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욱의 ‘연애는 다큐다’ 117] 하트 한 개가 불러올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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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에 저장된 가족의 이름은 본명이 아닌 경우가 많다. 자녀들을 ‘우리 아들’, ‘우리 딸’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귀염둥이’, ‘깜찍이’ 같은 걸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에 둔감하거나 어색해하는 이른바 ‘츤데레 스타일’도 있다.
나 역시 그런 편인데, 폴더폰을 쓰던 삼십대 때는 나이에 안 어울리게 아내를 ‘마누라’로 저장해 다니기도 했다. 평소 쓰지 않는 호칭이지만 장난스럽고 친근한 말이기도 했다.
그러다 하루는 일터 근처에서 폰을 잃어버렸고,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사무실로 연락이 왔다.
“오늘 냉면 먹었어? 거기 전화기 두고 갔다고 찾아가래.”
냉면집 사장님이 잠기지 않은 폴더폰 통화 목록에서 아내를 발견하고 전화를 해준 것이었다.
“손님이 두고 가셨는데, 목록에 ‘마누라’라고 저장이 돼 있어서 걸어 봤어요.”
덕분에 폰을 빨리 찾을 수 있었다. 마누라로 저장한 덕을 보긴 했다. 이후 스마트폰 시대가 되고도 폰을 두어 번 잃어버렸는데, 인증서부터 사진까지 너무 정보가 많아져 잠금장치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뭘로 저장한다 해도 통화 목록에서 전화를 걸어 주인을 찾아줄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게 됐다.
스마트폰을 쓰면서부터는 아내를 그냥 이름 석 자로 저장했다. 애칭으로 하기에는 좀 어색했고, 그때 생각에 전업주부인 아내는 ‘누구 엄마, 누구 아내, 아줌마’로 이름과 함께 존재의 의미를 잃어간다는 생각에, 나라도 이름을 찾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이들도 이름만으로 저장했다.
얼마 전, 무슨 이야기 중 이십 대인 딸이 엄마-아빠가 서로를 어떻게 저장했는지 물었다. 아내도 나도 합의한 게 아닌데 둘 다 서로를 군더더기 없이 OOO, 이름 석 자로 저장한 것을 보더니 대단하다고 웃는다.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나.
“그럼 뭐라고 하냐? 손발 오글거리는 건 못해.”
이러고 넘어갔는데, 그 뒤로는 저장 목록을 볼 때마다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내의 별명이나 애칭은 다 장난스러운 것들이라 누가 보면 민망하고 아내가 좋아할 리 없다. 그래서 빨간 하트 한 개만 이름 옆에 붙였다.
그러고 나니 좀 허전해서, 딸과 아들 이름에는 각각 주황색과 파란 하트를 붙였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을 조작하다 카톡을 확인하던 내 폰을 본 딸내미는 그것도 가식적이고 황량하다면서 또 한 번 깔깔대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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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효과는 없지 않았다. 아내와 톡을 하다 좀 부정적인 표현이 나오려 할 때면 하트가 보여서 그냥 넘어가게 되고, 매사에 조금은 부드러워진다.
어떤 일이든 말로만 하거나 결심만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조금 더 움직여야 조금이나마 바뀐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도 미간과 손과 문설주에까지 붙이고 새기라고 하셨을 것이다. 보이지 않으면 소홀하게 되고, 상기하지 않으면 잊게 되며, 반복하지 않으면 잊히기 마련이다.
내가 저장한 이름은 나만 보는 게 아니라 당사자도 볼 수 있고, 타인들도 볼 수 있다. 어느 정도 의식하고 하는 행동일 수 있다. 무엇으로 저장했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대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또 어떻게 저장하는가는 평소 마음에 영향을 준다. 장난스럽게 하면 장난스러워지고, 무미건조하게 하면 관계 역시 건조해진다. 연락처 저장명은 물론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매사에 표현을 어떻게 하는가가 그 사람 자체와 또 두 사람의 관계를 규정하고 방향을 결정하는 법이다. 그래서 장난이라도 ‘웬수’, ‘남(의)편’ 이런 식으로 저장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다. 말이 씨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남들 앞에서 다정한 사이임을 과시하고 애정이 담긴 이름으로 저장해도, 자기만 알고 있으면 소용이 없다.
휴대폰이 본격화된 초창기 이동통신사 광고 중에는 다 큰 아들을 타박만 하고 못마땅해하는 근엄한 아버지와 늘 주눅 든 아들이 등장한다. 그러다 하루는 아버지가 없을 때 아들이 전화를 거는데, 거실에 두고 정원을 가꾸던 아버지의 폰이 울렸고, 화면에 뜬 이름은 ‘나의 희망’이었다. 그것을 보고 아버지의 진심을 느끼는 아들…, 지금 생각하면 좀 오글거려도, 나름 감동이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의 희망’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안 해주는 아빠라면, 아무리 속정이 깊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 희망을 이루어 주면 좋은 아들, 못마땅하지 않은 아들이 되니 그때부터 살갑게 대할 건가?
시간은 유한하다. 지금 표현하지 않으면 오늘 느낄 수 있고 오늘 전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지는 것이다. 내일은 아무도 기약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영원히 이대로 살 것처럼, 언제나 기회가 있을 것처럼 사랑의 표현도, 따스한 말도 다 미루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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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판에서 한때 이슈가 된 말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는 말이었다. 어떤 정치인에 대해 조용히 있으면 불이익을 당하지 않겠지만, 자꾸 나대면 좋지 않을 것이라는 권력 중심부의 경고였던 것이다. 그 정치인은 곧 잠잠해졌고,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입을 닫았다 해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을까?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지만, 정작 그 자신의 입지는 좁아지고 소신도 결기도 없는 인물로 전락했다. 그가 만들고 싶었던 세상은 더 멀어졌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에도 귀찮다는 이유로, 그저 유지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 일 없어 보여도, 둘의 관계는 점점 시들해지고 발전이 없다. 그런 상태에서 더 나은 삶과 사랑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랑하는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안정이라기보다는 불행의 씨앗일 수 있다. 가만히 두면 모든 것이 저물고 가라앉으며, 쇠퇴하는 것이 만물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물 위에 뜬 백조가 우아하게 유영하는 듯 하지만, 물밑에서는 열심히 물갈퀴를 휘저어 나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여유 있고 부드럽게 차를 모는 것처럼 보이는 운전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악셀과 브레이크와 기어를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백조도 자동차도 그래야 움직인다. 그러므로 현상 유지라도 하겠다는 생각이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가만히 있겠다는 것은 제대로 유지할 의지가 별로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지 살아 있을 때, 함께하고 있을 때 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더 좋은 시간을 앞당기고, 함께하는 세월을 보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입을 꾹 다물고 죽을 때까지 애정 표현을 하지 않다 마지막에 가서야 사랑했고, 고마웠고, 미안했다고 말한다.
그나마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지나온 긴 세월이 무색하지 않은가. 살아 있는 오늘 무언가라도 해야 한다. 사랑은 유언으로 남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매일 처음 연애하듯 거창한 것을 할 수는 없다.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실천이 중요하다.
하트 하나 붙인다고 대단한 것이 바뀌겠는가. 하지만 ‘하트’는 단순한 모양을 넘어 심장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마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바로 지금, 사랑하는 이를 부르는 말과 손짓과 눈빛에 조금만 더 마음을 담아 보면 어떨까. 그래야 좀 더 오래 행복할 수 있다.
하트 한 개는 작지만 작지가 않다. 그것이 불러올 변화는 나비효과처럼 클 수도 있으니까.
김재욱 작가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등 40여 종
https://blog.naver.com/woogy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