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홍 칼럼] 이승만과 기독교 (3)
지난 5월 26일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과 기독교’라는 주제로 열린 제26회 샬롬나비 학술대회에서 김철홍 교수님(장신대)이 발표하신 ‘우남 이승만의 기독교 개종과 기독교가 그의 정치사상에 준 영향’을 허락을 얻어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성경 읽다 기도 후 개종했단 설도
단순 정치적 관심 의한 개종 아닌
죄와 죽음 이후 고민 능동적 응답
옥중에서 성경 구해, 스스로 읽어
프린스턴 유학 중 신학 강의 수강
1913년 신학학위 받고 교회 개척
우남의 ‘투옥경위서’에는 당시 상황에 약간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서는 성경을 먼저 읽었고, 성경을 읽다가 기도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감방에 혼자 있는 시간이면 성경을 읽었다. 배재학교 다닐 때는 그 책이 아무 의미가 없었는데 어느 날 선교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평생 처음으로 감방에서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 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랬더니 감방이 환한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면서 변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선교사들과 그들의 종교에 대해 갖고 있던 증오감, 불신감이 사라졌다.”
성경을 읽다 개종을 했는지, 아니면 개종을 하고 나서 성경을 읽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어느 쪽이 되었건 그의 개종이 단순히 기독교에 대한 정치적 관심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우남의 개종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죄의 문제와 죽음 이후 자신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문제에 대한 그의 능동적인 응답이었다.
우남이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주옵소서!’라는 기도를 자신의 입으로 했을 때, 그는 절대자인 하나님과 직접 대면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대로 죽으면 자신의 죄와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의 영혼을 구해주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남은 절대자와 일대일로 대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랬더니 감방이 환한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투옥경위서)”라는 말은 그 순간 신비한(mystic) 체험–그것이 심리적인 것이든 아니든-을 그가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종 당시 환한 빛을 보는 것은 사도 바울의 개종에서도 나타나며(사도행전 9:3,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 22:6; 26:13), 이것은 단순한 물리적 빛이 아니라 마음속에 가득한 어두움이 물러가고 깊은 종교적 깨달음을 얻는 성령의 조명(照明)을 가리킨다(고린도후서 4:6,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이어서 우남이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면서 변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므로, 죽음의 올무 아래 묶여 있던 그가 그 순간부터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나 생명의 지배로 옮겨졌고(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우남이 1899년 12월 28일 아펜젤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동시에 저와 같이 비참하고 죄 많음 몸을 감옥에 갇혀 있는 가망 없는 상태에서 구원해 주시고, 더욱이 의지할 데 없는 제 가족들에게 먹고 살아 갈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것은 우남이 단순히 기독교가 갖고 있는 정치 사상적 가치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숙명인 죄와 죽음의 문제와 영혼 구원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했음을 보여준다.
우남은 성경을 구하려 시도하고, 성경을 구해 옥중에서 스스로 성경을 읽었다. 그는 수동적인(passive) 태도가 아니라 능동적인(active) 태도로 자신이 처한 위기 상황에 응답했다. 전도자(advocate)가 전도를 하고 우남은 수동적 수용자(passive recipient)가 된 것이 아니라, 본인이 능동적으로 찾아가는 사람(active quester)이었다.
헨리 아펜젤러, D. A. 번거, 올리버 에비슨, 호레이스 언더우드, 제임스 게일 등의 선교사들이 옥중에 있는 우남을 자주 찾아왔다. 하지만 그에게 선교사들과의 인격적(personal) 상호작용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옥중에서 성경을 읽고, 아펜젤러와 벙커가 넣어주는 정기간행물 『The Outlook』과 『The Independent』을 포함한 각종 기독교 서적을 탐독한 것과 같은 비인격적(impersonal) 상호작용이다.
개종 현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루이스 람보는 이 과정에서 사회적 고립(social encapsulation)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개종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가족관계, 교우관계로부터 어느 정도 고립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남의 경우 개종 기간에 독방에 수감 중이었으므로 가장 이상적인 사회적 고립 상태였다. 우남이 옥중에서 양반들을 포함해 40여 명의 사람들을 개종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조건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조건이 아니었다면 당시 관직을 지냈던 양반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가족과 친지의 반대 때문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급격한 개종을 경험한 우남의 경우, 상호작용은 보다 장기간에 걸쳐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의 나이 23세 10개월 때 수감되어 29세 때 석방될 때까지, 20대의 한창 나이에 한성옥중에서 보낸 5년 7개월간 모두를 상호작용의 기간으로 볼 수 있다.
1904년 8월 석방된 뒤에도 그는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 기독교에 대해 알아나가게 된다. 심지어 우남은 1908년 9월부터 1910년 6월까지 약 2년 간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하면서도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기독교 신학 강의를 들었다. 우남 자신이 “그래서 나는 프린스턴 신학교 기숙사에 살면서 신학에 관한 강좌를 몇 개를 택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게 되었다”고 말한다.
올리버(Robert Oliver)는 “이승만은 프린스턴에 머문 2년 동안 신학생 기숙사 칼뱅 클럽에서 지냈다. 그가 신학대학 강의에 출석하는 일은 잦지 않았지만 신앙심과 종교활동을 통해 신학생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말하지만, 우남은 단순히 강좌 몇 개를 들은 정도를 넘어 1913년에 신학학위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우남이 목사가 되려는 생각을 갖고 신학공부를 했고, 1913년에 신학 학위를 받았다면 그 해에 쓴 『한국교회핍박』에서 그의 기독교 이해는 거의 절정에 도달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우남의 옥중 개종과 그 이후 지속적인 기독교 복음과의 다양한 상호작용의 결과는 기독교 정치사상가·독립운동가로 우남이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우남의 자서전을 쓴 올리버(Robert Oliver)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이 그의 영혼에 깃들자 자신도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존재이며 현재 곤경을 겪고 있지만 자신의 삶도 인류를 위해 하느님이 예비하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 이승만이 하느님의 의지대로 쓰임 받을 준비가 되어 있고, 기꺼이 그렇게 할 도구로 자신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시기(감방시기)였다”고 쓰고 있다.
마치 사도 바울이 다메섹 개종을 통해 사도의 소명도 받았던 것처럼, 우남도 옥중 개종을 통해 소명을 받았고, 향후 그가 한 독립운동과 정치활동은 모두 이 소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남이 옥중에서 1904년에 쓴 『독립정신』의 첫 번째 글, “국민 모두가 자신의 책임을 깨달아야 한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 연약한 애국동포들을 대신하여 흉악한 적들과 싸우다가 장렬히 죽어야 한다. … 그런 죽음만이 하나님이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며, … 그렇게 죽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이다.”
거의 순교자의 각오를 갖고 있다. 더불어 우남이 1913년 하와이에서 교회를 개척한 것 역시 개종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 시절 우남은 거의 목회자의 입장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시켰다.
김철홍 교수(장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