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칼럼] 전쟁과 평화론의 3가지 유형 (2)
계속되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아동과 여성, 민간인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습니다. 73년 전 이 땅에서도 무려 3년 간 참혹한 동족상잔의 6.25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전 대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돕고자 하는 우리 정부를 비판하면서 “신세 질 게 아무것도 없는 나라”라며 “왜 우리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말려 들어가야 하나”라는 망언을 했습니다. 6.25 때 목숨 걸고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고 도와준 국가들과 참전용사들을 모독하는 발언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이 문제는 초대교회부터 논의가 이어져 왔습니다. 정전협정 70주년을 앞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이상규 박사님의 ‘전쟁과 평화론의 3가지 유형’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폭력과 전쟁 거부, 자기 희생적?
타인에 가해지는 피해 해소 못해
나의 평화주의 때문에 더 큰 희생
평화주의 지키려다, 타인은 고통
1. 기독교평화주의(Christian Pacifism)
오리게네스
구약성경에 기록된 전쟁사를 풍유적(諷諭的)으로 해석해 전쟁이나 군복무를 반대하고 평화주의를 주창한 인물이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였다.
그는 가나안 정복 전쟁과 같은 기록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싸움으로 해석하고, 실제 발생한 전쟁 기록으로 보지 않는다. 이런 그의 입장은 구약의 다른 본문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이사야서 2장 4절 “그가 열방 사이를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는 본문에서 ‘칼’을 투쟁과 교만을 뜻하는 것으로, ‘보습’이나 ‘낫’은 겸손의 의미로 해석하여 이 본문을 물리적 전쟁과 관련시키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구약의 전쟁 기사를 영적 전쟁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했다. 그는 구약의 전쟁 기사가 영적 전쟁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면, 유대의 역사책들이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읽어야 할 책으로 전해졌으리라 보지 않는다고 했다. 이를 근거로 테르툴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전쟁이나 군복무를 반대하는 평화주의적 입장을 취한 것이다.
히폴리투스
군 복무와 살상을 반대하여 평화주의를 지향한 또 한 사람의 교부가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235)였다.
윤리적 엄격주의자였던 히폴리투스는 자신의 『사도전승』에서 매춘업자, 매춘부, 마술사, 점성가, 연극배우, 곡예사나 검투사, 우상 제조업자 등 특정 직업에 종사하거나 그 행위를 하는 자는 교회 회원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기독교인이 우상을 소지하거나 부도덕한 일을 지속하는 것도 부당한 일로 간주했다.
살인을 대죄(大罪)로 간주하는 그가 검투 경기의 참가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당시 검투 경기가 인명 살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히폴리투스가 문제시한 세 가지 죄인 간음, 살인, 배교 중 살인은 직접적으로 군 복무와도 관련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군복무도 엄격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그는 『사도전승』 3개 항에서 “하위 계급의 군인은 사람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명령을 받는다면 그 명령을 수행해서도 안 되며, 서약을 해서도 안 된다. 만약 이 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교회 회원권을 박탈한다. 무력을 가진 자나 고위층의 관복인 자줏빛 옷을 입는 위정자가 있다면 그 직에서 사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회원권을 박탈한다. 군인이 되기를 원하는 예비신자나 신자가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회원권을 박탈한다”고 썼다.
재세례파와 평화주의
재세례파 운동은 한 지역에서만 일어난 단일 개혁 운동이 아니라 스위스, 독일, 모라비아, 네덜란드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복수 운동(複數基源設, polygenesis)이었다.
이 중 토마스 뮌처와 츠비카우의 예언자들(the Prophets of Zwickau), 멜키오르파(The Melchiorites), 뮌스터의 재세례파(The Munster Anabaptists), 데이비스 요리스파(The Group of Davis Joris) 등은 폭력을 용인했던 반면 스위스 형제단, 모라비아 후터파, 그리고 메노나이트파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지향했다.
재세례파 그룹 중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로 시작된 메노나이트 교회는 일체의 물리력 행사나 폭력 그리고 전쟁을 반대하는 절대평화주의를 지향했는데, 이것은 4세기 이전 교회가 지향해 온 평화주의의 회복이라 볼 수 있다. 1530년대 있었던 폭력적 재세례파 운동, 곧 조지 윌리엄스가 ‘혁명적 재세례파(Revolutionary Anabaptists)’라고 불렀던 멜키오르 호프만(Melchior Hoffmann, 1500-1543)과 그 후예들의 폭력과 난동에 대한 거부이기도 했다.
메노의 첫 저술은 뮌스터 사건 이후 1536년에 쓴 『레이든의 얀의 신성모독에 대항한 완전하고도 분명한 방법Een gantsch duydelyck ende klaer bewys… tegens… de blasphemie van Jan van Leyden』이라는 소책자였는데, 책을 집필하고 두 달이 지난 후 뮌스터파가 함락됐기 때문에 이 글은 굳이 출판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공개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책이 출판된 것은 거의 한 세기 지난 1627년이었다.
이 책에서 메노는 ‘검(劍) 철학 주창자들’의 비기독교적 성격을 비판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이름으로 검을 사용한 뮌스터파를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뮌스터의 종말론이 낳은 폭력적인 천년왕국(千年王國, Millennium) 운동의 불행한 결말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보다 철저한 평화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메노는 이전부터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평화주의적 가르침을 신봉하고 있었으나, 뮌스터 사건은 자신의 확신을 재확인하는 계기였다. 이런 평화 이념은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평화사상이 대두되기 3백 년 전의 일이었다.
정리하면, 재세례파 운동은 초기부터 제자도(弟子道, discipleship)를 중시했고, 평화주의는 복음의 핵심이자 총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imitatio Christi)’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범과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은 메노를 포함한 재세례파의 생활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토대였다.
메노는 철저한 비폭력 평화주의에서 재세례파 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 메노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모범은 비전(非戰)이나 반전(反戰)만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대립, 투쟁, 폭력, 무기 소지 등 인간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이별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 확신의 근거는 신약 성경이었고, 신약 성경은 교회보다 더 높은 권위를 지닌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메노는 루터처럼 로마가톨릭의 교회관에서 완전히 떠나 있었다.
평화주의 입장을 보여 주는 메노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1540년 네덜란드어로 출판된 『기독교 교리의 토대(Dat Fundament des Christelycken leers)』였다. 이 책은 신자들을 위한 일종의 교리적 지침서이며, 위정자들에게 헌정되거나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 초판(1536)과 비교된다.
메노가 국가 권력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교회와 국가를 구분했지만, 국가 권력이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통치자들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주장과 함께 기독교 교리의 토대는 칼의 도(道)가 아니라 십자가의 도라는 점을 주장했다.
이 책을 보면 메노는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영성과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9-1536)의 평화주의적 경건(pacifist piety)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뮌스터파의 폭력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단호하게 배격하면서 평화주의를 지향하고 있고, 평화주의적인 재세례파를 변호했다.
미국교회사학회(American Society of Church History, ASCH) 회장을 역임했던 헤롤드 벤더(Harold Bender, 1897-1962)는 재세례파가 세 가지 이상을 추구했다고 보았다. 첫째로 기독교의 본질은 제자도에 있다고 보아 제자도를 실천했다는 점, 둘째로 교회를 세상과 분리된 고난받는 공동체로 규정한 점, 셋째로 새로운 윤리로서 사랑과 무저항 사상을 제시한 점이다.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
초기 재세례파 지도자들과 메노 시몬스에 의해 강조된 비폭력 평화주의 사상은 재세례파의 첫 신앙고백서라고 불리는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The Schleitheim Confession of Faith, 1527)에서 강조되고 재확인되었다.
이 고백서에서는 3가지 질문을 하고 있다. 첫째, 기독교인들이 선한 사람을 보호하고 악한 자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칼을 사용할 수 있는가? 둘째, 세속적 문제들에 대한 논쟁과 다툼에 대해 기독교인이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셋째, 기독교인이 정부의 관리로 선출되면 그 일을 감당해야 하는가?
이 세 질문에 대해 각각 ‘아니다’라고 답하고 있고, 그 근거로 예수님의 모범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은 철과 동으로 무장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 곧 진리, 의, 평화, 믿음,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정신은 재세례파의 다른 논자들에 의해서도 강조되었다. 예컨대 훈련된 신학자이기도 했던 독일인 후프마이어(Balthasar Hubmaier, 1480-1528)는 1527년 6월 24일 『검에 관하여(Von dem Schwert)』를 출판한 바 있다. 제7항에 대해 약간 견해를 달리하는 것을 제외하면, 말할 것도 없이 슐라이트하임 고백서의 계승이었다.
후프마이어는 이 책을 출판하고 한 달이 지난 후 오스트리아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고, 1528년 3월 10일 비엔나에서 화형을 당했다. 이 같은 비폭력 평화주의의 이상은 그 이후 재세례파 전통에서 거듭 강조되었고, 이로써 많은 재세례파들이 비난과 박해를 받고 순교하는 길을 걸어갔다.
문제점
전쟁 이기기보다 불의한 세력에 당해야?
무죄한 이웃 보호 위해 싸워야 할 경우도
수없이 반복된 질문이지만, 여전한 숙제
평화주의는 성경 교훈에 가장 근접한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전쟁에 참여하기보다, 전쟁의 피해자가 되더라도 전쟁을 거부하는 것은 고상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불의한 해를 받지 않기 위해 항거하기보다, 오히려 불의를 당하고 참는 것이 옳다. 소송과 관련하여, 바울은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 6:7)?”라고 가르쳤다.
예수님도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 5:39)”라고 가르치셨다.
이런 말씀에서 보면 불의한 세력에 당하는 것이 전쟁에 이기는 것보다 모든 이들에게 유리할 수 있다. 전쟁의 해악이 초래할 수 있는 파괴와 인명 살상 등 해악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점에서 폭력과 전쟁을 거부하는 평화주의는 자기 희생적 성격이 있다.
그런데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은, 기독교적 가치를 지키려는 자기희생적 노력은 타인에게 가해지는 피해를 해소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전쟁 피해가 나 자신에게만 국한된다면 기꺼이 평화주의를 선택할 수 있지만, 나의 평화주의가 나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경감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죄한 이웃을 위해 싸워야 할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희생당할 아무런 이유나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평화주의 확신 때문에 더 큰 희생을 당할 수 있는데, 나에게는 그런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점이다. 손봉호는 이를 타자 중심의 윤리라고 불렀다(손봉호, 『약자중심의 윤리』 (세창출판사, 2015), 120쪽 이하).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전투에 참가해야 할 상황이고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개인적 확신(평화주의) 때문에 집총을 거부하면 우리 쪽 전투력은 그만큼 약해질 것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패전하면 나뿐 아니라 다른 이웃이나 동료나 공동체도 고통을 당하게 된다.
6.25 때 평화주의자가 많아서 전쟁 참여를 기피하였다면, 다른 모든 한국인들이 지금 북한 주민들이 당하는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다. 이런 현실적 문제가 평화주의 원칙을 매우 난처하게 하는 질문이고, 켈수스의 비난도 이런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나는 평화주의자가 될 수 있으나, 나의 확신 때문에 평화주의자 아닌 이웃이나 동료 집단이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된다. 수없이 반복된 질문이지만, 여전히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결국 평화주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선 타인의 고통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그 타인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나의 신념을 지킬 것인가는 오늘 우리의 난제가 되고 있다.
이상규 박사
고신대학교 명예교수
백석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