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우 칼럼] 김명주 교수의 반론을 반기며
※본 기고는 월드뷰 2023년 8월호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들어가며
필자는 <대전인권신문> 2023년 4월호에 ‘성별에 따른 역할 인식은 인간의 천부적 본능에 의한 것이므로 이를 차별과 혐오로 규정하는 것은 자연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최근 국가 기관이 소수집단의 이익을 위해 법적 강제력을 동원하여 다수의 자연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요지의 기고문을 게재하였다(https://www.djhr.or.kr/app/board/view?md_id=open_source&code=2114&page=2). 필자의 이 글에 대하여 충남대학교 김명주 교수는 2023년 5월 27일자 <오마이뉴스>에 반론을 제기하였다(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31135&CMPT_CD=TAG_PC).
이를 알게 된 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진리에 관한 토론을 즐기는 나의 개인적 성향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고의든 무지이든 인권의 권위를 오남용하는 사람들을 공론의 자리로 이끌었다는 점이 더 큰 이유였다.
사실 진즉 했어야 하는 토론이었다. 최근 일부 사람들이 인권이라는 개념의 무게감을 악용하여, 선량한 윤리 의식을 가지고 살아온 다수를 입막음하는 것은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오랜 시간 인류가 믿어왔던 윤리 규범을 바꾸려는 혁명적 시도를 하면서도 진지한 토론 과정이 거의 없었다는 점은 자유민주주의자인 나를 분노케 하였다.
그간 다수의 선량한 시민이 잠잠했던 것은, 최근 급속도로 진행된 도덕 혁명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일부 학자들의 지적 권위와 국가인권위원회의 준사법적 권위에 눌려 숨쉬기조차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그들 대부분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처럼 “그래도 동성애는 인권이 아니다”며 볼멘소리를 내고 있을 것이다.
학자인 필자는 그들의 이론이 갖는 논리적 문제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학문의 자유를 존중하여 그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권 개념 혼동이 더이상 순수 학문 영역에 머무르는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되면서, 좌시할 수 없게 됐다.
인권위 한 공무원에게 정치적 중립을 지킬 것을 요구하자, 그는 인권이 어떻게 정치의 문제냐며 발끈했다. 순수하게 관념을 논하는 학문 세계에서는 인권이 정치의 문제가 아니지만, 그 내용이 법제화돼 강제로 집행되는 순간 지극히 정치적 문제가 된다. 추상적 이념과 구체적 법 조항의 본질적 차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인권위 공무원으로 일하는 것이 나라의 비극이고, 그 차이를 잘 아는 학자들이 권력에 영합하는 것이 그 비극의 원인이다.
학자인 필자에게 이 사안은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문제다. 인류가 쌓아온 지성의 세계를 자유롭게 탐험할 특권이 필자에게 주어진 것은,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온갖 비민주적 악법이 제정되고 그 여파로 발생한 엽기적인 사회 병리 현상들이 신문지상에 보도될 때까지만 해도 필자는 감정을 억제하고 자중했다. 학자적 진중함이라는 규범 때문이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해가 진 후 날아오른다고 하지 않던가.
이런 필자를 대중 앞에 세운 것은 지난 2022년 교육과정 개정시안을 발표한 공청회였다. 인권을 빙자해 건전한 규범을 가진 국민의 입을 틀어막은 채, 뒤에서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공교육기관을 장악해 어린 학생들에게 지극히 편향적인 이념을 몰래 주입해 왔기 때문이다. 이는 마오쩌둥이 총칼을 동원하여 저지른 문화혁명의 만행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학자는 연구에나 전념하라는 둥, 세상 물정 모르는 이야기를 나에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자유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학자의 사회적 책임과 정치 행위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 필자가 침묵한다면, 치열한 경쟁과 노동을 마다하지 않으면서까지 조용히 책을 읽고 사색할 특권을 나에게 부여한 국민에 대한 도덕적 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숭배 사상?
김명주 교수는 단일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된 나의 짧은 글을 매우 다양한 ‘거대담론’을 논거로 비판했다. 그것이 문제라 할 수는 없다. 자신의 논변보다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에‘만’ 초점을 둔 글은 대개 그 범위가 넓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수미상관’의 논리적 일관성이 부족한 것만큼은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김명주 교수는 자신의 논거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기 바란다. 필자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인권에서 시작한 논의가 다수의 거대담론으로 확장되면, 독자들은 길을 잃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김명주 교수가 판을 잔뜩 키운 상황에서 필자까지 김명주 교수의 모든 논점에 대하여 일일이 대응한다면, 인권이라는 주제는 온데간데없어질 것이다. 그래도 아예 대응을 하지 않으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가장 간단한 한 가지만 묻는다.
“…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연적 인권이 있다는 말은 여전히 지구의 역사를 인간중심적, 아전인수로 파악하는 명백한 오류다(김명주 교수의 본문 중에서).”
인권(인간의 권리)을 절대시하는 김명주 교수의 입장과 위 주장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조화될 수 있는가? 인권의 ‘人’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김명주 교수가 필자의 이 간단한 질문에 어떤 기상천외한 논리로 대답할 것인지 기대하게 될 것이다.
토론 원칙에 관한 제언
필자는 결론이 날 때까지 김명주 교수와 대면 혹은 지면상으로 토론하기를 원한다. 다만,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생산적 토론을 위해, 향후 토론을 위한 원칙으로 아래 두 가지를 제시한다.
1. 학자를 인용할 때는 주장만 전하지 말고, 논거를 함께 제시해주기를 바란다.
학자는 겸허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 겸허함은 결코 우유부단함이 아니다. 다만 진리에 굴복하는 것이며, 나 자신의 한계에 굴복하는 것이다. 필자는 박사과정 첫 학기부터 최고 권위 학술지에 게재된 최신 논문들을 읽고 비판하는 훈련을 받았다. 절망에 가까운 그 막막함 속에서, 필자는 전문 분야의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배웠다. 그 어떤 학자도 한계가 분명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선대 학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라는 말을 아는가? 위대한 천재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이 한 말이다. 구글 스칼라 검색창 밑에 한동안 새겨져 있던 말이기도 하다.
인류 과학사에 큰 획을 긋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뉴턴은 선대의 학자들을 ‘거인’이라 칭했다. 뉴턴이 가졌던 존경심의 근원은 그가 발견한 진리의 압도적 위대함에 있었다. 좌파 성향 학자들이 경멸하는 절대 진리의 위대함에 압도된 나머지, 그 일부나마 발견한 선대 학자들이 거인으로 보이는 것이다.
다윈과 니체가 선대 학자들이 쌓아놓은 업적을 조금이라도 존중했다면, 뚜렷한 증거도 없이 그들의 업적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소설 같은 글을 써재끼면서 신을 부정하는 용감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자극적인 선언을 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저작은 소설이다. 과학적 실증이 아닐뿐더러, 논증도 아니다.
그러니 김명주 교수는 “21세기 지식의 최전선에 있는 기라성같은 학자들”과 같은 표현은 자제해 주기 바란다. ‘21세기’를 강조하면 안 되는 이유는 최근 학문이라 해서 진리이고, 과거 학문이라 해서 허구인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고전의 중요성이 인문·사회과학에서 특히 강조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라. 심지어 실험 증거에 의해 끊임없이 반증되는 자연과학에서조차, 뉴턴의 고전물리학은 우리 주변에서 경험하는 거시 세계 물리 현상들을 설명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다.
김명주 교수가 말한 ‘우월감과 오만함’은 신에게서 온 자연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선대 학자들을 미개인 취급하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야 한다. 고대로 구분되는 로마 시대 의학이 어느 정도까지 발전했는지 혹시 아는가? 안과, 비뇨기과, 정형외과 등 상당히 세분화된 분과가 존재했다.
물론 의학 기술 자체로 보면 현대의학의 발달 정도에 비할 바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고대인의 의료지식이 축적되지 않았다면, 현재 암 치료 기술이 가능했겠는가? 학자의 권위는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전할 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학자 개인을 칭송하는 ‘기라성’ 같은 표현은, 그 학자가 한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 밝히고 그 근거가 타당한 것인지를 충분히 토론한 후 해도 늦지 않다.
혹시 너무 난해해서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변명하려거든, 아예 인용하지 말라. 본인이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은 모른다는 말과 같고, 모른다면 침묵해야 한다. 전문가라면 한 마디로도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한 시간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그렇게 배웠다.
김명주 교수가 밥을 먹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본인이 연구실에서 책을 읽는 동안 누군가 땀 흘려 농사를 지은 결과다. 김명주 교수가 감기에 걸렸을 때 타이레놀이라도 사 먹을 수 있는 것은, 약사가 약국에 주문해 놓았기 때문이다. 학문적 논리는 농부와 약사가 김명주 교수보다 모를 수 있지만, 농사와 약에 관해서만큼은 김명주 교수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분야에서 사회에 기여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는 것, 그것이 시장경제를 존중하는 보수주의 정신이고, 그것이 보수주의가 추구하는 공동체주의다. 한갓 부패한 개인 혹은 소수집단 따위가 완전한 평등을 이뤄줄 것이라는 허황된 기대에 의존하는 공동체주의와 차원이 다르다. 그것이 시장경제의 기저에 깔린 ‘자연’ 질서의 위대함, ‘보이지 않는 손’의 위대함이다.
그러니 김명주 교수는 약사와 농부가 한 것처럼 자신의 지식으로 이 사회에 기여하라. 지금은 김 교수가 전문성을 발휘해 자신이 예를 든 브뤼노 라투르, 도나 해러웨이, 캐런 버라드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한 마디’로 밝힐 때다. 세계인권선언 1조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인간이 이성과 양심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으므로, 필부라 할지라도 그들의 주장이 과연 타당한지 알게 될 것이다.
물론 김명주 교수가 저 ‘기라성’ 같은 학자들의 논리를 자세히 풀어 설명하더라도, 농부와 약사는 헛소리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런다 할지라도 그들이 지식과 소양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지는 말기 바란다. 농부 역시 자신이 생산한 쌀의 영양학적 가치를 몰라서 안 먹는 것이라 불평할 수 있고, 약사 역시 자신들이 주문해 놓은 감기약의 뛰어난 효과를 모른다고 불평할 수 있음을 기억하라. 적어도 농부와 약사는 법을 만들어 쌀이나 감기약을 강제로 먹이려는 황당한 시도 따위는 하지 않는다.
2. 혐오 프레이밍은 삼가기를 바란다.
학자라면 치열한 토론을 하다가도, 상대의 논리가 합리적이라 판단되는 순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지적 정직성(intellectual integrity)이라 한다. 정직해야 겸허할 수 있다. 이는 학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이다. 필자는 그렇게 배웠다.
개인적 상처에서 파생된 분노와 복수심으로 지적 활동을 할 때, 학자들은 지식을 사유화하여 자신의 권력으로 삼게 된다. 선대에 의해 발견된 진리라는 돌탑 위에 돌 하나를 올려놓는 심정으로 연구하지 않고, 연구업적이 이익의 재료와 분노의 결정체가 되는 순간, 자신의 논리에 대한 합리적 반론이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공격으로 인식된다. 지적 교만은 여기서 시작된다.
좌파 성향 학자들이 허구로 치부하는 ‘21세기 이전’ 학문의 저자들은 대개 초기 사상과 말기 사상의 결이 다르다. 그렇다 해서 그의 사상 전체가 허구가 되는가? 누가 뭐라 해도 필자는 그 학자의 지적 정직성을 칭찬할 것이다. 그들 역시 나에게는 ‘거인’이다. 그들이 거인인 이유는 그들이 초인이어서가 아니다. 그들이 발견한 진리의 위대함 때문이다. 그가 발견한 것이 진리의 아무리 작은 일부라 할지라도 말이다.
최근 인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진리에 직면하여 자신의 주장이 허구임을 알게 될 때 자주 사용하는 ‘치트키’는 혐오 프레이밍이다. 대개 이를 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논리적 주장이 왜 혐오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혐오하는 사람은 자신이 혐오하는지조차 모른다’는 용감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매우 비과학적인 주장이다.
혐오라는 개념이 내면의 감정 상태를 지칭하는 이상, 혐오인지 여부는 제3자보다 본인이 훨씬 더 정확하게 파악한다. 물론 인정하기 싫어 거짓말하는 것일 수는 있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은 것인지 정말 혐오가 아닌지도, 역시 제3자보다는 본인이 훨씬 더 잘 안다.
물론 표출된 행동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사조가 심리학계에서 한때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이를 행동주의(behaviorism)라 한다. 그렇지만 당시 심리학자들조차 행동 관찰을 통해 내면을 파악하려는 허황된 시도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동의 원인이 내면 감정 상태와 무관하다고 믿었다. 유명한 파블로프의 개 실험에서 ‘조건화’라는 현상을 관찰한 것이 그 논거가 된다.
심리학자들이 내면 상태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다. 이를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이라고 한다. 이는 설문 기법 발달과 연관이 깊다. 그러니 토론 도중 혐오 프레이밍 스킬을 시전하려거든, 먼저 상대방 내면의 감정 상태를 묻기 위해 설문이라도 한 후에나 하라.
물론 모든 설문 기법은 사회적 소망성 편향(social desirability bias)에 취약하지만, 그 편향 정도를 수치화하는 기법도 존재하니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하라.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혐오 프레이밍 스킬을 시전하는 것은 상대의 내면 상태를 임의로 규정하고 재단하는 것이므로, 성별 정체성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상대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임을 명심하라.
나가며
혹시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끝판왕을 거의 깼는데 컴퓨터가 먹통이 되어버리는 것 같은 서운함을 느껴봤는가? 필자는 최소한 우리의 글을 읽는 독자들만이라도 소기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소위 끝장 토론이라는 것을 하고 싶다.
필자는 김명주 교수의 주장을 ‘인권’이라는 주제와 연관하여 하나하나 논파할 것이다. 하지만 중간에 혐오 프레이밍 스킬을 시전할 계획이라면, 아예 시작도 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끝판왕을 깨는 짜릿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면, 그 게임을 시작하고 싶겠는가?
어쩌면 김명주 교수는 필자의 그런 심리를 잘 알고 이용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명심하라. 김명주 교수와 필자 단둘이 토론할 때는 우겨도 되지만, 독자와 청중들 앞에서 우기면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어버린다. 대전시민들도 초대하고 가능하면 기자도 부르면 좋을 것 같다. 과연 누가 벌거벗은 임금인지, 한번 확인해 보자.
이형우 (한남대학교 교수)
hwleetrojan@gmail.com
한양대학교 행정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미국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011년 한남대학교 행정학과에 부임하여 행정철학과 윤리, 공무원의 동기부여와 인사관리를 위한 심리학을 교육·연구하였다. SSCI(국제저명학술지)와 KCI(국내학술지)에 여러 편의 논문을 게재, 2019년 한남대학교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현재 교정넷(교육정상화를바라는전국네트워크) 운영위원, First Korea 시민연대 부대표 등을 맡아 교육 정상화와 악법개정 등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