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홍 칼럼] 이승만과 기독교 (2)
지난 5월 26일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과 기독교’라는 주제로 열린 제26회 샬롬나비 학술대회에서 김철홍 교수님(장신대)이 발표한 ‘우남 이승만의 기독교 개종과 기독교가 그의 정치사상에 준 영향’을 허락을 얻어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탈옥하려다 붙잡혀 바로 재수감
25세 청년, 사형당할 위험 놓여
주리 틀리는 야만적 고문 시달려
후유증으로 40년 지나서야 글씨
위기 상황 속 기독교 신앙 가져
1899년 1-2월 경 회심 확률 높아
3. 한성감옥에 수감된 이승만의 기독교 개종
우남은 박영효와 공모해서 고종을 폐위시키고 공화정부를 세우려 했다는 ‘대역죄’로 1899년 1월 9일 체포돼 수감됐다. 사실 우남은 박영효 사건의 주변인물에 불과했다. 박영효가 파견한 행동대의 이규완(李圭完)을 만난 적이 있다는 것뿐, 추가 혐의는 없었다.
만약 우남이 탈옥을 시도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면 무혐의로 석방되었거나, 비교적 짧은 기간 후 석방됐을 것이다. 아펜젤러는 “그(우남)의 체포는 외국인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풀려나올 무렵에는 탈옥하라는 설득을 받았으나 도망하는데 실패하여 다시 감방으로 들어갔다”고 말한다.
만약 우남이 탈출하지 않았더라면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남은 1899년 1월 30일, 투옥된 지 21일 만에 최정식·서상대와 탈옥을 시도한다. 1899년 7월 11일 평리원(고등재판소)에서의 판결 선고문에 따르면 탈옥의 주범은 최정식, 우남은 종범이다.
자신의 집 식객인 최학주를 통해 두 자루의 권총을 몰래 반입한 최정식은 간수에게 총을 쏘고 다른 두 명과 함께 탈옥했다. 우남은 곧바로 체포됐지만, 최정식과 서상대는 탈옥에 일단 성공한다. 그 후 최정식은 4월 24일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체포되고, 서상대는 중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탈옥범으로 재수감된 우남이 1899년 3월 18일 첫 공판에 나갔을 때 재판장은 만민공동회가 ‘오흉(五凶)’의 한 사람으로 규탄했던 유기환(兪箕煥)이었는데, 5월 30일 사법제도가 바뀌는 바람에 홍종우(洪鐘宇)가 재판장이 됐다. 그는 황국협회장을 지낸 인물로, 황국협회의 만민공동회 습격을 지휘한 자였다. 이우남과는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우남을 역적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1899년 1월 2일자 상소가 기록돼 있다.
1899년 3월 19일 황성신문에는 “풍설을 들은즉 이씨가 일률(一律: 死刑)을 면하기 어렵다 하나, 기왕의 조칙 중 미결수는 판결할 때 감일등(減一等)하라 하셨으니 법관들이 조칙대로 시행할 지경이면 이씨의 누명(縷命: 한 가닥 목숨)을 보존할 듯하다더라”는 기사가 실렸다. 비관적인 보도였고, 아마 우남 본인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1899년 1월 30일부터 최종 판결이 내려진 7월 27일까지 약 6개월 동안 그는 하루하루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다. 당시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 시절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 죄수들은 몰래 감옥으로 들여온 조간신문에서 밤중에 내가 처형됐다는 보도를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준 일이 몇 번이나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의 선친은 나의 죽은 몸을 매장하겠다고 찾으러 오시곤 하셨다. 사형선고를 받은 살인수가 나와 같은 형틀에 얽매여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간수와 사형집행리와 순검이 감옥문을 열고 우리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방안에 있던 죄수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사형집행리에게 넘겨질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형틀을 열고는 살인수를 끌어내고 나를 다시 형틀에 잠가버렸다. 나는 ‘이 다음은 나로구나’ 하고 독백하면서 오히려 내가 먼저 끌려가서 빨리 끝이 나버렸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에 잠겨 있었다.”
함께 탈옥했던 최정식이 후에 법정 최고형을 받고 사형당한 것을 고려할 때, 우남이 재판 결과에 대해 당시 비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당시 우남은 부친에게 보내는 유서를 써서 수중에 갖고 있다가 사형이 집행되면 다른 사람에게 주고 가려 했다.
재판이 진행되던 6개월 동안 우남은 야만적 고문에 시달렸다. 로버트 올리버(Robert Oliver)의 전기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에 당시 고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살갗을 파고드는 포승줄에 두 팔이 묶인 상태에서 양다리에 주리를 틀고, 손가락 사이로 대나무 가지를 넣어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비트는 고문을 당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매일 곤장을 맞아 그의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
이승만은 77세 때의 기록에 이렇게 적었다. ‘때때로 나는 꿈속에서 감방에 갇힌 자신을 발견한다.’ 한 번은 당시 일을 묻는 질문에 이승만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잊어버리게 좀 놔둘 수는 없나’ 하고 대답했다.”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우남은 40년이 지난 1939년이 돼서야 비로소 붓글씨를 다시 쓸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그가 재판을 받던 6개월의 기간은 그가 육체적·심리적·정신적으로 심각한 위기(crisis)를 경험하던 시기였다. 그 위기는 그를 말 그대로 죽음의 문턱 앞까지 내몰았고,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그는 기독교 신앙을 향해 마음을 열게 된다.
그렇다면 우남이 기독교로 개종한 시기는 정확히 언제일까? 감옥 생활이 1년쯤 지난 시점이 되면, 우남은 이상재·이원긍·김정식·홍재기 등 독립협회 활동을 함께하던 동지들이 한성감옥에 들어오자, 이들을 설득해 함께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1902년 12월 28일에는 감옥 안에서 예배도 드리고, 그 후 우남은 감옥 안에서 40여 명을 개종시킨다. 그러므로 우남의 개종 시기는 넓게 보면 그가 감옥에 재수감된 1899년 1월 30일부터 1900년 초 사이다. 그 기간 중에서도 그의 재판이 진행되던 1899년 1월 30일부터 7월 27일 사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그 기간 중 그가 육체적, 심리적으로 가장 많은 압박을 받고 있었을 시기인 1899년 1월 30일 이후 약 두 달 정도의 기간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유영익은 탈옥에 실패하고 재수감된 1899년 1-2월이라고 보는데, 아마 그의 추측이 맞을 것이다. 손세일도 1899년 2-3월쯤이었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우남이 “십아문(十衙門)을 마지막으로 보는구나”라고 탄식한 일이 보도된 ‘매일신문’ 발행일자가 1899년 2월 3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재수감된 후 자신에 대한 묘사로 보이는 아래 글에서 우남은 자신의 개종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 어두운 감옥 속에 가두었을 때 나는 두려워 혼자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있으면 다른 세상에 갈 터인데 저 외국 사람들이 나에게 말해준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세상의 감옥에 가 있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그들이 말하던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너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이라도 용서하실 것이다’라는 말인데, 그 말이 나의 마음에 떠오르자마자 나는 나의 목에 걸려 있던 나무칼에 머리를 숙이고 ‘오오 하나님, 나의 나라와 영혼을 구하여 주시옵소서’ 하며 기도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기도를 한 뒤, 우남이 성경을 구하려 했다는 점이다. 당시 옥중에서는 어떤 종교서적도 허용되지 않았지만, 비밀리에 에비슨(Oliver R. Avison) 선교사가 캐나다 선교사 해로니드(Harroyd) 양을 통해 셔우드 에디(Sherwood Eddy)가 공급하는 조그마한 영문 신약성경을 들여보내 주었다.
성경책을 받은 것에 관해 우남은 “그것을 받은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죄수 한 사람은 간수들이 오는가를 살피기 위해 파수를 섰고, 또 한사람은 성경책을 넘겨주었다. 나는 목이 형틀에 들어가 있었고 손에 수갑이 채워 있어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나의 마음 속에 들어 온 안위와 평안과 기쁨은 형용할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계속>
김철홍 교수(장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