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겸손한 섬김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태복음 23:10-12)”.
성경 속 섬김이란 겸손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 하나님을 부모로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뜻을 받드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랍비, 아비, 지도자 등은 종교 지도자에 대한 칭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칭호를 사용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바리새인들 사이 행해지고 있던 종교적 특권과 계급이 우리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경고의 말씀은 교만한 마음에서 그러한 칭호를 추구해서는 안 되고, 최고 권위를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인 종교 지도자들이 차지하려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신앙이나 능력에 있어 큰 자가 있음을 일단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큰 자가 여러 가지 칭호로 높임 받고 특권을 누리려는 것은 금하셨고, 오히려 그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그들은 오늘날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에서 지도하거나 가르치는 사명을 감당하는 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충실한 율법 해석자들이지만, 그 율법의 충실한 실행자들이 되지 못하기에 결과적으로 위선자일 뿐 아니라 위선을 가르치는 자들이라고 증언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말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마 23:3)”.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들임을 인정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가르침에 따라 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철저히 경계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서기관들이 처음에는 율법을 필사하는 일을 맡았으나, 성전 재건 후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되면서 ‘모세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이들은 입법자 또는 백성의 재판관으로 모세의 후계자 자리를 꿰차고, 종교적 권위를 쟁취하여 교만하게 행사한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열심과 신심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특정 행위나 태도들이 실상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와 칭찬을 받기 위한 허영심에서 가짜로 행세한 것입니다. 위선은 항상 겉치레와 허영과 결속돼 있어, 선하고 참된 것이 없으면서 내면에 들어있는 거짓, 허영, 자만, 비열 등을 가리기 위해 장식과 포장 등 외적인 부분들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외모를 중시하는 이들도 그 일부는 자신의 속이 비어 있음을 감추려는 몸짓 아닐까요? 위선적 태도와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야심에 사로잡힐 위험은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지도자이시라는 평등의 원칙을 주장하면서도, 분명히 교회 안에 남은 권위의 원칙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는 권위가 봉사의 차원에서 이행돼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권위가 지속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게 하려면, 백성이나 공동체의 구성원을 위해 봉사하는데 권위를 사용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 23:11)”.
섬기는 자가 다스리고, 그 섬김이란 진실로 형제들을 위한 애정과 선의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합당한다는 것이 오늘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겸손한 봉사자만이 진정한 권위를 가지며 남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권위자는 하나님과 깊은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면 위선도 사라질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나 남을 가르치는 이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와 결점, 나약함까지 인정하고 사람의 눈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시선으로 옮겨갈 때, 비로소 위선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사소한 문제로 시비가 붙어 큰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비신자들 보기에도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이 때문에 오히려 복음 증거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 안타깝습니다.
이 모두는 쓸데없는 자존심과 명예 때문에 주님께서 그렇게도 당부하시고 부탁하신 권위를 자신의 이익에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참으로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비우고 내면에 있는 깊은 겸손으로 이웃과 함께할 때, 이웃은 당신을 존경하게 되고 당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만나려 할 것입니다. 내가 좀 더 잘산다고, 내가 재능이 더 있다고, 내가 더 잘생기고 덩치가 좋다 해서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약한 자를 괴롭힌다면, 권위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쓸데없는 권위가 판을 치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 때문에 많은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며, 섬김의 자세가 매 말라 세상에까지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치인들도 국민을 섬기는 일 대신 오롯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만한 거짓말과 사기, 폭행과 추행을 일삼고 있는데, 이는 교회의 책임도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산 덕천동의 어떤 교회는 성도들을 섬기지 않고, 자신의 뜻과 다르다며 수백 명의 성도들을 쫓아내고도 지금까지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웃을 섬긴다는 구호를 부여하는 것을 과연 묵과할 수 있을까요?
‘섬김의 자세’라 함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는 예수님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세상의 가치관을 뒤바꾸는 혁명적 가치관이 내재돼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남을 지배하는 자를 높이 평가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타인을 섬기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위대하게 보십니다. ‘섬기는 일’은 비록 비천해 보이지만, 거기에 놀라운 힘이 있음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권력의 힘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그들은 늘 개혁과 쇄신을 단골 메뉴와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오히려 변하는 것처럼 하다가도 반동에 의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희생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감동을 받고 변화하게 됩니다.
대속은 ‘푼다’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 동사인 ‘루오’에서 파생된 단어로, 포로를 구출하기 위한 대가를 뜻합니다. 이 용어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죄의 노예 상태에 있던 인간을 구원하신 ‘구속’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지배욕이란 자신의 계층에서 올라가려는 인간심리, 지지 않으려는 경쟁심리, 승부욕과 자존심을 세우는 욕구 등을 말합니다. 이 때문에 세상은 바람 잘 날 없으며, 이렇듯 세상의 방식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지배적이고 강력하며 위협적이고, 보다 더 요구함으로서 앞서는 자가 되는데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당하실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시고 그 성취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순간에도, 제자들은 주의 나라 곧 ‘메시아 왕국’을 오해하고 서로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주의 나라’의 특징이 ‘섬김과 겸손’에 있고, 스스로 죄인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섬김의 모범을 보일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가을은 더 깊숙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도로 옆 길가에는 코소모스가 바람에 못 이겨 살랑살랑 춤추며, 들에는 농부들의 숨가쁜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산에는 초록 빛과 황금빛, 붉은 빛들이 어울려 조화를 이룹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오늘도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자연의 섬김을 배웁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시간을 할애하며, 성도로서 온전히 말씀을 중심으로 살고자 최선을 다해 섬긴다면, 주님의 음성은 귓가에 포근한 음성으로 들려올 것입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