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다른 모든 은사는 일시적인 것으로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폐하지만, 사랑의 은사는 영원히 계속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로서 모든 은사들뿐 아니라 믿음과 소망보다 더 크고 위대하고, 특히 인간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은 그 깊이와 높이, 무게와 두께, 부피를 측정할 수 없으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을 순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소망은 믿음을 굳게 지켜 믿는 바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며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구원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성도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특히 세 가지 중 사랑이 제일인 까닭은 그것이 믿음과 소망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것이며, 인간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교인들이 귀하게 여기던 방언과 예언, 믿음과 구제의 은사를 예로 들면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짧은 본문에서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올 정도로 사랑은 인간 세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새 계명은 구약에도 이미 기록돼 있는 것으로(레 19:18), 예수님께서 직접 강조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더불어 율법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사랑의 동기와 표준이 예수님 자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이제 육체적으로 제자들에게서 떠나심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결코 주께서 가시는 곳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며, 그들은 성령에 의해 양육받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결속하는 매개체가 육체로서의 주님 대신, 영적 사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이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갖는 독특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참 교회란 내적으로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것이 외적으로 드러나 향기를 뿜어내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말하는 사랑의 종류는 4가지였습니다. 첫째 스토르게(Storge)는 부모나 가족 같은 친밀한 관계에서 나타내는 사랑을 뜻하며, 둘째 필리아(Philla)는 친구 간의 사랑, 셋째 에로스(Eros)는 육체적인 사랑, 마지막 아가페(Agape)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아주 쉽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필자는 이 4가지 사랑 중 에로스는 제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도 그랬듯 지금 사람들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와 부모와 나라를 사랑해야 함에도, 육적 사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와 부모님,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아주 거리가 먼 에로스 사랑은 다른 말로 표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희생 없이 사용할 수 없는 단어가 아닐까요?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아 무게도 달 수 없고, 크기와 부피, 높고 낮음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 말씀만이 제대로 된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말씀 자체가 사람으로서 도무지 실현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아마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인 아가페 사랑 아닐까요? 하지만 친구를 위해 목숨을 잃는 것은, 절대적인 아가페 사랑에 근접하는 것 아닐까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은 대부분 이 말씀 같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1-2)”.
그저 신분이나 돈 많은 부자, 그리고 빼어난 신체적 조건이 우선시되는 이 시대에, 교회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의 의미를 마음에 담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형식적인 모양새만 갖춰 사랑이라는 말을 노래처럼 마구잡이 식으로 부르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부산 덕천동 어떤 교회는 문 앞에 이 말씀을 돌로 새겨놓고도 성도들 출입을 막고 심지어 쇠사슬로 문을 걸어 잠그고, 힘 있는 젊은 집사들을 문 앞에 세워 담임목사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지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놓고 교회를 떠나간 성도들 중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많이 냈던 성도들에게는 다시 교회에 나오라고 권면하고, 힘없고 가난해 담임목사 보기에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에게는 전화도 한 통 하지 않습니다. 저들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분들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웃기는 것은 성도들 약 700여 명을 내쫓아놓고 ‘어린양 찾기 프로그램’을 시행한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지구상에 이런 코미디가 또 있을까요?
대낮에 교회 문을 걸어 잠그는 교회도 있습니다. 걸인이나 노숙자들이 들어와 물건을 훔칠까봐, 그리고 용변 등을 볼까봐 잠근다고 합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다”, “교회는 주님의 몸 된 성전이다”라고 습관처럼 말은 하지만, 실제로 주님 말씀과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를 유대인에게 적용하면 ‘의식과 율법의 무거운 짐에 눌려 고통당하는 자’라고 볼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죄의식에 사로잡히거나 어려움에 처해 구원을 갈망하는 죄인이나 고통받는 자를 뜻하며, 교회는 그런 자들을 위해 적극 나서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의 복음을 전하기 앞서, 우선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화합하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무익한 상처만 남을 뿐입니다. 성도들끼리도 사랑을 나눌 수 없다면 어찌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사랑할 수 있겠으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역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도들 간에 시기와 중상모략이 늘 판을 치는 교회라면,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사랑 없는 그 교회에는 그저 허울 좋은 자랑거리나 교만이 가득한, 사탄 마귀가 좋아하는 집일 뿐입니다. 교회의 사명을 잊은 그 교회에는, “나는 너희들을 도무지 모른다”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을까요?
이제 주님의 승천과 성령강림을 앞둔 아름다운 날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받을 고통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활 사건 이후 놀랍게도 제자들은 기억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으로 주님 말씀을 하나하나 기억해 냈습니다. 성령님에 의한 제자들의 기억 전달이 복음을 기록하게 만들었습니다. 세리 마태 같은 제자는 주님과 함께할 때부터 주님 말씀을 기록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이해와 체험은 우리 신앙에 있어 필수적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령을 체험하는 제자들이 성령 안에서 기억해낸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주님을 신뢰하며 믿는 성도들입니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 사람을 사람다운 인격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마음의 눈입니다. 그리고 이 눈을 통해 우리는 더 넓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는 남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내 마음을 더 크게 여는 은총을 주시기 위함임을 또 다시 발견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우리에게 늘 기쁨을 주는 평강의 안식처요, 눈에 보이지 않는 위대한 인격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장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