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기 예수의 아버지 요셉의 길과 하나님의 뜻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태복음 2:14-15)”.
요셉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이 더하시다’는 뜻입니다. 그는 커다란 호숫가 마을인 갈릴리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갈릴리는 오늘날에도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다만 고고학적 유물로 판단해 갈릴리 추정 지역을 조사한 결과, 인구 400명 정도의 작은 시골 마을이라고 합니다.
요셉은 예수께서 12살 곧 성인이 될 때까지 후견인으로서 사명을 담당했습니다. 그 후로 요셉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참으로 안타깝지만, 이 모두는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거기까지만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짧은 세월 속에, 구주의 보호자로서의 사명을 담당했던 인물입니다.
우리 세대의 어린 시절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한 나라의 임금과 다름 없었습니다. 식사 시간에 아버지의 밥상은 늘 따로 차려졌고, 식사 중 아버지의 훈계는 정말 엄숙하고 무서웠습니다. 특히 아버지의 말씀 한 마디는 법 자체였습니다. 반드시 지켜야 했고, 어길 경우 심한 꾸중과 매질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무섭던 아버지는 월급날이 되면 자상한 아버지로 돌변합니다. 저녁 퇴근 때 술이 거나하게 취해, 노란 봉투를 꺼내 용돈을 나눠줍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아버지는 짠빵이나 도너츠, 찹살떡이나 과자를 사오셔서 식구들에게 나눠주십니다. 그렇게 엄하시고 무섭던 아버지의 입가에 미소가 흐르며, 자녀들의 어깨와 머리를 쓰다듬으시던 그 때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하지만 노란봉투를 들고 오시던 모습이 사라진 후, 가정에서 아버지의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것 같습니다. 가족들을 향한 충고는 잔소리로 받아들여지고, 점점 말 안 통하는 꼰대로 보이면서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가끔은 힘들게 버텨온 노동의 수고로움을 몰라주는 것 같아 섭섭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가장의 무게가 힘들게 느껴질 때, 마리아의 배필이자 예수의 아버지이자 가정의 보호자였던 요셉의 신심을 떠올려 봅니다.
같은 입장에서 요셉에 대해 동질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구원을 위한 보호자의 사명을 묵묵히 실천했습니다. 약혼자의 임신, 이집트 피난의 고난 등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오롯이 천사가 전한 하나님의 뜻을 믿고 그대로 따랐음을 우리는 신뢰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란 이름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가족들을 믿고 지켜봐 주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는 죄 많은 나를 지켜보시며 착한 아들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십니다. 아마 오늘의 주인공인 예수의 아버지 요셉 역시 자상하면서 엄한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마태복음 1장 8절에서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은 남자와 여자가 약혼을 한 후 일 년 동안 서로 만나지 않고 떨어져 지내던 것이었습니다. 약혼 후 결혼까지의 기간은 여자의 순결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 아이가 잉태된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아주 큰 사건입니다. 먼저 마리아 편에서 생각해 보면,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9절에 보면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라고 했습니다. 이는 조용히 파혼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주의 사자는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부릅니다.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메시아에 대한 징조의 확인입니다.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약속은 재림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징조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재림을 하셔야 하는지를 완전히 잊고 사는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1장 24절 말씀을 보면,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아내인 마리아를 데리고 옵니다. 요셉은 명령에 순종합니다. 이것이 요셉의 의로운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곧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재림의 메시아에 대해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 징조를 볼 때,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 즉각 순종하여, 아기 예수와 아내인 마리아를 데리고 머나먼 이집트로 향합니다. 가는 길 동안 모진 추위와 더위, 그리고 사나운 짐승들을 만났지만, 오롯이 아기 예수와 아내인 마리아를 지키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참고 견디며 무사히 임무를 마칩니다.
예수께서 12살이 되셨을 때 회당에서 있었던 일을 목격한 후, 아버지 요셉에 관한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요셉은 참으로 불쌍합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성년이 되기까지 가정의 보호막으로서 사명을 마친 요셉을 볼 때, 우리 생각으로는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요셉의 의로운 행동을 하나하나 짚어보며, 하나님의 뜻을 아로새겨 봅니다. 아버지의 뜻은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시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은 무겁고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무거운 율법의 짐을 벗기시고,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를 모르는 사역자들에게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거창한 그 무엇을 행하고 바쳐서 열심히 섬기기를 원하고 요구하는 두려운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거창하고 무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지 않고 행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을 통하여 나타난 풍성하신 그 은혜를 맛보며,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신 언약의 말씀을 중심으로 믿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에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나 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에게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고백 자체가 잘못이란 말은 아닙니다. 로마서 10장 9-10절에 의하면, 오히려 입술의 고백을 믿음의 완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잘못은 ‘하나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입으로만 믿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여부는 살아계신 구원의 주를 믿는 개인의 신앙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개인의 신앙은 공적 고백을 통해 확증됩니다. 고백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고, 신앙 없는 고백은 거짓입니다.
어느덧 2023년도 달력 두 장만을 남기고 있는 11월입니다. 곧 다가올 주님의 탄생을 맞이할, 차가운 겨울이 점점 다가옵니다. 산과 들은 단풍들과 낙엽들로 가득 메워지고, 하늘에서는 기러기떼들의 노랫소리가 점점 크게 울러 퍼집니다.
가을은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게 만드는 신비스런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보여주는 요셉의 의로운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인식하며 묵상하고 실천하는 사랑의 열매가 아닐까요?
요셉은 비록 미천한 목수 또는 잡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세상적으로 볼 때 별볼 일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그릇의 기준은 세상과 전혀 다름을 배우게 됩니다. 천한 직업을 가진 요셉이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다윗의 자손이며, 민족을 구하고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아버지로서 어린 예수의 보호자 사명을 묵묵히 실천한 인물입니다.
겉으로 화려하지 않고 남들 보기에 누추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오롯이 선한 믿음의 소유자들을 일꾼으로 찾고 계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거나 자신의 판단과 의지대로 움직이는 자는 결코 하나님께서 찾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웃을 위한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 거침없이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종교개혁 506주년을 맞이하여, 오랜 세월 인내하며 기독교 부흥을 이끈 분들의 노고에 위로를 전해드립니다. 묵묵히 주님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많은 인내로 주님의 거룩한 사역을 위해, 조급함 없이 하나님 뜻대로 고요한 희생을 나눴던 요셉의 믿음을 본받아, 감사함으로 이 땅에서 변치 않는 개혁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