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칼럼] 전쟁과 평화론의 3가지 유형 (5·끝)
전쟁 행위에 종교적 의미 부여
신에 대한 봉사이며 종교적 특권,
구원의 방편… 성스러운 것으로
구약 속 ‘전쟁’ 단어 300회 이상
중세 시대 ‘거룩한 전쟁론’ 기초
호전적 이슬람 맞선, 생존 수단
3. 거룩한 전쟁론(The Crusade)
중세시대 십자군 전쟁은 흔히 성전(聖戰)으로 일컬어져 왔다. ‘거룩한 전쟁’이란 의미의 성전은 전쟁 행위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이론으로, 대적과의 싸움은 신적 요구로서 신에 대한 봉사이며 종교적 특권이자 구원의 방편이 된다고 생각한다. 전쟁은 피하거나 거절해야 하는 행위가 아니라 종교적 목적에 의한 성스런 수단으로 간주한다.
이런 성전 개념은 구약으로부터 도출된 개념인데, 크로스(F. M. Cross), 고트발트(N. W. Gottwalt), 폰 라트(G. von Rad) 등의 학자들은 구약의 전쟁 기록을 ‘거룩한 전쟁(milhāmāh qedhōshāh)’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구약에 보면 130건의 전쟁 기록이 있는데, 구약에서 전쟁을 뜻하는 밀하마(milhāmāh)라는 단어가 300회 이상 나타난다. 이런 구약의 전쟁 기록이 중세 시대 ‘거룩한 전쟁론’의 기초가 되었고, 이슬람의 지하드(Zihard) 사상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성전론을 뒷받침해 준 본문이 예레미야 48장 10절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당할 것이로다”라는 말씀이었다. 이 본문이 1095년 11월 클레르몽 공의회(Council of Clermont)를 시작으로 1291년까지 성지 탈환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어 약 200년 간 계속된 십자군 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거였고, 이 본문에 근거해 학살이 정당화되었다.
이 같은 성전론이 대두하게 된 배경은 아래와 같다. 4세기 이후 이민족과 기독교 세계의 대립과 대결이 심화되면서 평화주의는 후퇴하고 의로운 전쟁론이 대두되었으나, 정당전쟁론은 이론적으로 빈번하게 왜곡되기도 했다.
야만인들이나 이슬람 세력의 호전적 공격 앞에서, 전쟁의 정당성을 심사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제국의 정복 전쟁은 이교도의 개종과 교화(敎化)를 위한 하나님의 일, 곧 성전(聖戰)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단적인 예가 590년 교황이 된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재위 590-604)의 경우였다. 그는 전쟁을 신앙 확산의 도구로 여겼고, 기독교 신앙을 해치거나 모독하는 이민족의 행위에 대해서는 전쟁이 복수의 수단이었다.
샤를마뉴(Charlemagne, 재위 768-814)는 8-9세기 이탈리아 해안 지역을 습격하는 이슬람 교도들과 싸우는 기사들에게 ‘죽으면 천국으로 인도된다’고 가르치면서 거룩한 임무를 부여한 바 있고, 기독교적 유럽이 계속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던 9-10세기에는 의로운 전쟁 개념이 특히 이교도들과의 전쟁 개념과 결부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교황 레오 4세(Leo Ⅳ, 재위 847-855)와 요하네스 8세(Johannes VIII, 재위 872-882)는 ‘이슬람 아랍인이나 노르만족과 같은 이교도들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자들은 영생을 얻으리라’ 약속했다.
이교도와의 전쟁을 정당한 전쟁으로 간주한 또 한 사람의 교황이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 1015-1085, 재위 1073-1085)였다. 이른바 서임권 투쟁(敍任權 鬪爭, Investiture Controversy)을 통해 교황의 권위를 신장한 그는 이교도와의 전쟁을 ‘세상의 올바른 질서’를 확립하는 데 불가피한 정당한 조치로 이해했다.
1050년부터 스페인에서 시작된 재정복 전쟁(Reconquista)도 교회의 지지를 받았고 성전(聖戰), 곧 거룩한 전쟁으로 간주되었다.
십자군 전쟁에 앞서 벌어진 1071년 만지케르트(Manzikert) 전투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으로, 십자군 전쟁의 전초전으로 불린다. 만지케르트 전투는 셀주크 투르크(Seljuq Turk)군 5만 명과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 동로마 제국의 20만 대군이 만지케르트, 곧 지금의 터키 동부 말라즈기르트(Malazgirt)에서 벌인 전투로, 이때 이슬람 세력인 셀주크 투르크가 승리해 비잔티움 제국 황제 로마누스 4세는 포로로 잡혀가는 굴욕을 당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셀주크 투르크는 서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게 됐고, 이 전쟁은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를 가져오게 된다.
만지케르트 전투, 십자군 전초전
비잔티움 황제 성지 탈환 호소에
유럽 대규모 다국적 군대 출발해
200여 년 지속, 유럽 변화 이끌어
◈십자군 전쟁(1095-1291)
만지케르트 전투로부터 꼭 25년 후 일어난 십자군 전쟁은 대표적인 성전(聖戰)이었다. 이 전쟁에서 성전 개념이 구체적으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1095년 11월 27일, 프랑스 클레르몽 공의회(Council of Clermont)에서 53세의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 1042-1099)는 십자군 원정을 선포했다.
10세기 이래 세력을 확대한 이슬람 세력 셀주크 투르크족이 비잔티움 제국을 압박하고 1077년에는 기독교의 주된 성지인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예루살렘 순례자들을 박해하자, 비잔티움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Alexius I, 재임 1081-1118)가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요청을 받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유럽 군주와 제후들을 향해 성지(聖地)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호소했다. 이때 그곳에 모인 이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신다!(Deus vult)’고 외치면서 호응했다.
교황은 십자군에 참여하면 속죄받기 위해 하는 고행(苦行)을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전대사(全大赦, indulgentiae plenariae)를 선포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설교했다.
“육지에서나 해상에서 이교도들과 싸우다 죽은 모든 이들에게는 전대사가 주어질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으로 전쟁에서 죽은 모든 이들에게 모든 죄의 사면을 허락할 것입니다.”
교황만이 아니라 ‘유럽의 양심’으로 불리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St. Bernard de Clairvaux, 1090–1153)도 성전에의 참여는 수도사가 되는 것 이상으로 보람된 일이라며 참여를 호소했고, 모병(募兵)에 적극 가담했다.
1096년 8월 대규모의 다국적 군대가 결성돼 예루살렘으로 출발했다. 이때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들을 ‘십자가의 전사들’이란 의미로 ‘크로케시그나티(crocesignati)’, 곧 십자군(Crusade)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쟁은 1096년 제1차 십자군을 시작으로 1291년까지 200여 년 동안 이후 여덟 차례에 걸쳐 지속돼, 유럽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637년 이래 ‘악한 이민족’ 이슬람 세력 지배 하에 있던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전쟁은 기실 살인과 약탈 등의 거대한 폭력이었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1109) 같은 이는 전쟁을 통한 문제 해결 자체를 강하게 반대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군중의 함성에 묻혀 버렸다. 이슬람이나 이교도들로부터 기독교를 지키는 것은 거룩한 소명이며 이를 위한 전쟁은 불가피하고 정당한 수단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통제되지 않는 잔인한 폭력과 살상이 자행되었다. 한 가지 사례를 말한다면,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제1차 십자군은 사흘 동안 3만 명을 살육했다.
‘성스러움(聖)’을 ‘전쟁(戰)’에 더하면 전쟁이 정당성을 갖게 될 뿐 아니라, 폭력이나 살인에 무감각하게 되어 더욱 잔혹하게 된다. 그렇게 십자군 전쟁은 잔인한 폭력을 정당화한 것이다. 종교적 신념은 가장 추악한 포학과 살상의 원인이었다.
여러 전쟁과 그 폐해를 경험한 11세기 프랑스에서, 그리고 후에는 독일에서 ‘하나님의 평화(pax Dei, Peace of God)’와 ‘하나님의 휴전(treuga Dei, Truce of God)’ 운동을 펼쳐졌지만, 성전이라는 대의명분 앞에서는 무력했다. ‘하나님의 평화’란 전쟁에서 제외돼야 할 대상을 확대함으로써 전쟁에 가담하는 자들을 제한하려는 운동이었다.
‘하나님의 휴전(treuga Dei)’이란 1027년 프랑스 툴루스(Toulouges)에서 모인 툴루스 공의회에서 정한 규정으로, 군사 작전 혹은 군사 활동 기간을 제한하는 운동이었다.
처음에는 토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휴전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후에는 주현절부터 승천기념일까지, 그리고 사순절에서 성령강림절 이후 8일까지, 그리고 매 주일과 금요일에는 전쟁을 피하고 휴전해야 한다는 그런 운동이었다. 이런 운동이 있었으나 십자군 전쟁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십자군에 가담하는 이들은 실제로 자신을 칼을 휘두르는 거룩한 ‘하나님의 전사(milites Dei)’ 혹은 ‘그리스도의 전사(milites Christi)’로 인식했다. 초기 기독교회에서는 칼을 맞고 희생된 자가 순교자였으나, 이제는 칼을 써서 사람을 죽인 자가 순교자로 추앙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성지 탈환 명분 불과, 거대 폭력
‘인간의 뜻=신의 뜻’ 동일시 위험
각종 파괴, 인명 살상 정당화해
흑백논리 따라 극단적 성격 가져
◈문제점
앞에서 보았듯 성전론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개인이나 집단)의 뜻을 신의 뜻으로 동일시할 위험이 있다.
자기는 의롭고 상대는 악하다고 간주하고, 이의 척결을 신의 뜻으로 동일시한다.
둘째, 신의 이름을 빙자한 전쟁이기 때문에 전쟁 행위에서 발생하는 모든 파괴, 인명 살상을 정당화하고 이를 신을 위한 분투(奮鬪)로 간주한다.
셋째, 이런 이념 때문에 전쟁은 잔인하게 수행된다.
성전론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흑백논리를 따라 적을 신에 대한 원수로 간주되어, 가차 없이 제거하되 극단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극단적 이슬람 세력이나 최근 아프카니스탄에서 이런 일이 자행되고 있다. 살인 학살 처형 등은 전쟁 행위는 성스러운 수단일 뿐이다.
초대교회 후 300년 간 평화주의
제국 종교 4세기 후 정당전쟁론
16세기 종교개혁자들도 계승해
십자군 등 거룩한 전쟁론도 대두
비폭력과 반전 평화주의 흐름도
◈맺는말
이상에서 전쟁과 평화에 대한 기독교 전통의 3가지 유형의 주장에 대해 검토했다. 각각의 주장에 대해 살펴보고 문제점을 제시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루살렘에 교회가 설립된 후 첫 300년간은 평화주의 입장을 취했으나 4세기 이후 정당전쟁론으로 대치됐고, 중세 교회에서는 거룩한 전쟁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16세기 이후 다시 평화주의가 제시되기도 했으나, 주류 기독교회는 정당전쟁론 전통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이후에는 전쟁이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다는 현실주의(war realism)가 대두되기도 했지만, 정당전쟁론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도 계승돼 가톨릭뿐 아니라 주류 개신교회의 지지를 받았고, 현대 평화사상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즉 암브로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를 거쳐 루터, 칼빈(Jean Calvin), 그리고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폴 렘지(Paul Ramsey)로 이어오면서 주류 교회의 전쟁론으로 발전됐다.
즉 이들은 악에 대항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적의 공격에 대한 정당방위로서의 방어적 전쟁은 정당한 전쟁이라는 입장에서 거의 일치했다.
물론 이런 중세의 큰 흐름 가운데서도 병역 거부나 비폭력, 반전 평화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4세기 투르의 마르틴(Martin of Tours, 316-397), 로마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지목된 11세기 카다리파(Catharie)나 12세기 왈도파(Waldenses)도 평화주의를 지향했다. 대체적으로 소(小)종파 기독교 집단이 평화주의를 지향했다.
이탈리아 동북부 지역 파두아의 마르실리오(Marsilio of Padua, 1275-1342) 또한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1324년 『평화의 수호자(Defensor Pacis, Defender of the Peace)』라는 책을 썼다.
마르실리오는 책에서 사회통합 요소는 교회가 아니라 국가라고 보았고, 세속 군주의 기능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보아 전쟁을 반대했다. 그는 또 종교 문제에 대한 국가 권력의 강제력 사용을 반대했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에 근거한 경우’ 국가 권력을 통해 이단을 억제할 수 있다고 하여 이단 박멸을 위한 국가 권력의 무력 행사를 정당화한 이론(Compelle intrare)에 반대한 것이다. 마르실리오는 평화주의자였을 뿐 아니라, 교황우선주의(Curialism)를 반대하고 교회 회의가 교황의 권위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14세기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4-1384)도 평화를 중시해 전쟁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순된다고 가르쳤으나, 전쟁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민중을 계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평화지향적이였으나 절대평화주의자라고 볼 수는 없다.
보헤미아의 교회개혁자 얀 후스(Jan Hus, 1372-1415)의 후예인 후스파(Hussite)에는 얀 지슈카(Jan Ziska, 1360-1424)와 같은 전투적 지도자가 있었나 하면, 평화주의를 지향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한 인물이 페트르 폰 첼시츠키(P. von Chelcicky, 1390-1460)였다.
이들 외에도 아탈리아의 위대한 문인 단테(Dante, 1265-1321),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피에르 뒤부아(Pierre Dubois, 1255-1321) 같은 평화주의자들이 있었다.
중세 주류 기독교는 정당전쟁론 혹은 성전론을 근거로 전쟁을 수용했으나, 소종파 혹은 소수의 인물들에 의해 초기 기독교 평화주의가 미약하지만 마르지 않는 시내처럼 중세의 긴 역사를 견디며 평화의 이상을 이어 왔다.
전쟁 가급적 일어나지 않게 해야
희생과 고통 줄이고 속히 끝내야
전쟁 방지하고 억지할 의무 있어
문제는 앞에서 제기한 3가지 이론은 전쟁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해 주지 못하고, 그것이 전쟁을 억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전쟁은 너무 악하고 그 결과가 영속적인 고통이라는 점에서 그대로 둘 수도 없지만, 동시에 복잡한 이해관계와 국제질서와 관련된 문제이기에 그 어떤 것으로도 전쟁을 억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다. 주어진 상황을 고려하면서 가능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가능한 정의롭게 수행돼 희생과 고통을 줄이고 전쟁이 가능한 속히 끝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을 방지하고 전쟁 억지력을 행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성경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Peacemaker)은 복이 있다고 하셨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마 5:9)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끝>
이상규 박사
고신대학교 명예교수
백석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