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셋째 주일 ‘소강석 목사의 영혼 아포리즘’
“집어등 교회를 꿈꾸다”.
지난 주에는 제주도에서 저희 교회 전반기 교역자 정책수련회를 하였습니다. 제주도에 갈 때마다 밤이 되면 바다에 현란하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어두운 바다를 비추는 찬란한 불빛이죠.
그 빛은 오징어를 잡기 위한 ‘집어등’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엔 그 집어등이 얼마나 찬란하고 눈부시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징어로서는 가장 슬프고 비극적인 불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징어는 다른 물고기와는 다르게 시각이 발달해 있죠. 그 시각은 눈부시고 찬란한 불빛을 좋아합니다. 그 불빛을 보는 순간, 오징어는 사족을 못 씁니다. 사랑하는 어머니도 등 뒤로 하고, 죽고 못 사는 짝도 버려버린 채 불빛을 향하여 질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그만 어부가 쳐놓은 그물에 걸려버리고 맙니다.
오징어에게는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 되어 버리는 셈이지요. 만일 오징어에게 생각이 있다면, 아마 이렇게 후회할 것입니다. “아차 속았구나! 저 불빛의 유혹에 내가 걸려들었구나!” 그러나 가슴을 치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유하 시인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눈앞의 저 빛 / 찬란한 저 빛 /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 의심하라 모든 광명을”. 이 시적 의미는 오징어의 생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이 시뿐만 아니라 모든 시에서 은유의 본질이란 인간의 삶을 관찰하고 탐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는 문장과 문맥을 초월하여 인간의 삶의 차원으로 확산이 되죠. 그러므로 이 시는 인간에게도 가장 아름다운 것이 죽음이 될 수 있고,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유혹의 미끼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그러나 저는 집어등을 보며 이런 생각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사고의 대전환을 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집어등 교회가 될 수 없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징어를 유혹하는 집어등은 죽음의 미끼가 되지만, 교회가 집어등을 켜놓으면 죽을 영혼, 영원히 멸망할 영혼이 새 생명을 얻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혼탁하다 할지라도 우리 교회가 제대로 집어등을 켜고 비추기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을 영혼을 영원히 구원하고 수많은 영혼들을 거룩하게 납치할 수 있습니다. 산란한 집어등을 통해 교회는 거룩한 영혼의 포로수용소가 되고, 새 생명의 어장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신앙의 본질 회복과 초대교회적 원형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대인의 안목과 생각에 호기심을 당겨주는 매력을 보이고, 거룩한 유혹의 빛을 발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게는 지역 주민에게 매력 있는 교회로 비추어져야 하고, 넓게는 이 시대와 사회에 신비스러운 유혹의 빛을 비추어주어야 합니다.
과거 선교사들은 암흑한 우리 민족사회에 집어등의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초대교회는 암울한 우리 민족의 명든 가슴을 어루만져주고 시대의 아픔을 치유해 주었습니다. 한 마디로 시대적 집어등 교회가 되어 준 것이지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국교회는 시대적 부담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저는 수련회를 하는 동안 내내 집어등 교회를 꿈꿨습니다. 후반기에는 더 생명의 말씀과 복음의 능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더 눈부신 복음의 빛과 더 거룩한 유혹의 이미지의 광채를 비출 것인가를 고민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역자들에게 우리 모두 함께 집어등 교회를 꿈꾸자고 하였습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창문 밖으로 현란하게 집어등 불빛이 비추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집어등 교회를 꿈꿔야 할 때입니다.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