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칼럼] 전쟁과 평화론, 3가지 유형 (1)
계속되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아동과 여성, 민간인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습니다. 73년 전 이 땅에서도 무려 3년 간 참혹한 동족상잔의 6.25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전 대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돕고자 하는 우리 정부를 비판하면서 “신세 질 게 아무것도 없는 나라”라며 “왜 우리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말려 들어가야 하나”라는 망언을 했습니다. 6.25 때 목숨 걸고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고 도와준 국가들과 참전용사들을 모독하는 발언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이 문제는 초대교회부터 논의가 이어져 왔습니다. 정전협정 70주년을 앞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이상규 박사님의 ‘전쟁과 평화론의 3가지 유형’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시작하면서
이 세상에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만행은 전쟁이다. 살인이 가장 극악한 죄라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 전쟁에 아무 책임이 없는 민간인들이 전쟁 수행자들(군인) 보다 더 많이 죽거나 다친다는 것은 전쟁이 한 두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권을 유린하고 정의를 파괴한다.
손봉호 교수의 지적처럼, 우리는 흔히 행위자의 동기에 따라 그 행동의 옳고 그름을 평가한다. 그래서 고의적 살인만 죄악이지, 과실치사나 전쟁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의도하지 않는 살상은 큰 죄악이라고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행위 주체에만 초점을 맞추는 잘못이다. 훨씬 더 중한 것은 피해자와 피해자가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다. 고의적 살인이나 실수 혹은 전쟁에서 살인이나 피해자의 죽음에는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전쟁에서 우연하게 죽었다 해서, 고의적 살인행위로 인한 죽음보다 덜 억울하거나 덜 고통스런 것은 아니다.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힘의 정도가 과거의 어느 때보다 커졌고, 그 방법 또한 다양해진 오늘날에는 사람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피해자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 평등의 원칙에 부합되고 그것이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다. 현대의 윤리는 행위 주체 중심적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적이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쟁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만행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8백만 명의 군인을 포함하여 1천 5백만 명이 희생되었는데, 당시에는 이를 ‘최악의 소모전’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7천만 명이 희생되었고, 이 중 민간인이 4천만 명이었다.
나치 독일이 일으킨 독소전(獨蘇戰) 당시 소련 20대 남성 70%(1,400만 명)가 전사했다. 스탈린의 학살이 2천만 명, 마오쩌둥의 학살도 4천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6.25 전쟁은 3년 1개월 2일 간의 전쟁이었는데, 당시 재산 피해는 그만두고 인적 피해를 보면 한국 및 UN군 피해자가 77만 6,360명(사망 전사 부상 실종), 북한 및 중공군 피해자 177만 3,600명(북한군 80만 1,000명, 중공군 97만 2,600명)이었고, 민간인 피해(사망 학살 부상 실종)는 254만 968명에 달했다.
그 외에도 피난민 320만 명, 전쟁미망인 30만 명, 고아 10만 명, 이산가족 1천만여 명이 발생했다. 사망자만 말한다면 군인 40만 명, 민간인 약 200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지난 5,600년 동안 1만 4천 5백 회의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고, 약 35억 명이 전쟁 와중에 생명을 잃었다고 한다.
무기로 인명을 살상하는 것 외에도 전쟁 중에는 평상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정도의 강간, 납치, 협박, 인권 모독, 인권 유린이 이루지고 정의, 정직, 도덕 등 인간다움은 무력해져 인간이 짐승보다 못한 일을 윤리의식 없이 자행하게 된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독일 위험사회학자 울리히 베커(Ulich Backer)의 지적에 공감하게 된다. 베커는 현대의 재난에 3가지 특징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재난의 원인 규명이 어렵고, 둘째는 재난의 범위가 대규모적이며. 셋째는 재난의 고통이 무한정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며, 기독교인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할 것이다.
평화에 대한 염원에서 시작된 평화론 가운데 아래 3가지 유형에 대해 고찰하고, 그 주장의 의의와 타당성 그리고 현실성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런 논의가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의 와중에서 평화를 숙고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1. 기독교평화주의(Christian Pacifism)
전쟁이나 폭력은 어떤 경우라도 용납될 수 없고, 무저항 비폭력 비전 혹은 반전을 주장하는 입장을 평화주의라고 말한다. 이를 절대평화주의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평화주의(Pacifism)’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인도적 평화주의(Humanistic Pacifism)이다. 전쟁이나 폭력 행사는 인간 생명 살상 혹은 인간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라는 점에서 허용될 수 없고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두 번째 실용적 평화주의(Pragmatic Pacifism)는 폭력보다는 비폭력이 사회정치적으로 효율적이기 때문에, 비폭력을 지향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셋째는 기독교회가 말하는 평화주의인데, 성경과 예수님께서 가르치며 보여주셨고, 초기 기독교회가 따랐던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폭력과 전쟁을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기독교 평화주의(Christian Pacifism)라 불리고 있다.
이런 기독교 평화주의 입장을 취했던 대표적 경우가 초기 기독교와 16세기 재세례파 계열의 메노나이트교회, 그리고 ‘역사적 평화교회’들이었다.
초기 기독교회는 첫 300여 년간 비폭력 평화주의를 지향했다는 점에 대해 하르나크(Adolf von Harnack), 옥스퍼드대학 캐둑스(C. J. Cadoux), 레이든대학 헤링(G. J. Heering), 메노나이트 학자들인 홀쉬(John Horsch)와 헐스버그(Guy F. Hershberger) 등 여러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비폭력 평화주의를 지행했다는 말은 폭력이나 전쟁을 반대했다는 의미인데, 이는 전쟁 수행을 위한 조직인 군 복무도 반대했다는 뜻한다.
이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은 폭력이나 전쟁을 비도덕적이고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배척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평화주의 전통을 따랐던 이들이 초대교회의 테르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 힙폴리투스, 그리고 메노 시몬즈, 현대의 하워드 요더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등이다.
초기 기독교
초기 기독교회가 군복무나 살상, 폭력, 전쟁을 반대한 것은 근본적으로 신약성경, 특히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따르려고 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가르침이나(마 5:39),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라는 가르침(막 9:4)을 제자도(弟子道)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비록 이 땅에서 살고 있으나 이 땅의 질서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심리적 이민자들이었다. 2세기 중엽 변증문서인 ‘디오그네투스에게(Epistola ad Diognetum)’에서는 이들을 ‘거주하는 나그네’라고 불렀다.
초기 기독교회가 군복무나 폭력, 전쟁을 반대했다는 점을 보여 주는 흔적이 초기 교부들의 글 속에 나타나 있는데,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35-108)는 자신을 해친 이들에게 복수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고,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69-155)는 빌립보인들에게 악에게 대항하지 말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벧전 2:23)에 순복하라고 했다.
변증가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는 180년 경 동일한 취지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혈전(血戰, bloody game)이라고 불리는 검투사 경기에 참여하거나 관람하는 것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생명을 파괴하는 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55-160)의 권고는 보다 분명한 증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음란한 연극 관람이나 살상으로 이어지는 검투 경기 관람은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174년 경에는 기독교인들은 군복무를 해서는 안 된다고 권면한 바 있다. 그는 군인이 신자가 되었을 경우 즉각적으로 군복무를 그만두든지, 순교자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초기 기독교가 군복무를 반대하고 비폭력 평화주의를 지행했다는 점은 2세기 후반 이교도 켈수스(Celsus)의 기독교 비판에서도 암시되어 있다. 켈수스는 기독교인들이 군복무를 반대하고 전쟁을 거부한다면 결국 제국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면서, 기독교인들의 반전 평화주의를 공격했다.
또 258년 순교한 키푸리아누스(Cyprianus)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은 범죄로 간주되지만,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살인은 용기로 간주된다”며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이나 전쟁을 비판했는데, 이런 점들은 초기 기독교회의 평화주의적 입장을 보여준다.
정리하면,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전쟁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아 전쟁을 반대했고, 전쟁 중에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살인이라고 보아 군 복무를 거부했다.
비록 2세기 중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Marcus Aurelius, 161-180) 치하에서 일부의 기독교인이 군인이 되기도 했고, 3세기 작성된 ‘히폴리투스의 교회법(Canons of Hippolytus)’에서 실제로 살인을 행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인도 군인이 될 수 있다는 전향적 견해가 대두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회의 기본적인 입장은 반전(反戰) 평화주의였다.
이런 현실에서 최초의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가 있었는데, 그가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출신 막시밀리아누스(Maximilianus, 274-295)였다. 로마제국 군인인 파비우스 빅토르(Pabius Victor)의 아들이었던 그는 아프리카 지방 총독(African proconsul) 카시우스 디온(Casius Dion)의 징집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여 295년 3월 12일 처형되었는데, 그가 최초의 병역 거부로 인한 희생자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케둑스(C. John Cadoux)에 의하면 막시밀리아누스의 경우와 동일한 병역 거부자들이 적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런 점들은 초기 기독교의 군복무 반대와 평화주의적 입장을 잘 보여준다.
3세기 생산된 교회법에 의하면 목사가 가져서는 안 되는 직업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것은 직업군인, 이발사, 수술 의사, 대장장이였다.
왜 이런 직업을 겸할 수 없다고 규정했을까? 그 이유는 앞의 세 가지 직업은 피를 보는 직업이기 때문이고, 마지막 대장장이는 이 직업들의 도구를 만드는 자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정착 목회 전 자급 목회 시대의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당시 교회의 평화주의적 이상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군복무와 관련해 많은 글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2세기 말부터 교부들은 군복무와 전쟁, 그리고 평화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하는데, 이런 변화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 활동했던 테르툴리아누스, 그리고 3세기 중반 오리게네스와 히폴리투스였다. 이들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테르툴리아누스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225)는 197년 경부터 224년까지 약 20여년에 걸쳐 집필활동을 했는데, 라틴어로 쓴 31편의 글이 남아 있다.
그의 초기 작품에 속하는 『변증서』는 이교도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므로, 기독교의 비폭력적 특성을 말하면서도 기독교인들은 제국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군 복무를 포함한 제국민의 의무를 진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후기에 기록한 『화관론』과 『우상숭배론』에서는 군복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군복무를 반대한 것은 화관과 함께 군복무가 우상숭배와 관련될 수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가 군복무를 거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제국은 누가 지킬 것인가? 켈수스(Celsus)와 같은 이교 철학자들의 거듭된 질문이었다. 이 점에 대한 테르툴리아누스의 대답은 이교도들이 볼 때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검, 곧 무기를 버릴 때 발생하는 제국의 위기를 테르툴리아누스는 상관하지 않았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보았다. 어떤 결과가 발생하든지 그 여파는 길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화관론』을 쓴 시기는 몬타누스파(Montanist) 이단으로 전향한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몬타누스파는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 속에 살았던 종말론적 이단이었으므로, 테르툴리아누스 또한 재림의 때가 임박하다고 보았으므로 군사적 안전이든 위기이든 간에 곧 지나갈 것으로 이해하고 군 복무는 기독교인들에게 적절치 못한 행위로 말하고 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군복무를 반대한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 않다. 캄펜하우젠(Hans von Campenhausen), 존 헬제렌드(J. Helgeland)는 우상숭배의 가능성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메노나이트계 학자들은 테르툴리아누스가 군복무를 반대한 것은 우상숭배의 위험성뿐 아니라 피 흘림, 살상을 거부하는 반전사상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계속>
이상규 박사
고신대학교 명예교수
백석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