까요? 평생 이 사람 저 사람들을 속이며 고통스럽게 만든 야곱의 어두운 삶은 하나님을 얍복강에서 만나면서 완전히 깨어지고, 깨어진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는데, ‘하나님과 싸워 이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야곱처럼 깨어져 거듭난 삶으로 전환하여 하나님 나라를 쟁취하며, 날마다 믿음 안에서 깊은 간증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름은 곧 세상에 드러나는 빛이므로, 이름대로 살려고 노력하면서 예수님 이름을 높이 드러냅시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