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웃 초청잔치(전도)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마태복음 22:1-3)”.
오랫동안 지구를 뜨겁게 달구었던 여름은 어느새 사라지고, 오색빛 찬란한 가을의 품 속에서, 파-아란 하늘은 두둥실 빛나는 구름을 싣고 이산저산을 옮겨갑니다. 바람을 따라 춤을 추는 단풍의 기쁨은, 가을의 심포니를 함께 나누는 신비스런 에덴동산의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그야말로 충만한 수확의 계절입니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많은 교회들이 총동원 전도주일, 친구 초청잔치, 잃은 양 찾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전도를 위해 노력합니다. 바자회부터 음악회, 불우이웃돕기 독거노인 위안 잔치, 체육대회 등을 열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기 위해 매일 기도로 시작하며, 작정한 전도 대상자가 교회로 나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바쁘게 움직입니다. 그 모습이 마치 천국 입성을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매년 총동원 전도대회에 대다수 성도들은 많은 부담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모습도 간간히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전도는 쉬운 일이므로, 부담을 떠안거나 두려움을 갖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두려움을 떨쳐버리려면, 우선 기도와 실천 있는 약속, 믿음으로 시작하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늘 기쁨이 충만하다면, 이웃들도 잔치에 동참할 것입니다.
작정한 전도대상자는 자신과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우선 시작해야 합니다. 그 대상자가 감동을 받을 기회를 잘 포착해,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분위기를 만들어 대화를 하다 보면, 오히려 전도가 쉽게 풀리고 큰 어려움이 없으리라 판단됩니다.
성도들에게는 전도대상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나의 부모 형제, 가장 가까운 이웃과 친구들이 지옥으로 가면 어떻게 하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전도를 통해 타락한 인생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사명감을 갖고, 회개를 촉구하는 제사장 직분을 맡은 사람으로써 최선을 다해 전도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분명 지옥은 죄인이 가는 형벌 장소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여기서 ‘두려워하는 자’는 분명 믿음이 부족한 사람일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악한 권력 앞에서 비겁한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이 영원할 것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반드시 끝이 임합니다. 최후 심판을 통해 성도들은 구원을 받고, 불신자들은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자들은 잠시뿐인 이 세상 연락에 취해, 세상이 가져다주는 기쁨이나 만족만을 추구하며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본향인 천국을 소망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위해 우선 내 부모와 형제, 이웃에게 힘써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내로 계속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아의 나라에 동참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부함으로 오히려 버린 바 되었던 많은 사람들(특히 이방인들)을 부르셔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회개와 믿음을 거부한 자들은 엄하게 심판하십니다.
5절 “돌아보지도 않고”라는 말씀은, 주인이 온갖 것을 다 준비하고 초청했으나 청한 사람들은 잔치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즉 사람들이 영혼의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현실에만 안주하여, 세상을 위한 문제에만 집착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노아 시대에도 노아는 수십 년 동안 배를 준비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 사람들은 세상의 즐거움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멸망 당시에도 롯의 아내와 사위들은 롯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참혹하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세상 환락에 심취하다 영원히 구제 받을 수 없는 나라로 갔으니, 얼마나 비통하고 원통할까요, 지금도 그 유황불이 이글 그리는 타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곳에서 신음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우리 성도들도 가장 가까운 이웃을 위해 복음을 나누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해마다 가을 중심에 빼놓을 수 없는 잔치가 있는데, 바로 혼인잔치입니다. 기쁨과 환희의 혼인잔치에는 늘 이웃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초대받은 사람은 영광이고, 최고 흐뭇할 것입니다. 기쁨의 잔치에 함께 동참한다는 것, 잊지 않고 나를 기억해준다는 것 때문입니다.
더구나 나를 초대한 사람이 특별한 잔치를 베풀 때는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그 분의 초대는 세상 기준에서 볼 때 부담이 많습니다. 아예 모르고 사는 것이 더 편할 때가 많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들은 편하고 욕망에 부합하는 생활과 율법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며 편의주의를 선택하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특히 우상에 빠져 모세의 법을 외면한 이야기가 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초대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쁘게 응답하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주신 기도, 찬양, 말씀과 성찬의 식탁인 예배를 기다리기보다, 귀찮아하고 못 들은 체 하지는 않았는지요? 오늘 말씀을 다시 묵상하며 성찰의 시간을 가져, “잔칫상을 차려 놓았으니 어서들 오셔서 잔칫상에 참여하는 즐거움으로 함께 합시다!”
하지만 초대받은 이들은 오지 않고, 다시 불렀건만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밭에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습니다. 결국 주인은 “만나는 사람들을 아무나 오라고 하라”며 악한 사람 선한 사람 가릴 것 없이 만나는 대로 초대해, 잔치 자리는 손님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시고는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고 물으니,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사실 초대를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습니다. 하나님 나라 임금이신 하나님께서 예언자들과 당신의 아들을 통해 마련하신 잔치 때, 계시록 저자는 전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양의 혼인날이 되어 그분을 위해 신부는 몸단장을 끝내자”고.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계 19:7-9)”는 기록도 있습니다. 혼인잔치 예복을 갖추는 것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잔치 예복은 구원의 신비를 누리는 것이고,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며, 예복을 갖추는 것은 사랑과 봉사와 나눔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된 사람이 되는 쉬운 방법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잔치에 참여해 사랑을 실천하며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웃 초청을 위해서는, 우선 대상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가슴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야 합니다. 무심코 형식적으로 시켜서 억지로 하는 전도는 아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어린 시절 초청잔치는 그야말로 대성황을 이뤘습니다. 교회 신자들은 비신자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됐습니다. 당시 비신자들은 교인들을 신뢰했기에, 한 번쯤 전도에 응해 교회에 한두 번씩 나오기도 했습니다.
당시 교인들은 정직했고, 이웃을 대항하기보다 포용하며, 슬기로운 용서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지금 시대와 사뭇 다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현 시대는 성도들 간 다툼과 시기 질투로 으르렁대고, 양보할 줄도 모릅니다. 좋은 것은 자신이 다 누리려 혈안이고, 친구에 대한 배려와 사랑은 어디를 봐도 찾을 수 없는 삭막한 시대로, 참으로 애가 마르기도 합니다.
이제 침체된 한국교회가 연합해, 예배 회복과 전도의 심지에 불을 붙여야 하겠습니다. 교파를 초월한 말씀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들이 사방에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저마다 ‘내 교회’만 알뜰살뜰 챙길 것이 아니라, 미자립교회와 작은 교회도 주님의 사랑으로 품어야 하겠습니다.
작은 교회도 돕지 못하면서, 비신자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것은 좀 모순 아닐까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주님 말씀 안에서 늘 정직하고 신실하며, 어떤 힘 있는 자의 권력 앞에서도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용기 있게 나아가는 성도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이웃은 나의 모습에 감동해 초청 잔치에 동참할 것입니다.
교회는 특히 사람 겉모습만 보고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누추한 차림을 더 포용하며, 그가 원하는 것들을 해결해 주려고 애쓰는 성도들이 돼야 하겠습니다.
권력가나 재력가가 교회를 찾아왔다 해서 아부한다거나 성도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비신자들보다 못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차별 없이 모두가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의 문이 쉬지 않고 열릴 것입니다.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거룩한 초대의 잔치가 되어, 복음의 문이 날마다 쉬지 않고 열릴 것을 확신합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