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국 칼럼] 외갓집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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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우리나라 농촌 모습.
▲1960년대 우리나라 농촌 모습.

삼십 년이 훌쩍 지난 시간을 안고 외가 마을을 찾아가는 설렘 위로, 옛 추억이 차올라 지난 밤 잠자리를 뒤척였다. 외할머니 소천 이후 발길을 끊은 고향이다. 첫 아이를 친정집에서 낳는 풍습으로 외가 마을이 고향이 되었다. 외가 동네는 상리, 중리, 하리 세 마을이 여울을 경계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방학 때마다 한달음에 달려 나오는 삽살개의 꼬리질이 그리운 유년 시절,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거의 외가 동네에서 보냈다. 장항선을 타고 간이역에서 내려 십오 리를 걸으면 굽이굽이 작은 굽이가 백 개를 넘는다고 해서 붙여진 ‘백여울’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외가 마을 근처까지 도시화 된 변화가 당혹스럽지만, 마을은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잔상들이 군데군데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을 어귀 장승을 지나면서 우마차 타고 오일장터를 향하는 마을 사람들의 행렬이 다가오는 듯한 울림이 아련하다. 곤충 채집 방학 숙제를 도와주던 마을 동무들은 대부분 마을을 떠났다.

아들을 낳아도 첫돌을 넘기지 못하고 셋이나 잃어버린 외할머니는, 사십 줄에 네 번째 외아들을 낳았다. 이번에는 죽음이 불러도 꼭 붙잡으라고, 마을 사람들은 늦둥이 외아들을 ‘붙들이’라고 불렀다.

그래서인지 외삼촌은 총명하게 잘 자랐고, 특차로 뽑힌 국립항공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명줄은 그리 길지 못했다. 환갑을 지난 어느 날 건강하게 생활하던 일상 중 갑자기 쓰러졌다. 1남 3녀 중 막내인 외삼촌은 죽음길 장자가 되었다.

오랜만에 대청에 앉아 먼 산 운우의 산봉우리를 바라보니 두루미 한 쌍 느린 날갯짓이 서녘을 알린다. 안마당을 비집는 바람 한결 고옥하다. 뜨겁던 커피가 마시기 좋은 온도로 짙은 향기를 나른다.

대청마루에 모기장을 치고 잠든 밤하늘에 당장이라도 쏟아내릴 것 같은 별들이 감자보다 굵게 내려앉곤 했다.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한 별들이 뜨거울 것 같아 손을 움키던 유년기 외갓집은 언제나 정겨운 추억이다.

잠자리를 봐주던 외할머니는 배꼽 덮고 자라는 성화를 잊지 않았다. 아침이 되면 대청마루 모기장은 매미, 여치, 풍뎅이, 장수하늘소, 풀벌레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대청마루는 안마당 정중앙에서 열어놓은 대문을 직시하고 바깥마당까지 내려다 볼 수 있는 파수대다. 가마솥에 찐 감자, 비름나물과 들기름 양푼 비빔밥, 마을 동무들과 초지에 모여 소풀을 먹이고 돌아오면, 외할머니의 감자밀 장국과 참외 수박 포도를 배 터지도록 먹고 늘어지게 쉬는 안식처다.

겨울이 되어도 대청마루는 양지 볕이 좋다. 소죽을 끓이는 방안은 언제나 온기가 식지 않았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듣던 트랜지스터 연속극은 외할머니가 곰방대를 물 수 있는 유일한 휴식 시간이다. 아들을 세 명이나 앞서 보낸 외할머니는 가슴앓이에 좋다는 입소문을 믿고 담배를 배웠다.

한시라도 손을 쉬지 않는 외할머니는 인절미와 보리 식혜를 달였고, 장작불로 두부를 만들어 이웃들과 나눴다. 겨울 나도록 가래떡을 찍어 먹을 수 있는 조청을 잔뜩 담아두고, 이내 더 끓여 진한 엿이 된 쌀엿을 콩고물 잔뜩 발라 국사발 가득 담아주었다.

대청마루는 추억을 쌓아둔 서고다. 잔치 때면 오랜만에 모인 친인척과 마을 어른들이 담근 술을 기울이며, 마을 아낙들이 입담으로 끓인 고깃국과 진안주로 밤을 지새웠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상청 또한 대청마루 뒷칸 쪽 좌측 창끝에 차려졌고 그곳에서 사자(死自) 밥상을 받았다.

모깃불을 피고 별을 세던 바깥마당 미루나무는 여전히 하늘 높다. 때까치 한 쌍이 세월을 엮어 만든 둥지를 드나든다. 뒤란 뜰에는 벽마다 멍석들이 정연히 매달려 있고, 잔자갈에 앉아 있는 장독대는 질서정연하다. 부엌의 가마솥, 아궁이 부지깽이, 뒷간의 똥지게까지 모든 것이 애상이고 그리움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풋풋한 뒤안길, 그리운 기억들, 앞서간 마을 사람들의 너털웃음, 어릴 적 뛰놀던 아지랑이 뒷동산, 물장구치던 백여울, 뻥튀기 소리에 귀를 틀어막던 오일장터, 소 풀 먹이던 초지의 먹구름이 이내 실눈 사이로 눈물을 삼키게 한다. 외할머니를 태운 상여가 백여울을 두 번 건너는 동안 열차에서 통곡하던 그날도 구슬프게 가랑비가 온종일 내렸다.

사춘기를 말썽꾸러기로 보낸 격리 조치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외할머니와 서너 해를 동거했다. 재수 끝에 지방대학을 진학한 어느 날 외할머니의 부고를 알리는 전보를 받았다. 외삼촌이 모시고 간 목사님 집도로 어린아이처럼 영접기도를 마친 외할머니는, 임종을 지키고 있는 1남 3녀를 곁에 둔 채 생뚱맞게도 외손자 이름을 부르고는 이내 소천했다.

아리랑 아리랑 외할머니 이름은 설봉연, 아리랑 아리랑 꺼이꺼이 에고
에고, 아리랑 아리랑 외갓집 아리랑.

하민국 목사
웨민총회 신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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