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절망에서 희망의 빛으로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마태복음 14:26-32)”.
예수님께서는 사람 없는 한적한 곳으로 가셨지만, 군중들은 거기까지 따라왔습니다. 당시 군중들을 올바로 이끌 지도자가 없었기에, 예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백성을 돌보고 올바로 지도하기보다는 교만에 가득 차, 가난하고 고통에 허덕이는 백성을 죄인으로 취급해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늘 영적으로 갈급해 있었습니다.
온종일 주님을 따라다니던 군중들은 배가 고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군중들의 허기를 해결하기란 참으로 고단합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책임을 부여하시면서, 제자들의 태도를 보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마침 한 어린아이가 가져온 도시락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당시 보리떡은 하층계급 사람들이 먹는 보잘것없는 음식이었으며, 물고기도 작은 것입니다.
상류층 사람들이 볼 때는 보잘것없지만, 주님께서 사용하시면 요긴하고 풍성하다는 교훈을 주는 기록입니다.
군중을 먹이신 사건은 구약의 배경 속에 살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계시합니다.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었으며(왕상 17:8-16), 엘리사는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이지 않았습니까(왕하 4:42-44).
그로부터 오래 전 모세가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로 먹인 것처럼, 예수님은 한적한 뜰에서 같은 백성들을 기적적으로 먹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큰 잔치가 벌어지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이 같이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엘리야, 엘리사, 그리고 모세보다 더 탁월한 분이시고, 하늘 잔치를 지상에서 마련하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군중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신 주님께서 ‘밤 사경’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시자 제자들이 두려워 떠는 장면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밤을 3경으로 나누어 1경을 4시간씩 사용했지만, 신약 시대에는 밤을 4경으로 나눠 1경은 오후 6-9시, 2경은 9-12시, 3경은 12-3시, 4경은 3-6시입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이 심한 바다 위로 찾아오심은 세상의 온갖 고통과 시련으로 위험한 상황에 직면한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 권능으로 임재하신 사건입니다.
오늘 이 사건에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발견한 베드로는 혹시 유령이 아닌가 의심을 갖게 됩니다. 이는 그가 약해진 믿음을 되찾았으나 아직 그 믿음이 굳게 다져지지 않았음을 잘 나타냅니다.
오늘 베드로는 거친 바다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이시면 저더러 물 위를 걸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거친 물결로 고난을 당하던 중 나타나신 주님께서 혹 유령이 아닐까 하는 의심과 함께, 스승님이심을 확인하고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소원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저함 없이 베드로에게 “오라” 하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배에서 뛰어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곳으로 갑니다.
하지만 주님께 의심 없이 두려움 없이 순종했던 때와 달리, 잠시 후 거센 바람을 보고 의심하면서 물 속으로 점점 빠져 들어가는 위험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믿는 이에게 영향을 주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믿음과 성격이 각기 다른 것들이 많은 세상에서 들리는 것, 보이는 것들을 듣고 보다 보면 두려움이나 공포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 해서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주님을 향한 여정을 멈추는 행동 아닐까요? 주님을 향해 걸어간 베드로의 물 위의 걸음은 신앙인들의 여정을 말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이 길을 조금 더 길게 보자면, 거센 바람도 풍랑도 아예 앞이 안 보이는 안개를 포함해 무수한 난관들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롯이 믿음으로 이 모든 난관과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믿음의 손길임을 의심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기 위해 갖은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주여, 구원하여 주소서”라고 외치던 베드로는 절체절명의 순간, 구세주인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절망에서 희망”의 빛을 보았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애닮은 외침이 있자, 주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십니다. 함께 배에 오르던 그 순간, 베드로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주님께서는 험한 바다 골짜기로 내려가는 베드로에게 즉시 손을 내밀어 구원해 주십니다. 이는 신앙인들이 깊이 깨달아야 할 주님의 사랑입니다.
다행히 베드로처럼 죽지 않으려고 “살려주십시오!” 하고 외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죽어가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오늘 베드로의 행동 속에는 잠시 망각하던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해 걸어갈 때는 멀리 보이는 거센 바람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가깝게 주님께서 제자들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능력과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는 늘 우리 곁을 지키고 계심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의심(疑心)이란 어학사전에서 ‘믿지 못하거나 확실히 알 수 없어 의아하게 여김’이라고 합니다. 경계(境界)란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나누어지는 한계’입니다.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할 신앙인들이 오히려 의심이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누추한 차림으로 교회를 오거나 교회 문 앞을 서성이면, 먼저 의심하고 경계합니다. 교회에 찾아오는 손님을 겉모습만 보고 일단 의심하며, 행동거지만 보고 경계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베드로 역시 이러한 인간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 사례입니다.
필자 역시 교회 안에서 의심과 경계, 모함을 받은 적이 있어 참으로 안타까운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여 후회가 막심하기도 했었습니다.
제아무리 인격이 높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더라도, 속에는 위선적인 모습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의심과 경계로 서로 불신하고 믿지 못한다면, 죄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모든 죄의 근원은 의심으로부터 시작해 의심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의심의 안개를 걷지 못하면, 그 신앙생활은 결국 실패할 것입니다. 이 시간부터 주님을 의심하는 일은 삼가고, 매일 같이 간증하는 삶, 순교를 각오하는 삶으로 전환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더 가까이 느끼고,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상황이 편하고 유리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상황에서도 우리 요구나 욕심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필요하며 요구됩니다.
주님을 더 생생하게 느끼는 신앙이 이 모든 것을 극복하도록 만들어 줌을 절대 신뢰해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믿고, 용기 있게 주님께로 즉시 나아가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폭우와 함께 태풍 ‘카눈’이 지나가면서 이 땅에 많은 홍수와 이재민들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베드로가 물 속에 빠지는 절체절명의 순간 “주여 구원하여 주소서”라는 외침이 신앙인들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78주년을 맞는 광복절에는 더 뜨거운 열기로 주님께 나라와 민족을 위해 무릎 꿇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의심에 찬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을 바라보다 어둠의 세계로 빠진 오늘 본문 속 사건은 지금의 대한민국의 위기와 비슷합니다.
이념으로 얼룩진 저들의 만행에 속지 말고, “주여 구원하여 주소서!” 외치며 주님만을 신뢰하고 바라보면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