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가정이 회복하는 세상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받느니라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잠언 28:10-12)”.
악인이 의인을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면, 악이 이겼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자멸만을 초래할 뿐입니다. 유혹한 자는 당연히 벌을 받을 것이고, 정직한 자가 스스로 진실했다면 그는 오히려 그 유혹을 통해 굳건해지고 고상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는 세상적인 영광을 갖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가 명철하다면 부자가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는 태도를 밝혀 낼 수 있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언 22장 6절)”.
‘가르치라’는 히브리어로 ‘하나크’ 인데, 원래 ‘바치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 에서와 같이 ‘훈육’의 의미로 쓰인 곳은 구약성경에서는 이곳뿐입니다.
민주주의의 등불이요 노예 해방의 아버지 링컨의 생애는 늘 가시밭길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늘 성서를 읽고 말씀대로 살아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는 어머니의 말을 항상 기억하며 역경을 헤쳐 나가, 마침내 미국 제16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갖은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말씀으로 양육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간절히 기도했던 어머니의 올바른 훈육에는, 꺼지지 않는 기도의 심지도 함께 타올랐습니다. 어릴 적부터 여호와를 알고 부모의 훈육을 이행했던 사람들의 자녀들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고, 말씀에 의지하여 세상에 소금과 빛의 삶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부모들은 아이를 훈육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병들게 하며, 이기적인 삶으로 사회를 어둡게 만듭니다. 이런 모습을 보노라면 양심마저 팽개친, 정의와 공정과 질서가 사라진,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계절의 여왕’ 5월이 이미 절반을 넘었습니다. 5월 달력을 유심히 보노라면 각종 기념일이 빼곡히 기록되어있습니다. 1년 열두 달 가운데 가장 기념일이 많은 달입니다. 어린이날부터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 등 가정과 관련된 따스한 기념일이 연속으로 있기에 5월을 가정의 달이라 부르는 것 아닐까요?
아이는 가정에서부터 서로 도우며 사랑하고 협력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며, 공중도덕과 질서를 배우고 가정과 사회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마치 아이들을 자신의 도구로 생각하여 미래를 해치는 뉴스가 종종 나올 때는 참담한 심정 금할 길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부모에게 효도하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이 미덕으로 전해오는데, 요즘 같은 시대는 부모에 대한 ‘효’의 정신이 점점 멀어짐을 보면서 마음이 몹시 아픕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직업적으로 변하여, 교사들이 매우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한 언론에서 ‘다시 태어나도 선생님이 되겠다’는 교사가 고작 20%로 역대 최저였습니다. 또 교직생활 만족도가 2006년에는 67,8%였지만 올해는 23.6%로 역대 최저치입니다. 교사들의 심정을 알 것 같습니다.
올해 제42회 스승의 날을 맞아 실시한 교사들 설문조사 결과, 교권 추락과 과도한 행정업무가 그 원인으로 꼽혔습니다. 수업 방해 등 학생들의 문제 행동을 제지할 방법도 없고, 괜스레 적극적으로 지도했다가 무차별적 항의와 악성민원, 아동학대로 신고당하는, 무기력한 교권 실상이 교사들의 자존감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특히 학부모들의 민원과 간섭 때문에 교사의 길을 접고 싶다는 것이 대부분의 심정입니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하고 교사는 스승다워야 하는데, 지금의 학교와 교육청은 학생들 인권에만 열을 올렸지, 교사들의 보호를 위한 법이나 복지에는 아예 손을 놓고 있습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이 나라의 미래 교육이 참으로 암울할 뿐입니다.
교사들의 말을 듣지 않는 학생들을 제지할 수 있는 처방을 내놓아야 합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에게 함부로 욕해도 괜찮고, 선생님이 화가 나서 실수로 욕을 하면 고스란히 당해야 하는 잘못된 시스템 때문에 교사들의 사기가 이만저만 꺾인 게 아닙니다.
소신껏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학교에서 선생님들만 허구헌 날 수모와 낭패를 겪어야 하는 오늘날 교육의 현주소는 참으로 암담합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던 옛 성현 말씀이 무색할 만큼,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 시대가 무척 한탄스러울 뿐입니다.
엊그제 어느 학교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한 학생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물을 먹고 컵을 땅에 던졌습니다. 선생님은 학생에게 컵을 주워 쓰레기통에 넣으라고 이야기했지만, 막무가내로 그냥 도망가면서 컵을 던지지 않았다고 우겨댑니다. 오히려 CCTV를 확인해서 안 나오면 책임지겠느냐며 되레 큰 소리를 치며 도망을 갑니다.
다른 학생은 신발에 음식 찌꺼기가 묻자 옆에 걸려 있는 태극기에 닦고 있어 뭐라고 했더니, 욕을 하면서 도망을 갑니다. 이것이 요즘 학생들의 민낯입니다.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은 표준말처럼 사용한 지 오래 됐고, 자신이 저지른 일은 일절 함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며 오히려 하지 않았다고 우겨대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입니다. ‘정직’이라는 말은 사라진 지 꽤 오래 됐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필자의 어린 시절만 해도 정직한 사람이 우대받는 아름다운 사회였는데, 오늘날은 거짓말 잘하는 사람과 사기 쳐서 돈을 많이 벌거나 권력을 잡는 자에게는 머리가 좋다고 칭찬하는 세상으로 바뀌었으니, 참 교육은 다 어디로 숨거나 사라졌는지요?
학교 등교 후 수업시간에 도망을 가는 학생들을 못 나가도록 팔이나 손목을 잡으면 성추행으로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나, 돈도 없으면서 택시를 타고 와서는 기사들과 다투지를 않나, 아침 9시까지 학교에 등교를 해야 함에도 하교 시간에 택시를 타고 등교하는 모습은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어떤 학부모는 오후 하교 시간이 다가오는 때서야 아이를 차에 태워 등교시키기도 합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그램에 소개할 만한, 참으로 놀라운 특종이 아닐까요.
이 모두는 가정교육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진실된 역사와 공중도덕, 질서 등을 가르쳐야 함에도, 편향된 이념교육으로 교육을 그르친 노조 역시 자업자득으로 당하고 있는 교육 현실입니다.
학교의 참 교육을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도 중요한데, 잘못 되어가는 교육 현장을 진실하게 알려야 할 사명은 온데간데없이, 오히려 더 부추기는 참혹한 분위기만 제공하는 일부 좌파 언론과 전교조 탓에, 자라는 청소년은 물론 기성세대에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론이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다 보니, 거짓과 권모술수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있습니다.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주일학교 교사를 ‘반사’라고 했습니다. 필자도 중학교 시절 반사를 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오로지 믿음 하나만 있어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교사들도 많았지만, 말씀으로 훌륭하게 가르친 덕분에 많은 인재를 이 땅에 키워냈습니다. 모범적으로 헌신하며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 숭고한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아이들의 어려움을 자신의 아픔처럼 보듬으며, 선한 행동과 함께 남몰래 눈물 지으며 솔선수범했습니다. 교사들의 뜨거운 사랑의 훈육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발전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낸 주님의 아름다운 종들이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러한 교사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지극한 관심과 사랑으로 그들을 격려하며, 큰 수고에 대한 사랑이 아낌없이 피어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마다 매년 5월 셋째 주일은 스승의 주일로 지켜, 교사들의 근속에 따라 포상을 하거나 함께 잔치를 벌이며 위로하는데, 아예 스승의 주일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는 교회도 있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5월은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봄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희망의 계절에, 이 나라에 속해 있는 모든 교사들과 국민들은 자신들이 맡고 있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가정을 위해 이웃과 나라를 위해 신실한 사명으로 지혜를 모아, 최선을 다하는 일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정직하지 못하고, 변명만 늘어놓으며 내로남불을 양산하는 국회의원 무리들 때문에 나라는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돈벌이에만 몰두하며 이념에 젖어 국민들을 기만하는 양아치 같은 잡초들부터 뽑아내야 하겠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여정에 동행하셨지만 당신을 강요하지 않고 보여주시며, 일어난 사건의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마음을 사랑으로 열어주신 예수님처럼, 진심으로 소통하는 이들은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을 표현합니다.
양극화와 대립의 시기에 마음을 열고 두 팔을 비롯한 모든 육신의 문을 열고 소통하려는 노력은 커뮤니케이션 분야 종사자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책임입니다.
특히 가정의 달을 맞아 나의 좋은 표양(表揚)을 선보이는 삶으로써 복음을 전하고, 이웃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와 함께 사랑이 충만한 가정생활로 바뀌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옳은 말과 행동에는 박수를 보내고, 옳지 않은 일과 말에는 ‘아니오’라고 대담하게 말해줘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선한 양심이요, 아름다운 세상을 여는데 그 기초가 되는 가정교육 아닐까요? 가정의 회복만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