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욱의 ‘연애는 다큐다’ 115]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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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업무 때문에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던 분이 있었는데, 아주 가끔은 사적 문제로 통화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다짜고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김 선생님… 나 지금 진짜 죽고 싶은데, 이거 어떡해야 되지?”
그 말은 마치 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에게 하는 듯한 소리였고, 그래선지 나 역시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럴 땐 그냥 들어주는 수밖에 없다. 돕는답시고 맞장구를 쳐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를 죽고 싶게 만든 것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평소 잘 알고 있었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말을 할 만한 사적 관계가 아니었는데 오죽하면 그랬을까. ‘힘들어 죽겠다, 괴로워 죽겠다’도 아니고 ‘죽고 싶다’니…. 그 통화는 나 들으라고 한 것도, 본인 스스로에게 한 것도 아닐지 몰랐다. 어쩌면 그의 아내가 문밖에서 들었으면 하는 말이었을 수 있다.
아무튼 그렇게 말이라도 안 하면 그대로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을 듯한 긴박감이 느껴졌다. 사람이 스스로 죽는 것은 긴 고심 끝의 결단인 경우도 있지만, 마지막 방아쇠는 충동적 요인에 의해 가능한 것 같다. 또 평소 극단적 생각을 하지 않던 사람도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에 놓이면 충동에 의해 나쁜 생각을 하기 충분할 것이다.
그날 그분의 간절함이 수화기를 통해 생생하고 처절하게 들려왔다. 미혼인 사람은 그 마음을 절반도 읽지 못했겠지만, 기혼자는 대부분 알 수 있는 그런 답답함이었다. 그 느낌을 알기에 아무 위로나 대꾸도 못하고 말문이 막히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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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아직도 생존해 있다. 지금은 나와 그런 통화를 하지는 않지만, 세월이 지나도 답답함의 원인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아직 아내와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가장 위험한 사람이다. 사람을 죽고 싶도록 답답하게 만들어 극한까지 몰아가는 사람이라, 인생의 끝까지 승부를 겨뤄야 한다. 먼저 죽어서 혼자 남게 해 복수를 할 수도 있지만, 뜻밖에도 잘 갔다, 홀가분하다면, 죽어서도 패한 것이다.
본인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이토록 극한의 대립을 하면서도 이별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서로 지독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얼굴이 팔리는 줄 알면서도 TV 상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부부들을 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 배우자에게 간절히 손짓하는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상담이 필요 없고, 방송을 하는 의미도 없다. 미워하는 사람을 고발하기 위함이 아니라, 죽도록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한 구조 요청의 몸부림이다.
남녀가 막상 갈라서려면 걸리는 게 많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다 끝까지 사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돈 벌어줄 사람이 없어서, 밥해줄 사람이 없어서, 혼자는 안 되는 일이 많고 위험해서, 혼자는 적적하고 심심해서, 결혼하는 자식에게 흠결이 될 것 같아서, 주변 시선이 부끄러워서, 그리고 없는 것보다는 나아서…. 하지만 정말 싫으면 아무리 필요해도 함께하지 않는다. 같이 있다가는 당장 죽겠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그래도 버티는 이들은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재본 적도 없고,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를 수도 있지만, 사랑과 미움의 냉온탕 담금질로 견고해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애증의 복수심에 불타 마지막까지 최대치로 갚아줄 날을 기다리고 있다.
엄청난 호강과 혜택으로 코를 납작하게 해주든지, 나 없이 혼자 살면서 그리움과 후회로 몸부림치게 만들든지, 아무튼 보란듯이 굴복시킬 날을 향해 발톱을 숨기고 산다.
특히 괴로움 속에서도 가정을 지키려는 크리스천은 정상적 부부로 살기 위한 영적 전쟁을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죽고 싶을 만큼 지치는 것이다. 껍데기만 있는 부부는 서로 어떤 필요를 채워주고 이용하면서 기능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극한의 고통까지 겪거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괴로울 필요가 없다.
죽고 싶다는 고백은 왠지 치열한 영적 전투에서 실패해 찔리고 피 흘리며 작전상 후퇴한 자, 잠시 대열에서 낙오한 자의 넋두리 혹은 전쟁 포로의 느낌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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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년도 넘은 그분의 SOS 전화에서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의 말이다. 독신이었던 바울이 배우자 때문에 이 말을 했을 리 없지만, 매일 죽는 듯한 괴로움 속에서 가져야 할 소망을 말하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지고 있는 기쁨 즉 너희로 인한 기쁨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사람들의 방식대로 에베소에서 짐승들과 싸웠거든 만일 죽은 자들이 일어나지 아니한다면 그것이 내게 무슨 유익을 주겠느냐? 내일 우리가 죽을 터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자(고전 15:31-32)”.
그가 겪은 일상은 매일 죽는 삶의 비참함인데,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그런 인생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소모적인 것이냐는 이야기다. 초창기 성도들이 굶주린 맹수들에게 짓밟히고 박해를 당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삶에서 가정을 무너뜨리고, 나를 포기와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는 원수 마귀와 싸운다.
결국 바울이나 우리나 성도로서 같은 상대를 대하는 것이다. 그 위기의 원인이 내가 아닌 배우자라고 생각할 때, 그 싸움에서 이길 날은 점점 멀어진다.
어쩌면 사랑하기 힘든 배우자를 끝까지 사랑하는 일은 죽을 만큼 힘든 일이며, 죽어야 비로소 끝나는 일이다. 예수님은 신랑으로서 신부인 우리 성도들을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그리고 죽음으로써 원수를 이겨 모든 인류의 죄에 청구된 몸값을 갚으셨다. 부부의 사랑은 마치 이런 것이 아닐까….
김재욱 작가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등 40여 종
https://blog.naver.com/woogy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