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성만찬과 성령을 통한 교통, 사귐, 연합
지금까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성도들과 교회에 주어지는 모든 각기 다른 측면들을 검토하여 보았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는 성령의 임재하심과 역사를 통해서 성령의 열매, 영적인 축복들, 교회를 위한 은사 등이 발휘 되어진다. 성령이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면서 살아가도록 역동적이며 지속적인 은혜의 수단들을 (means of grace) 살펴보고자 한다. 말씀과 성례들과 기도를 통해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의 교통하면서 은혜를 공급받는다. 지면 관계상 우리는 이 글에서 성도들에게 지속적으로 은혜를 제공하는 수단들 중에서, 칼빈의 성만찬 교리에 대해서만 다루고자 한다.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제공한 칼빈의 성만찬 교리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칼빈이 제시하는 성만찬의 기본 개념은 약속의 말씀과 함께,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교제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설”이라고 알려진 칼빈의 성만찬 교리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에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인격적인 확신 가운데서 영적인 사귐, 참여, 교류, 교제를 나눈다는 것이다. 칼빈은 그냥 반복적으로 치러지는 의식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으로 성만찬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서 영적인 교통, 참여, 사귐 등이라고 풀이하였다.
앞에서 설명한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의 핵심은 성만찬에 그대로 담겨져 있는 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우면서도 역동적인 교통, 사귐, 참여 등을 이루게 된다.
1)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임재하신다.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설의 핵심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의 작용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특별하게 임재하시는 가운데서, 빵과 포도주를 먹는다는 것이다. 성찬론에서 칼빈은 의미, 내용, 효과를 세 가지로 구분한다. 성만찬에 담긴 의미는 새 언약, 약속 또는 말씀에 담겨있다. 성만찬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이다. 빵이나 포도주라는 물질적 재료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빵과 포도주가 담고 있는 깊은 내용, 또는 실체가 중요한 것인데,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 루터와는 달리,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이 승천하여 하늘나라에 계신다면, 결코 빵 속으로 내려와서 그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성만찬의 효과는 영적인 임재를 통해서 지속된다.
칼빈의 신학사상에서 그리스도의 승천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승천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성만찬에 대한 바른 이해할 수 없다. 승천은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위대하심에 대한 성경의 중요한 진술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존재론적 근거에서 승천을 강조한다. 칼빈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참된 인성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입장에서 성만찬이 “오실 때까지” 영속적으로 반복됨을 강조하였고, 루터와 로마 가톨릭의 견해를 거부한다.
승천은 마지막 다락방 강화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나는 너희와 항상 육신적으로는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가르침과 일치한다 (요 14-17장). 승천은 주님의 우주적 통치권의 장엄함을 의미한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높이 올리워가시고, 구름에 가리워 보이지 않았다. 결국 땅에서 찾을 수 없는 분이 되었다(행 1:3, 고전 15:5). 그분은 지금 하늘에 계신다(행 1:9, 눅 24:51, 막 16:19). 스데반이 이 영광스럽게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고(행 7:55, 사도 바울도 그 영광을 목격하였다(행 9:3).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가 또 다른 의미로는 “실제적 임재”(real presence of Christ)라고도 표현되는데,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지상에 계실 때에 그리스도의 몸은 죄가 없으시다는 점만 빼놓고는 우리와 같았다. 육체에 주어진 공간과 시간적 제한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묵묵히 견디고 참아내셨다.
성만찬의 효과로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혜택들은 구속함과 거룩함과 의로움과 영생이며(고전 1:30), 성령의 능력으로서 주신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로 묶는 접착체이자, 띠가 된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여, 이런 유익들에 참여케 한다. 그리스도는 구원의 혜택들과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시지 않는다. 또한 그 약속들과 무관하시지도 않다. 성찬에서도 그리스도의 유익들을 받는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유익들이 존재하는 때와 장소에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 하신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지역에 국한을 받는 육체라는 점에서 지상에 계실 때에는 우리와 같은 분이셨다. 죄가 없으시다는 점만 빼놓으면 우리와 같으시다. 지금 우리가 땅에 있는 반면에, 그 육체는 부활하셔서 하늘에 계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육체가 사귐을 가지려면 접촉점을 만들어내는 연결 고리로서 “띠”(bond)가 필요하다. 따라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피와 살에 참여하려면, 성령의 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에서 그리스도와 우리를 묶는 띠를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서는 믿음이라고 하고, 그것의 원천적인 면에서는 성령이라고 했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성령은 우리에게 힘과 확신을 준다.
그리스도를 약속과 혼동해서도 안되듯이, “내용”과 “의미”를 혼동해서도 안된다. 칼빈은 혼동을 피하고, 분리도 피하면서도, 구분하고자 했다. 그러나, 실재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분명히 오늘의 개혁 신학은 이점을 매우 등한히 하고 있다.
그분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도 어떻게 땅에 있는 우리에게 참여하시며, 우리의 것이 되어 주시는가?
우리가 성만찬에서 먹고 마시는 일을 하는 동안에 예수님의 임재하심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려주셨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칼빈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서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주님이 임재하시는 가운데서 우리들은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유익들을 받게 되는 것이다. 웬델도 다음과 같이 칼빈의 영적 임재론을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진짜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우리에게 임재 한다고 말하지만, 자연적인 방법으로 임재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 말의 의미는 우리가 받는 게 몸의 실체 자체도 아니고, 그곳에서 우리에 주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진짜 자연적인 몸도 아니며, 다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몸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유익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얻는 확신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구원의 혜택들을 통해서인데,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칼빈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몸의 자연적인 실체가 주입된다는 개념을 배척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유익들을 성찬에 임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영적 실체로 간주하고서 믿음으로 그 안에 참여한다는 개념은 긍정했다....그 자신은 그리스도의 실재를 가지고 연합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었으나, 그것은 이 용어의 의미를 그리스도 자신과 그 분이 우리를 위해서 얻으신 유익들로 구성된 영적 실체로 규정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방식에 대한 칼빈의 설명은 루터의 견해와는 전혀 다르다. 루터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육체가 공간적으로 임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편재해 계신다는 주장으로 이를 입증코자 한다. 그러나 칼빈은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한 장소, 한 지역에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벌카워는 루터교나 로마 가톨릭의 임재 방식에는 그리스도의 비인격성이 문제된다고 지적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자동적으로 임재해 있게 된다. 칼빈은 무의미한 존재론적인 혼합이나, 격리된 융합을 거부한다. 그러므로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보다 분명하고 진실되게 드러낸다. “주의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에 관한 논쟁에서 루터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기대에 대한 중요성과 믿음의 종말론적 방향을 현저히 약화시켜 버리게 된다는 점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닐 것이다.... 이미 지상에 편재하신다면 종말(parusia)은 약화되고 만다.”
성례에 참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영역에만 들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작용을 하고 계시는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람들은 예식의 순서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해서 잘 깨닫지 못한다는 점을 칼빈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배 가운데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물체적인 요소를 제공하신다는 점에 특별한 중요성이 있다고 파악했다. 사실상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께서 빵과 포도주의 어느 부분에 임재하시느냐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는 것은 별로 큰 의미가 없다. 문자 그대로의 몸을 먹는 예식이 아니라라는 것이다. 이것은 루터파의 공재설에서도 전혀 설명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임재하시는 것은 저주와 파괴가 아니라 평화와 안전임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