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7): 정의와 자비 사역
팀 켈러 소천 이후 많은 사람들의 애도 글들이 올라온다. 놀라운 것은 참 다양한 교파의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찬사를 듣는 것이다.
팀 켈러가 자신이 속한 교단을 넘어 범교회적으로 영향을 미친 이유는 그의 사역과 관련이 있다. 복음주의권 교회들은 구원에 집중하면서 사회참여에 소홀한 경향이 있는데, 팀 켈러는 복음이 반드시 사회참여와 선교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고, 그것을 실천했기 때문에 다양한 교단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도 어렵고 아픈 사람들을 돕는 일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구호 활동은 흔히 부차적인 의무로 여긴다. 교육과 전도사역 등을 충분히 한 후에, 게다가 시간과 예산과 여유가 있을 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 그러나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팀 켈러, 이지혜 역, <여리고 가는 길>, 비아토르, 45쪽).”
1. 복음과 정의 사역과의 관계
개인구원 사회구원 분리 이유,
복음 본질 바르게 알지 못해서
애초에 복음에서 출발 못한 것
팀 켈러는 복음주의 교회의 약점인 사회참여에 대해 강조했지만 이것은 균형을 이루기 위한 보완이 아니라, 복음을 분명히 알면 자연스럽게 정의와 자비 사역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교회 리더십과 사역자들은 복음을 단지 기독 신앙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교리적 내용쯤으로 여길 위험이 있다. 그 결과 많은 설교자와 지도자들이 더 심오한 교리, 더 깊은 영성, 더 깊은 공동체나, 더 심오한 제자도, 심리적 치유, 또는 사회 정의나 문화 사역에 열정을 쏟기 쉽다. …
그러나 이런 경향 속에서 전체 그림을 놓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집중하는 사역이 있을 수는 있지만, 복음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다. 모든 형태의 사역은 복음에 의해 동기부여가 되고, 복음에 기초해야 하며, 또한 복음의 결과이어야 한다(팀 켈러, 오종향 역, <센터처치>, 두란노, 72쪽).”
팀 켈러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 분리되는 이유가 복음의 본질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두 사역을 합쳐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복음에서 출발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이다.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복음으로 파생된 사역들을 하게 된다. 리디머 교회 홈페이지에 가면 처음에 등장하는 화면이 ‘리디머 교회의 비전과 가치’를 설명한 그림인데, 복음과 사역의 관계들을 잘 설명해 준다.
“리디머 교회의 비전과 가치는 복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인데, 다섯 가지 사역을 통해 구체화된다.”
그림을 보면 예배와 전도, 공동체 형성, 교회개척 운동, 신앙과 직업, 자비와 정의 사역의 한가운데 복음이 있다.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면 다섯 가지 영역의 일들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특히 정의와 자비 사역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사역이 아니라, 복음을 알면 반드시 해야 하는 사역이라 말한다. 참된 복음이 선포되면 하나님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은혜를 경험한 개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모든 세상 일에 아픔을 느끼고, 세상이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힘쓰게 된다. 이것은 복음에서 흘러나오는 정서이고 복음은 사회의 정의와 자비사역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정의와 자비 사역의 기초가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까닭에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모든 관계를 바로잡는 일에 자연스럽게 헌신한다(팀 켈러, 최종훈 역, <정의란 무엇인가>, 두란노, 42쪽).”
2. 왜 정의 사역인가?
과부와 고아, 나그네와 가난
이들 어떻게 대우하느냐 따라
사회 공의와 정의 평가 척도
팀 켈러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을 ‘구제 사역’이라 하지 않고, ‘정의 사역’이라 부른다. 왜 ‘정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미가서는 ‘겸손하게 하나님과 행한다’는 말의 구체적인 의미를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인자’는 히브리어 ‘헤세드’인데,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무차별적 은혜와 동정을 의미하는 말이다.
‘공의’와 ‘정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쉬파트’인데,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 2백 회 이상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는 말이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인간을 공평하게 대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 24:22)”.
레위기 24장 22절에서 ‘그 법’에 해당하는 단어가 ‘미쉬파트’이고, 이것은 인종이나 사회적인 지위와 상관없이 옳고 그름에 따라 유무죄를 가려 벌을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누구든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으면 동일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결국 미쉬파트는 징벌이든 보호든 보살핌이든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주라는 뜻이다(팀 켈러, <정의란 무엇인가>, 34쪽).”
구약에서 미쉬파트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는 주로 ‘4대 취약계층’인 과부와 고아, 나그네,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고 보호하라는 의미로 거듭사용된다. 즉 성경 말씀에 따르면 이런 집단을 어떻게 대우하느냐가 한 사회의 미쉬파트, 곧 정의와 공의를 평가하는 척도라는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취약계층을 돌보지 않는다면 자비와 자선의 부족의 차원을 넘어 정의 곧 하나님의 미쉬파트를 짓밟는 행위이며, 하나님은 사회 경제적 약자들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분이시기에 크리스챤들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공의’ 즉 ‘정의를 행하는 일’이다(팀 켈러, <정의란 무엇인가>, 36쪽).
구제라 부르면 해도 되는 일,
정의라 부르면 해야 하는 일
하나님, 연약한 자 돌보신다
팀 켈러는 <오늘을 사는 잠언>에서도 잠언 3장 27-28절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를 해설하면서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선은 경제적 물리적 필요를 채워주는 실제 원조여야 한다. 이것은 자선의 문제가 아니라 이웃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는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으면 단지 사랑이 없는게 아니라 불의한 것이다(팀 켈러, 윤종석 역, <오늘을 사는 잠언>, 두란노, 42쪽).
팀 켈러가 이 사역의 이름을 ‘정의와 자비 사역(Justice and Mercy)’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구제’라고 하면 내가 안 해도 되는 일이나 하면 더 좋은 일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정의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위해 사회정의를 실현할 책임이 있었다. 그것은 선택된 민족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한 성품을 열방에 드러낼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가난한 이들의 울부짖음과 외침을 외면한다면, 세상이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린 셈이 되므로 입으로 그 어떤 신앙고백을 한다 할지라도 주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팀 켈러, <정의란 무엇인가>, 41쪽).
또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라고 명명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들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하나님의 백성이 외면한다면 팀 켈러의 표현대로 사랑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불의한 것이다.
3. 정의 사역의 동기
가난한 사람 불쌍해서 돕는 것 X
하나님 사랑 자비에 대한 반응 O
은혜에 감사해서 순종하면 복음
순종으로 자기 복 추구하면 종교
정의 사역은 복음에서 흘러나온다. 단순히 가난한 사람이 불쌍해서 도와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팀 켈러의 스승이었던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요구할 수 없는 사랑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자비를 명령하시지만, 그 명령에 대한 반응으로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에게서 너그러움이 흘러 나와야 한다(팀 켈러, <여리고 가는 길>, 84쪽).”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마 18:33)”. 예수님께서 용서를 말씀하실 때 언급한 내용이지만, 정의 사역의 동기와 근거도 동일하다. 단순히 그 사람이 불쌍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반응으로 정의가 흘러나와야 한다.
복음과 종교의 차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순종하느냐, 아니면 순종을 통해 원하는 복을 추구하느냐의 차이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통해 어떤 보상이나 공로 또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진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의 문제로 이어진다.
교회의 정의 사역은 교회가 더 나은 사람이기 때문에 부족한 사람을 돕는 구제의 의미가 아니라, 마땅히 이웃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돌려주는 의미이다.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은혜이며, 그것을 나눠주어야 할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확인해야 한다.
은혜의 결과가 아닌 인간의 공로로 사람을 돕게 되면, 정의 사역의 본질에 대해 오해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 가난하기는 하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다”고 주장하면서, 돈이 없어 도와달라고 하지만 그 사람들 집에 가보면 다 살 만한 사람들이라며 적극 돕지 않으려 할 때가 있다. 그런 태도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에 부합하지 않는 태도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문제라면 벼랑 끝에 이르기 훨씬 전부터 어떻게든 손을 쓰려고 하면서, 왜 이웃에게는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야 도움을 주려고 하느냐(팀 켈러, 정의란 무엇인가, 116쪽).”
내가 도운 사람은 나보다 못해야?
한 가닥 남은 자존심 배려 없는 것
성경 정의, 상대방 행위 상관없이
은혜로 사람 대하고 이웃 몫 나눠
내가 도와준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옷을 입고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으면, 도움을 준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내가 도움을 준 사람은 나보다 못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그들에게는 한 가닥 남은 자존심이라는 것에 대한 배려가 없는 생각일 수도 있다.
팀 켈러의 리디머 교회에서도 한 싱글맘을 도왔는데, 그녀가 교회가 제공한 돈으로 번듯한 식당에 다니면서 새로운 자전거를 아이들에게 사주는데 돈을 사용한 것이 드러났다. 그러자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팀 켈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를 통해 사람들을 설득했다.
에드워즈는 교회에서 재정을 지원받으면서 돈을 술 먹는데 사용하거나 규모 있게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도,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이유가 이웃을 돕는 의무를 포기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도 똑같은 상태에 빠진 인간을 찾아오셨다고 말한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재정 지원을 끊어버리면) 나머지 식구들은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부모가 무책임하게 행동한다 할지라도 자녀들을 감안해서 그 가정을 꾸준히 뒷받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팀 켈러, <정의란 무엇인가>, 120쪽).
리디머 교회가 지원했던 싱글맘도 아이들이 아빠 없이 자라면서 동네에서 친구들이 다 가지고 있는 자전거 하나 없는 것이 마음이 아파서, 사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해주면 정상적인 가정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리더미 교회는 재정 지원 이상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실재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또 “나누고 자시고 할 여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자기네 식구들 먹고 살기도 빠듯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는 이렇게 대답한다.
“누굴 도울 힘이 없다는 말은 내 삶의 한 귀퉁이를 잘라내는 부담을 지면서까지 누군가를 도와줄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상대방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하신 것처럼 은혜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내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에서 그 이웃의 몫을 나누는 것이다(팀 켈러, <정의란 무엇인가>, 117쪽).”
4. 정의 사역의 실천
가정, 교회, 지역… 가까운 곳부터
혈연에 의무 못하면 이율배반 행위
교회 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도
후원금 넘어 자립과 사회 개혁까지
팀 켈러는 정의 사역을 시작하려면 먼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라고 권면한다. 교회가 정의 사역을 시작하려면 먼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 가정과 교회와 지역 공동체로 관심의 원을 넓혀가야 한다. 직계 가족을 포함한 근친 중 장애인·노인이나 만성질환 환자가 있다면, 그들을 돌보는 사역부터 시작하면 된다. 지역사회를 섬기면서도 혈연에게조차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이율배반적 행위가 될 것이다.
다음은 교회이다. 먼저 교회 안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조사해 다각도로 섬겨야 한다. 때로 교회에서 기금을 조성해 전달하거나, 비공식 통로로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
또 이웃이나 공동체를 섬겨야 한다. 슬픔, 상실, 이혼, 질병, 장애, 개인 문제 등으로 힘들어 하는 이웃을 찾고, 이주민 가정이 눈에 보이거나 노숙을 하는 사람들을 섬길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도록 노력하면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관심의 원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정의 사역의 첫 번째 실천은 바로 ‘지금 있는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팀 켈러는 정의 사역이 단순히 긴급한 필요를 채우는 데만 급급해선 안 되고, 장기적 사역 계획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 지역의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면 단순 후원금 이상이 필요하다.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위협적인 사회 체제를 바꿀 수 있는 정치인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팀 켈러는 이런 장기적 계획에 대해 세 단계로 나누어서 소개한다.
1) 원조(Relief)
원조란 신체적·물질적·경제적으로 시급한 필요를 직접 채워주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응급처치를 해주고, 회복 기간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하는 원조를 한다.
노숙자에게 임시로 숙소를 마련해 준다든지, 궁핍한 이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나눠 준다든지, 최소 비용을 받거나 무료로 병을 고쳐주고 상담해 주는 식의 서비스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조 사역이다. 좀 더 적극적 형태로는 법률, 주거, 다양한 형태의 가정폭력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2) 개발(Development)
개발은 개인이나 가족 또는 공동체 전체에 적절한 자원을 제공하여 원조에 의존하는 데서 벗어나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일을 가리킨다.
구약 성경을 보면 종의 부채를 면제하고 해방시킬 때 새로운 삶을 꾸릴 수 있도록 경제적 자원들을 넉넉히 제공하라고 주인들에게 명령했다. 여기에는 식량과 생업에 소요되는 각종 도구들이 모두 포함된다.
구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하나님의 법은 공동체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립할 기회를 보장해 준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기회라면 재정적 자원이 먼저 떠오를지 모르지만, 교육이나 법률 지원, 일자리 창출 따위도 여기에 속한다. 이런 요소들은 쓰고 남은 걸 넘겨 주거나 선심 쓰듯 베푸는 차원을 넘어 권리의 문제이다”라고 말한다.
개발은 단순히 지원을 받는 데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자립할 수 있는 교육과 일자리 창출 등이 포함된다. 물론 ‘개발’은 ‘원조’보다 시간이 훨씬 더 많이 소모되고 복잡하며 비용 부담이 크다. 교회는 단순히 구제의 차원을 넘어 사람들의 자립을 위한 개발 단계를 고민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이 주셨던 율법은 단순히 개인의 구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회복이었다(팀 켈러, <정의란 무엇인가>, 171-173쪽).
개인을 위한 개발에는 교육, 직장 창출, 훈련 등이 있다. 이웃이나 지역에 대한 개발은 주택 개발, 주택 소유 그리고 여러 자본 투자 등 사회 재정적 자본을 사회 시스템에 투입하는 것을 의미한다(팀 켈러, <센터처치>, 683쪽).
3) 개혁(Reform)
개혁은 즉각적 필요를 채우는 구제와 의존성 문제를 해결하는 개발의 차원을 넘어, 의존성 문제를 만들거나 약화하는 사회적 조건과 구조를 변화시키는 노력이다.
여리고 가는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왔던 사마리아인이 여리고를 갈 때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일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여리고 가는 길에 강도가 출현하지 않도록 방범을 강화하고 가로등을 설치하는 등 다양한 구조적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사고를 막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결국 사회 개혁 문제까지 나아가게 한다.
욥은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욥 29:17)”고 말하고, 모세는 부자와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는 법률 체계에 반대했다(레 19:15). 또 사람들의 근소한 수입을 쥐어짜는 대금업 시스템에 대해서도 반대를 표명했다(출 22:25-27).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참여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사회 시스템을 직접 바꾸는 일에 헌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회를 변화한다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도 적지 않다.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변하다 보면, 언젠가는 사회 전체가 변화될 것이라는 생각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개인적으로 사회 활동을 하는데 집중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조적인 죄를 교회가 외면한 채 구제 활동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참여하는 중요한 목표임에 동의 하더라도, 여전히 어떻게 제도적 교회가 참여할 것인지는 고민이 필요한 영역이다(팀 켈러, <센터처치>, 68쪽).
그렇다면 한 교회의 영향력이 크지 않는 현실에서는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먼저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구제하는 일이다. 개발 단계에 어느 정도 참여하고 헌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발 단계는 한 교회가 전부 맡아서 하기에는 힘든 일이기에, 지역 교회들의 연합이 필요하다.
한 교회가 만약 세 단계를 모두 감당해야 한다면, 가장 중요한 복음과 말씀 사역이 흔들릴 수 있다. 개발과 개혁 단계는 교회가 지역사회 단체들과 연관해 함께 일하는 것이 좋다. 교인들에게도 비영리 조직과 연합하여 개발과 개혁에 동참하여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쉽게 말해 영화 제작에 관여하는 교인들을 훈련하여 복음의 영향력이 담긴 작품을 만들게 할 수는 있지만, 교회가 스스로 영화를 찍는 회사를 설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일이라 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을 다 잘할 수 있는 기관이나 조직은 존재하지 않으며,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5. 구체적인 적용
교회, 사회 변화시킬 개인 양육
특정 사업 직접 뛰어들면 안 돼
제도적 교회는 복음으로 양육
유기적 교회는 기관들과 연합
아브라함 카이퍼는 ‘영역 주권’ 개념을 이야기했다. 지역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이들을 양육할 책임이 있다. 그럴 때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로서 세상과 구별된 방식으로 예술, 과학, 교육, 언론, 영화, 비즈니스를 이끌어 가는 그리스도인을 낳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교회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개인을 길러내지만, 지역 교회가 자체적으로 특정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아니다. 카이퍼는 그래서 제도적 교회와 유기적 교회를 구분했다.
제도적 교회가 교회 기관으로서 공동체 안팎의 식구들을 구제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바탕으로 복음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도들을 양육하는 기능을 감당한다면, 유기적 교회는 개발과 사회 개혁 활동을 위해 다양한 기관, 단체와 연합하여 활동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 사역은 극도의 정밀한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지역교회와 전 세계에 흩어진 일꾼들을 통해 말씀과 행동 양면에 걸쳐 움직여야 한다. 빈곤의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단순히 총과 칼로 세상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그 종류가 다르다. 복음으로 무장해야 하고 교회가 함께 교회와 지역사회를 도와야 하지만, 개혁의 차원에 눈을 뜨고 동참하여 활동해야 한다.
단지 구제에만 집중하는 교회가 있고, 또 복음을 제쳐두고 사회 개혁만을 부르짖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언제나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고, 하나님의 복음은 개인과 사회 구조 모두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이제 교회는 단순한 구제를 넘어 개발과 개혁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의무나 무거운 짐이 아니라, 복음 은혜의 자연스러운 확장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참된 미덕의 본질에서 하나님을 가장 아름다운 분으로 여길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은 좋은 평판을 얻으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 더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가난한 이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기쁨을 드리는 일이기에 기꺼이 나설 뿐이며,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흡족하게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팀 켈러, <정의란 무엇인가>, 170쪽).
이러한 자세는 구제를 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이나 결과에 좌절하지 않게 우리를 도와준다. 결국 교회가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떨쳐 버리고 정의로워지려면,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이 먼저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라는 이 땅의 번영으로 이어지게 한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을 많이 한다. 정말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일이 있으려면 반드시 정의 사역이 동반돼야 한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요약한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 4:32-35)”.
복음이 충만했던 초대교회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문장은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행 4:34)”라는 말이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는 이유는 모두 개인의 만족이 아닌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웃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주는 관대함과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정의 사역은 복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열매이다. 복음 안에서 이뤄지는 건강한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삶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여전히 남아 있는 빈곤의 문제는 가난이 아니라, 정의의 문제이다.
고상섭 목사
그사랑교회 담임
영남신대·합동신대 졸업
팀 켈러 연구가, CTC코리아 강사
<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