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이처럼, 종교개혁의 길 예비했던 롤라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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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이단자들 25] 롤라드 신앙운동 (4)

15세기 많은 롤라드인들 순교
헨리 4세, 즉위 후 가혹한 탄압
박해 가중되자 점점 줄어들어
1559년 이르러서 처벌법 폐지

▲영국 런던 템스강 남쪽 램버스에 있는 궁전(Lambeth Palace)에 있었다는 롤라드인들의 감옥. ⓒ위키

▲영국 런던 템스강 남쪽 램버스에 있는 궁전(Lambeth Palace)에 있었다는 롤라드인들의 감옥. ⓒ위키

5. 탄압과 수난

교회가 위클리프의 사상을 추종하는 이단 무리들을 탄압하는 과정에는 굴곡이 심했다. 종교재판소는 1401년까지 첫 세대 롤라드인들을 엄중하게 재판했다. 위클리프의 교훈이 옳다고 생각한 첫 세대 롤라드인들 가운데는 공포정치가 두려워 지지를 철회한 자들도 있다.

교회의 이단자 재판은 호전적이고 강경했다. 교회는 반체제 성직자가 설교를 할 경우 단호하게 화형 또는 참수형으로 처벌하겠다고 공표했다. 옥스퍼드 교수 필립 레펑던은 위클리프의 성찬론을 대담하게 지지하다, 1382년 철회했다.

철회 덕분에 나중에 옥스퍼드대학교 총장, 링컨의 감독, 추기경직을 맡을 수 있었다. 철회를 한 비굴함을 인정하고 다시 롤라드인이 된 사람도 있었다.

거칠고 사납던 이단 탄압의 기세가 한풀 꺾이자, 롤라드인들의 반체제성직주의, 반교황주의, 성경제일주의 사상이 점차 영국 안에 확산됐다. 1390년 경부터 1425년까지 롤라드인들 연대기 저자들은 길 가는 사람들 두 명 가운데 한 사람은 틀림없이 롤라드인들이라고 했다.

박해는 계속됐다. 15세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롤라드인들이 순교했다. 국왕 캥커스터의 헨리 4세(재위 1399-1413)는 즉위와 더불어 롤라드인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그 무렵, 롤라드인들에 대한 법적 규제(1401)는 절정에 달했다. 영국 의회는 자국 역사상 최초의 이단 화형 법안을 통과시켰다.

롤라드인들이 교회의 성례를 가증스럽게 여기고, 하나님과 교회의 법을 무시한 채 스스로 설교자의 직분을 사칭한다고 보았다. 그들의 설교, 학교운영, 집회, 서적 간행을 금지했다. 범법 혐의자들은 감독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교회는 유죄가 확인된 이단자들이 이단 교리 철회를 거절하면, 세속 관리에게 넘겨 화형에 처하게 했다. 처형 방식은 대중이 공포감을 가질 수 있는 행태였다.

교회는 이단을 무자비하게 징치했다. 강한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1410년대에 화형을 당한 자들이 많았다. 재단사 존 배드비는 결박당한 채 통 속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런던 상인 리처드 터밍과 스미스필드의 존 클레이던은 순교했다(1415).

사제 윌리엄 테일러가 스미스필드에서(1423), 윌리엄 화이트가 다른 곳에서(1428) 순교했다. 런던 시민 리처드 호브든과 사제 토머스 배글리가 순교했다(1430). 얀 후스와 서신 교환을 한 적이 있는 리처드 위치가 순교했다(1440).

옥스퍼드의 세인트 에드먼드 칼리지의 학장 피터 페인은 이단자 처벌을 피하려고 영국을 탈출했다(1417). 나중에 후스파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노리치 지역에 살던 100명의 롤라드인들이 이단 혐의로 기소되었다(1424-1430).

링컨 감독 리처드 플레밍은 롤라드인들에 대항할 목적으로 옥스퍼드에 링컨 칼리지를 설립했다. 나중에 감리교회 설립자 존 웨슬리가 이 대학에서 공부했다.

영국 귀족 신분으로 롤라드인들을 환영한 사람도 있었다. 존 올드캐슬 경은 새로운 설교자들에게 켄트 지역 자기 영지에서 설교하도록 권했다. 그는 로마 교회의 미신적 미사, 비밀고백―고백성사, 화상 숭배를 비판했다.

법정이 여러 차례 소환을 해도 불응했다. 교회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실행을 세속 관리에게 넘겼다. 올드캐슬은 런던탑에 수감되었다가 탈출해 4년 동안 은신했다.

그는 롤라드인들 2만 명이 국왕에게 항거하여 봉기를 일으킨 자들과 연루되어 고소를 당하자 웨일즈로 도피했다(1414). 3년 뒤 체포돼 런던에서 반역자, 이단자라는 죄명으로 정죄당하고 교수형과 화형 처벌을 동시에 받았다.

상당수 롤라드인들은 박해를 피해 스코틀랜드로 이주했다. 새 정착지에서 붙잡힌 자들은 퍼스와 글래스고에서 화형을 당해 순교자 반열에 올랐다. 세인트앤드류대학교에서 유학하던 보헤미아 학생 파울 크라우는 이단자로 정죄돼 처형을 당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감독들에게 이단자들과 이단 무리인 롤라드인들을 색출하라고 지시했다. 세인트앤드류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전원이 롤라드파에 대항해 로마 교회를 방어하겠다고 맹세했다(1416).

박해가 가중되자 롤라드인들이 점점 줄어들었고, 농촌 지역에서만 명맥을 유지했다. 1466년에도 몇 사람이 처형당했다. 1507년에는 롤라드인 세 명이 화형당했다. 여성들 가운데 롤라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화형당한 자들이 있었다. 1559년에야 롤라드인 처벌법은 폐지됐다.

롤라드인들, 위클리프의 메시지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확산시켜
보헤미아 건너가 얀 후스에 영향
복음전도 활동 없던 점은 아쉬워
교회법보다 하나님의 법 우선해
성경, 전통보다 우위 확신 심어

▲롤라드인들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존 올드캐슬 경(Sir John Oldcastle)이 체포돼 화형당하는 모습을 그린 판화. ⓒ위키

▲롤라드인들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존 올드캐슬 경(Sir John Oldcastle)이 체포돼 화형당하는 모습을 그린 판화. ⓒ위키

맺음말: 반딧불이

롤라드인들은 위클리프의 메시지를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확산시켰다. 보헤미아에 건너가 얀 후스를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켰다.

평신도들 중심의 이 신앙운동은 유럽인들에게 성경의 높은 권위를 자각하게 하고, 교회가 지닌 여러 모순과 성경적 근거 없는 불합리한 요소들을 비평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게 했다.

위클리프의 학문적 역량은 15세기 유럽인들의 신학적 지평 확대에 이바지했다. 위클리프와 롤라드인들과 보헤미아의 후스와 독일 루터의 비전은 동일하다. 군주의 교회개혁 의무, 성경에 부합하는 일상적 삶의 중요성, 성경의 높은 권위 강조, 성직자의 권력남용에 대한 저항, 화체설 거부 등 여러 면에서 일치한다.

루터의 업적은 그가 받은 인문교육 결과다. 위클리프주의와 그의 신학사상은 콘스탄츠공의회(1415)의 위클리프 정죄 이후 공식 학계에서는 학문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위클리프와 롤라드인들의 사상이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에 정확히 어느 정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까?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롤라드인들은 보헤미아의 교회개혁자 얀 후스를 성원했다. 영국 롤라드 신앙운동 지도자 리처드 위치의 지지 편지에 후스는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왕, 여왕, 귀족들 그리고 대중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고 있습니다. 보헤미아의 그리스도 교회는 영국의 그리스도 교회에 안부를 묻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거룩한 믿음을 고백하기를 매우 원합니다.”

이는 후스가 보헤미아의 국왕과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보헤미아의 얀 후스와 관련되어 있다. 후스는 위클리프 사상을 하나의 영감(靈感)으로 받아들였다. 루터는 후스의 <교회론>을 읽으면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우리 모두가 후스파다”라고 소리쳤다. 위클리프와 롤라드 신앙운동이 보헤미아의 후스와 독일의 루터가 주도한 교회개혁운동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롤라드인들은 기독교의 중심 진리를 강조하는 복음전도 활동은 하지 않았다. 왈도파 전도자들과 달리 복음전도에 대한 관심은 적었다. 그들은 교회개혁 필요성을 외치고,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관습 개선을 촉구하는데 몰두했다.

미신적인 미사, 성지순례, 화상숭배, 비밀고해를 규탄했다. 성경을 자국어로 읽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다. 연옥을 부정하기도 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눅 7:50)”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구원의 근거를 믿음에 두는 사람도 있었다.

롤라드인들은 성례가 구원을 얻는데 필수적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롤라드 신앙운동은 중세 후기라는 시대적 한계 안에서 진행되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교회 개혁이었다.

이 점을 고려하더라도 롤라드인들이 구원진리 중심의 복음전도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신칭의’ 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를 명료하게 전파하는 활동에 열성을 다했더라면,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이 받은 영예를 그들이 차지했을 수 있다.

롤라드인들은 ‘교회법’보다 ‘하나님의 법’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이 교회 전통보다 우위에 있다는 확신을 영국인들에게 심어주어, 다가오는 영국교회의 개혁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이바지했다.

반딧불이의 반짝임처럼 당대에는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였고, 이단으로 정죄되어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교회개혁운동의 길을 예비했다. 종교적 사상적 정치적 격변을 맞이할 준비운동, 예비훈련을 시켰다.

▲최덕성 박사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최덕성 박사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최덕성 지음, <위대한이단자들: 종교개혁500주년에 만나다>(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15), 제7장 2부

최덕성 박사 (브니엘신학교 총장,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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