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끄심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샤라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태복음 16:13-17)”.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바다에서 동북쪽으로 40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고, 갈릴리 통치자인 헤롯 안디바의 지배를 받지 않고 분봉왕 ‘빌립’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이곳은 로마 황제 가이사를 기념해 ‘가이사랴 빌립보’로 불렸습니다.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뜻으로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하시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는 반면,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3년간의 공생애를 결산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적보다는 자신의 본질을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질문하셨던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알리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의 사역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대답으로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화해시키는 영원한 중보자, 즉 ‘구원자’이심을 아주 분명하게 신앙고백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처럼 날마다 신앙을 고백하는 가이사랴 빌립보 같은 곳이 돼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의 사명을 내포합니다. ‘살아계신’이란 표현은 이방 신 또는 헛된 우상과 비교해 참 신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예수님의 본질을 나타낼 뿐 아니라, 그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내포합입니다.
특히 14절의 군중들의 여론,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는 표현 속 공통점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위대한 인물’로 보았다는 점입니다. 앞서 14장 2절에서는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1)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했는데, 유대인들은 그가 종말 심판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르게 인도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올 것으로 믿었다고 합니다(말 4:5). 예레미야는 구약 성경에서 이사야와 함께 하나님의 사자로서 마지막 때가 오기 전에 파견될 것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면 현존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집인 교회에서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구원’입니다. 구원은 신앙인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선물합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주고자 하는 믿음은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믿음이자,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이 생명을 거저 받았으니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자는 믿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받은 세례 의식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고 살겠다는 결단의 예식인 것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이 두 질문은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질문입니다.
처음 질문이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주로 나를 어떻게 알고 말들을 하느냐?”라는 질문이라면, 두 번째는 “너희는 사람의 아들인 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 믿지 않느냐? 그러면 너희는 너희 자신을 누구라 믿고 있느냐?” 하는 물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몬 베드로의 대답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고 있는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고백이자,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이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너는 행복하고, 네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선포하십니다.
주님께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은 베드로였지만, 마지막 순간 한낱 가냘픈 여자에게 예수님을 부인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풍랑 이는 캄캄한 밤에 “물 위로 걸어오라” 부르시는 예수님을 의심한 나머지 거센 광풍에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 물고기를 잡던 중, 베드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것이 아마 우리 인간들의 참 모습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고, 우리에게도 ‘아버지’라 부르라 하셨습니다. 너희도 나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살자고 하신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성령의 힘으로 있게 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이 생명과 이 인생도 그렇게 주어졌고, 그 힘으로 살아가야 함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우리 삶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이는 성령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살아가야 할 운명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주어진 운명대로 겸손하게 성령의 이끄심대로 살아야만, 베드로처럼 넘어지는 일이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이 유한한 세상에서 우리를 무너지게 하는 유혹들이 참 많습니다. 어떨 때는 예상치 못했던 일들도 빈번히 일어납니다. 더구나 요즘 같은 시대는 거짓이 활개를 치고 온전한 것이 감춰지는 그야말로 암흑의 시대가 되어, 더욱 더 확실한 믿음이 요구됩니다.
심지어 가장 거룩하고 공정하고 공평해야 할 교회 안에서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그런지 세상 못지 않은 죄악으로 물들어, 가짜와 진짜가 서로 얽혀 주님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세우고 자신들의 아성으로 만들어 주님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어, 깊은 회개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확신에 찬 믿음으로 답하는 신앙인들이 돼야 할 것입니다.
노아 시대와 소돔과 고모라 시대 같은 세상 연락에 취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회개하여 돌아오라 부르짖으시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다가 멸망의 세계로 빠졌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여,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세상 뜻을 쫓아가는 어리석은 죄를 범치 않는 신앙인들이 됩시다.
특히 교회 안에서 지금도 하나님의 뜻을 이용하여 자신의 명예와 부와 권력을 탐하는 신앙인들이 있다면, 즉시 뉘우치고 회개하여 영광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막심한 후회의 날이 오지 않도록 날마다 구원을 사모하길 바랍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끄심대로 살아가는 이 땅에 모든 신앙인들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