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2003년 10월 23일) 기독교 방송 설교를 듣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하나님께 졸라야 기도를 들어 주신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 누가복음 18장 1~8절을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본문 2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도 이런 재판관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정한 재판을 위해 1심, 2심, 대법원까지 항소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한 내용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3절 말씀에 보면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원한(헬, 에크디케오)”은 “변호를 하다, 권리를 주장하다, 정당하게 다루다, 보호하다”입니다. 과부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공의의 판결을 끊임없이 요청한 것입니다. 그리고 7~8절 말씀을 통해 공의의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하고 억울한 자의 편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아직도 이방 종교인들처럼 하나님을 알라딘의 요술램프와 도깨비 방망이처럼 기도의 정성을 쏟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이방 종교와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기독교인이든 이방 종교인이든, 세상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 누구든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이 말씀은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것처럼,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모든 선과 악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섭리(뜻, 세상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를 깨닫고 그 섭리를 따라 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내 문제를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그 나라와 그 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금식도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사 58:3~9).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졸라야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알아야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사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 땅의 모든 삶은 사람 관계입니다. 그 사람 관계가 무너진 신앙인은 모든 예배가 다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마 5:23)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4)”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신앙인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요일 4:8).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율법(613가지)을 재해석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팔복으로 시작해서 모든 신앙인이 온전하여지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팔복의 주제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구약의 율법을 완전케 하는 것임을 말씀합니다(마 22:34~40). 예수님의 팔복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범죄로 타락한 인간을 새로운 피조물로 회복시키는 생명의 선언이며, 사탄에게 멸망을 선고한 선전포고입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행동방침입니다. 그 중에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12)”란 말씀을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팔복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기도의 본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졸라야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12절 말씀이 본문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성경 해석은 신구약 전체와 각 권, 그리고 단락이 잘 해석되어야 합니다. 한 절만 뽑아서 전체인 것처럼 해석하면 말씀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결론
사무엘 선지자는 백성을 위하여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많은 신앙인과 목회자들이 인간에게 필요한 문제(존재물) 때문에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강조합니다. 착각입니다. 지금 성경을 펼쳐서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 34절까지를 정독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물에 대한 기도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이 하는 종교 행위입니다. 오늘부터 기도의 내용과 제목부터 그 나라와 의를 위해 체질을 바꿔 보세요. 그리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면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곁에 저절로 다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사무엘 선지자도 존재물 때문에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를 했습니다.
필자도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 교인들과 매일 산기도, 저녁기도, 작정 기도, 전교인 릴레이 금식기도 등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쉬지 않고 했습니다. 선배들 말처럼 무릎이 소 무릎이 되도록 아내와 늘 기도로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진저리나는 가난과 고난, 육신의 질병 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는 매일 여기저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37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이런 글을 씁니다. 착각은 자유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마 15:14)”
빌립보서 4장 6~7절에서도 기도 후 하나님께서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모두가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한 삶과 기도입니다(마 5:16). 신앙인은 악의 모양까지도 버려야 합니다(살전 5:22). 거룩한 삶을 살지 않으면 그 나라와 그 의는 물론 성령 충만한 삶을 절대 살 수가 없습니다(마 5:48; 고전 3:16~17; 벧전 1:15~16). 천국의 삶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 백성들의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국제구호개발기구 한국재난구호
이사장 조성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