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칼럼] 전쟁과 평화론의 3가지 유형 (4)
시민 생명 구하고 평화 보존·방어
위한 전쟁, 최후의 수단 허용돼야
평화적 수단 강구 문제 해결 시도
군인도 공직, 전쟁 불가피성 인식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앞에서 지적했듯, 루터나 칼빈 등 주류의 개혁자들은 넓은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의 전통을 잇는 의로운 전쟁론 혹은 정당 전쟁론을 수용했다고 볼 수 있지만, 16세기적 상황에서 약간의 유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루터는 앞 시대의 정당 전쟁론을 수용하되, 근본적으로 국가 권력은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것으로 보아 권력 행사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루터는 왕이나 황제 같은 통치자가 신민을 보호하기 위한 직책을 실행할 때는 이에 복종해야 한다고 보았고, 악을 행하는 무리들을 벌하는 전쟁은 평화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보아 이를 정당한 전쟁으로 인식했다. 즉 시민의 생명을 구하고 평화를 보존하고 방어하기 위한 방어적 전쟁은 정당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전쟁을 개시하기 전 모든 평화적 수단을 강구해 문제 해결을 시도해야 하고, 전쟁은 최후의 수단(a last resort)으로 허용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평화적 수단을 강구한 후에 전쟁, 곧 필연의 전쟁(war of necessity)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점은 정당 전쟁론 전통에서 항상 강조되어 온 것이다. 전쟁의 범위는 악을 행한 자나 공격자에게로 제한돼야 한다고 본 것도 루터의 고유한 주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루터의 생각은 특히 『터키인들에 대항하는 전쟁에 관하여(Vom Krieg wider die Türken, 1529)』에 잘 드러나 있다. 이 글에서 루터는 군인의 직 자체를 하나님의 공직으로 보았고, 또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선제 공격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지만,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면 방어적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보았고 이럴 경우 전쟁은 정당성을 갖는 것으로 인식했다. 이런 점에서도 루터는 이전 시기의 정당전쟁론을 수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루터의 정당전쟁론은 루터파 신앙고백서인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에서도 나타나는데, 이 신앙고백서 16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경찰과 세속 정부에 관하여 우리는 이렇게 가르친다. 즉 세상에 있는 모든 정권과 조직을 갖춘 정부와 법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제정하신 선한 질서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공직을 맡거나 재판관으로 봉사하며, 제국의 법률이나 그 밖의 법을 따라 언도하거나, 무법자를 권세로 벌하며, 정당한 전쟁을 이끌며, 군인으로 복무하거나(to engage in just wars, to serve as soldiers) 소송을 하거나 사고팔고 서약하며 재산을 소유하며 혼인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공직을 맡고 정의로운 전쟁에 참여하며 군인으로 복무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쟁과 같은 무력 사용은 적법한 통치자에 의한 것이라야 한다는 점이었다.
세속 통치자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에 통치자의 법 집행을 인정하여 전쟁에 임할 수 있으나, 일반 시민들은 어떤 경우라도 임의로 무력이나 칼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입장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1524년부터 다음 해에 걸쳐 발생했던 농민전쟁 때 루터의 태도였다. 루터는 정당한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 자가 무력을 사용하여 반란을 일으킨 경우, 이를 진압하기 위한 무력 동원에 찬성했다.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루터는 폭력이나 전쟁을 맹목적으로 지지하지도 않았지만 평화주의자도 아니었다. 이 점은 두 가지 개혁 운동, 곧 광적인 열광주의나 낙관적인 평화주의를 반대하여 일생 동안 싸웠던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안드레아 칼슈타트(Andreas Karlstadt, 1486-1541), 츠비카우의 예언자들(Zwickau prophets), 그리고 토마스 뮌처와 같은 혁명주의적 영성운동도 반대했고, 세속 정부의 법과 검을 폐지하고자 했던 광적인 재세례파나 분리주의적인 집단들과도 거리를 두고자 했다.
‘두 왕국 교리(two kingdoms doctrine)’는 바로 이들 집단과의 구별을 위해 필요했다. 결국 루터는 정당전쟁론을 수용하되 국가 권력의 무력 사용을 정당한 권위 행사로 보아, 이를 용인했다고 할 수 있다.
◈종합과 정리, 그 이후의 발전
이상에서 암브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루터의 정당 전쟁론에 대해 소개했다. 정리하면 전쟁은 언제 어디서나 심각한 폭력과 파괴, 그리고 인명의 살상을 동반하기 때문에 전쟁이 없는 샬롬의 상태가 가장 좋은 현실이지만, 인류의 역사란 전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인류는 전쟁을 피할 수 없다.
이런 인식에서 출발한 정당 전쟁론에서 정당한 전쟁이 되기 위한 조건을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첫째는 ‘전쟁을 향한 정의(jus ad bellum)’, 곧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정의를 말한다. 둘째는 ‘전쟁에서의 정의(jus in bello)’, 곧 전쟁 수행 과정에서의 정의가 그것이다.
전자는 정의로운 전쟁의 조건이 무엇인가의 문제이고, 후자는 전쟁 수행 과정에서 그 전쟁이 정의롭기 위해서 지켜야 할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 정의로운 원인(causa iusta)
전쟁을 하는 이유가 공격당한 나라를 방어하는 것과 같이 심각한 악에 대한 정의여야 한다.
2. 국가의 권위자에 의한 전쟁(legitima potestas)
전쟁이 개인이나 사적인 특정 집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합법적인 권위자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포된 전쟁이어야 한다.
3. 정당한 의도(recta intentio)
전쟁의 의도가 다른 나라에 대한 복수나 약탈이나 파괴가 아니라 파괴된 정의와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4. 최후의 수단(ultima ratio)
전쟁은 다른 모든 수단으로 해결할 수 없는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5. 상대적 정의(relative iustitia)
전쟁 당사국은 적국보다 더 도덕적이어야 한다.
6. 승리 가능성(facultas victoriae)
전쟁은 이길 수 있는 상당한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만 시행되어야 한다. 또 전쟁의 결과가 고통과 악을 능가하는 선이 도출되어야 하고, 전쟁 수행 과정에서의 인적 물적 손실보다 더 큰 것이어야 한다.
또 ‘전쟁에서의 정의’, 곧 전쟁 수행 중 아래의 조건을 갖추어야 그 전쟁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1. 무력 사용의 제한
전쟁 수행에서 이기는 데 필요한 그 이상의 파과를 가져오게 하거나, 사회 간접 자본의 파괴나 잔인한 폭력, 보복, 약탈 등은 금지되어야 한다.
2. 비전투요원의 보호
전쟁 수행 과정에서 민간인이나 비전투요원은 피해가 가지 않도록 보호되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정당 전쟁론은 인간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고 행동할 능력이 있다는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본래 정당 전쟁론은 정당화될 수 있는 기준을 제정함으로써 무력의 사용을 최소화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했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을 허용하는 논리로 악용되거나 폭력 사용의 합리화를 추구하는 전거로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문제점
앞에서 제시된 정당 전쟁론이 말하는 전쟁 조건들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 나 대동소이한데, 몇 가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첫째,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합법적 권위’라는 문제도 단순하지 않다.
어떤 경우를 합법적인 권위라고 할 수 있는가? 히틀러도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았으므로 합법적 권위라고 할 수 있고, 6.25를 일으킨 김일성의 정권도 합법적인 권력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전쟁 후 상태가 전쟁의 원인이 되는 악을 충분히 보상할 때만 정당하다는 것도 이론적일 뿐, 정확하게 산정(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란 복잡하고 복합적 현상이기 때문에 어떤 예측이나 계산도 정확할 수 없다.
셋째, 전쟁을 일으키거나 전쟁에 참여하는 정당성으로 가장 빈번하게 이용되는 구실이 ‘방어적’이라는 것인데, 이런 구실은 거의 모든 전쟁이서 이용되어 왔다.
김일성도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예상되는 위협에 대한 방어적 전쟁이라고 주장했고, 1967년 이스라엘 비행기가 이집트 비행장을 폭격함으로써 시작된 ‘6일 전쟁’도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이 예상되는 공격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방어적 공격이라고 주장한다.
넷째, 키케로가 주장하는 정당 전쟁이론과 기독교권의 정당 전쟁론의 한 가지 차이는 키케로는 국가의 명예와 안전을 중시하고 있으나, 기독교권 지도자들은 이 점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키케로는 국가의 안전과 명예를 중시했으나, 기독교 지도자들은 국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외국과 전쟁이 발발하면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생각을 하지만, 기독교는 이런 형식의 국가관을 수용할 수 없다.
국가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 하나의 기구일 뿐, 그것은 신성하지도 않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애국심도 거대한 집단 이기주의일 수 있다.
민족이라는 개념의 민족주의도 역사 언어 문화 관습을 공유하는 종족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적 이데올로기이지, 그것이 윤리적이거나 절대적 가치일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국가의 이익이나 명예 확보가 전쟁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국가가 불의한 전쟁을 수행하고자 할 때, 그리스도인들과 양심적인 시민들은 전쟁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일본이 대동아 전쟁을 수행할 때 이를 비판했던 야나이하라 타다오(失內原 忠雄)가 이런 경우였다.
이상규 박사
고신대학교 명예교수
백석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