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홍 칼럼] 이승만과 기독교 (1)
최근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과 기독교’라는 주제로 열린 제26회 샬롬나비 학술대회에서 김철홍 교수님(장신대)이 발표하신 ‘우남 이승만의 기독교 개종과 기독교가 그의 정치사상에 준 영향’을 허락을 얻어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우남 이승만의 기독교 개종과 기독교가 그의 정치사상에 준 영향 (1)
이승만, 단순히 신앙인 정치가 아닌
기독 신앙 위에 정치사상 뿌리내려
독립운동과 국가운영 통해 기독교
정신 고취하려던 기독 정치 사상가
1. 서론
1945년 11월 28일 조선기독교남부대회 주최로 ‘임시정부 요인 환영대회’가 열렸을 때, 우남(雩南) 이승만은 “만세반석 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이 나라를 세우자”고 말했다.
기독교를 기초로 하는 국가건설은 해방 이후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떠오른 생각이 아니었다. 우남은 1899년 기독교로 개종한 이래 줄곧 독립 이후 등장할 신생 국가는 기독교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런 점에서 우남은 단순히 기독교를 믿는 정치사상가,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그는 단순히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happen-to-be-a-Christian) 대통령이 아니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란 토양 위에 자신의 정치사상을 뿌리내리고, 독립운동과 국가운영을 통해 기독교 정신을 고취하려고 노력했던 기독교 정치사상가, 기독교 정치가였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기독교가 국가 건설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믿게 만들었을까? 그의 마음속에 있던 기독교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종교였을까?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그에게 준 영향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우남이 한성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할 때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또한 그 이후 그가 기독교 복음의 어떤 측면을 그의 정치사상에 적용하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교·유교 전통서 자라 성장한 뒤
기독교 기초 국가 설립하려 한 것,
근대사 속 기독교 영향력 상징해
우남, 과거 폐지 후 한학 그만두고
영어 배우기 위해 배재학당 입학
2. 이승만의 종교적 배경과 기독교와의 첫 접촉
훗날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우남은 “유가에서 태어난 나는 … 유교만큼 훌륭한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또 나를 생일 때마다 서울 근처에 있는 큰 절인 ‘되무가이’[되무개?]에 보내어 장수다복을 빌도록 하곤 하였었다”고 말한다.
불교국가(고려)와 유교국가(조선)의 전통을 이어받은 어린 우남이 성장하여 기독교에 기초한 국가를 세우려 한 것은 한국 근대사에서 기독교가 짧은 시기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주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875년생인 우남은 1887년 나이 열세 살이 되던 해 과거에 응시하기 시작했다. 1945년 귀국 이후 제헌의회 의장 시절 상도동의 지덕사를 방문했을 때 동행했던 이유선(李維善)에게, 그는 “나는 과거 보러 다닐 적에 급제하면 성삼문 같은 충신이 되는 게 소원이었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릴 적 그는 유학자로서 조선의 충신이 되기 원했다. 그러나 1894년 갑오경장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더 이상 한학(漢學)에 뜻을 두지 않고, 1895년 초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년)가 운영하던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우남은 모친에게 배재학당에 입학할 계획을 미리 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천하에 몹쓸 교리’를 가르치는 학당에 가는 것을 허락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재학당 예배에서 아펜젤러의 설교를 들을 뒤 우남은 자신의 느낌을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상하고 또 마음속에 깊이 느껴진 것은 1천 9백여년 전에 죽었다는 사람이 나의 영혼을 구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혼자서 생각했다. ‘아니, 그래 저렇게 놀라운 일들을 한다는 사람들이 정말 그런 바보 같은 교리를 믿는단 말인가? … 위대한 부처님을 알고 공자의 지혜를 아는 유식한 학자야 어디 저런 교리를 믿을 수가 있겠나….”
배재학당에서 우남은 예배에 참석하여 아펜젤러의 설교를 들었지만, 그에게 어떤 감화도 주지 못했다. 아펜젤러의 설교에 대해 그는 『비망록(Rough Sketch)』에서 “물론 나는 주의 깊게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들은 것이 있었다면 비판하기 위해서거나 반박하기 위해서였다”고 적었다.
선교 활동, 약소국 침략 일환 인식
2년간 공부하며 기독교 평가 변화
1896년 서재필에 ‘민주주의’ 들어
개종은 입학 4년 후 1899년 일어나
설교를 들으면서 그는 어떤 것을 비판하고 반박하려 했을까? 훗날 우남이 영문으로 작성한 ‘투옥경위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그리고 우리는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오기 조금 전에 미국 정부가 이 섬들[하와이]을 모두 병합하여 영토의 일부로 만들었으며, 이 과정에서 하와이인들의 여황이 폐위되었음을 알았다. 따라서 우리 한국인은 당연히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똑같은 운명이 계획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미국인들이 일본과 중국 그리고 한국으로 하여금 문호를 개방하고 통상을 하도록 강요한 다음 선교사들이 왔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선교사들이 장래의 병합을 준비하기 위해 미국정부가 파견한 앞잡이들(agents)이라고 간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배재학당에 입학할 무렵 우남은 미국 선교사들의 활동을 강대국의 약소국 침략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구한말 개화기 개화파의 입장보다 조금 더 수구적인 입장에서 서양 선교사를 바라보고 있었던 셈이다.
당시 그의 태도는 반기독교적(anti-Christian)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배재학당에서 2년간 공부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그의 평가에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상은 점차 지워지고 긍정적 이미지로 대체된다. 그런 변화에 대해 우남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배재학당에 가기로 한 것은 영어를 배우려는 큰 야심 때문이었고, 그래서 나는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나는 영어보다 더 귀중한 것을 배웠는데, 그것은 정치적 자유이다. 한국의 대중이 무자비한 정치적 탄압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기독교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법에 의해 그들 통치자들의 독재로부터 보호돼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젊은이의 마음속에 어떠한 혁명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혼자서 우리도 그런 정치 이론을 채택할 수만 있다면 짓밟혀 사는 나의 동족에게 크나큰 축복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기독교를 침략국의 앞잡이로 보던 우남에게 이런 약간의 변화가 생겨난 것은 아마 1896년 서재필과의 만남 때문으로 보인다. 신흥우의 증언에 따르면 우남이 ‘민주주의’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서재필로부터라고 한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서재필은 청년 이승만이 서양의 정치제도와 사상에 대해 눈을 뜨게 하는 역할을 했다.
우남은 배재학당 학생들 모임인 ‘협성회’ 창립회원이었고, 협성회에서는 토론회를 주최했다. 토론 주제 중 ‘우리나라 종교를 예수교로 함이 가함’도 들어 있었다. 학생들이 임의로 편을 나누어 자신의 입장과 상관없이 토론했으므로 우남이 이 주제에 어떤 생각을 펼쳤을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이 시절 그가 기독교 국가론을 주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엄밀하게 말해 당시 우남이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라기보다, 기독교 국가들이 갖고 있는 근대적 제도와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우남은 협성회 활동을 거쳐,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곧이어 ‘만민공동회’에 활발히 관여한다. 잠시 중추원 의관이라는 공직을 맡았지만, 1899년 의관직이 박탈되고 체포되던 25살 때까지 우남(雩南)이 기독교에 대해 지속적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왕성한 사회 정치적 활동은 그로 하여금 기독교에 관심을 가질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배재학당에서 접한 기독교와의 접촉은 그가 입학 초기에 갖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뜨리고 약간의 이미지 개선을 주었을 뿐, 그에게 별다른 심대한 종교적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판단된다. 우남이 성인이 되어 기독교를 처음 접한 것이 배재학당 입학 직후지만, 그의 개종은 그로부터 4년 후인 1899년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계속>
김철홍 교수(장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