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의 의미는 ‘너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라’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거기서에서 출발하여 진리를 탐구하라”는 뜻입니다. 이 명언은 델파이에 있는 아폴로 신전에 경고문으로 쓰여진 문구입니다. 그러나 실제 이 말을 세상에 알린 사람은 소트라테스가 아니라 플라톤이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의 메시지는 단순한 조언이 아닙니다. 단순한 윤리적 가치를 훨씬 뛰어넘는 ‘경고’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난주 칼럼에서 출애굽기 20장 7절 말씀을 인용해 ‘망령’이란 무엇인가를 언급했습니다. 바꿔서 말씀드리면 ‘착각’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착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착각은 자유다’입니다. 성도로서 자신의 신분을 모르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산다면 그것이 착각 중의 가장 큰 착각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성도와 관련된 구절이 90절이 넘습니다. 구약에서 ‘성도(하씨드)’는 경건한, 선한, 거룩한 자, 자비로운 자로서 신앙심이 깊고 충실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성도(하기오스)’는 신성한, 순결한, 결백한 자로서 하나님께 봉헌된 가장 거룩한 자들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믿음(피스티스)’은 진리에 대한 확신, 충성, 충실, 성실로써 구원에 대한 신뢰와 성경 말씀에 대한 확신과 충성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막 11:22)” 만약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내일 일을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대다수 신앙인들이 건강에 대한 염려, 노후에 대한 염려, 자녀들에 대한 염려 등 세상 사람들이 끌어안고 사는 염려를 똑같이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염려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마 13:22)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여기서 ‘권고(멜로)’는 하나님께서 관심으로 돌보신다는 의미입니다. 팔복에서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2)”고 말씀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어느 개척교회 목사님과 잠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요즈음 교회의 상황들은 어떻습니까?” “교회 부흥과 전도는 생각조차 할 수도 없습니다. 나오던 성도들이 하나둘 떠날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습니다. 친구들과 앉기만 하면 은퇴 후 살아갈 주택에 대한 염려, 특히 은퇴 후 노후에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큰 대화 주제입니다.” 매우 가슴 아픈 시간이었습니다. 설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사랑의 종교입니다” “염려하지 맙시다” 등입니다. 그런데도 믿음 없는 말을 생활 속에서 수없이 듣게 됩니다. 아가페 사랑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온갖 염려는 다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이방 종교인들과 무엇이 다를 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백부장에게 하신 말씀이 오래 전 필자도 레마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마 8:13)” 믿음은 생각이 실체가 됩니다. 이런 말씀을 제자들과 제사장, 선지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군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결론
지난주 칼럼에서 ‘망령’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신앙인을 의미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즈음 TV를 보면 노래와 관련된 선발 프로그램이 많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천재성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어 보면 가슴이 뭉클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를 위해서 결혼을 하지 않고 살겠다”고 하는 아이, 일찍이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살면서 성장해 “그 할머니를 행복하게 해 드리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는 철부지 아이, 어머니가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홀 서빙을 하면서 “그 어머니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소원”이라는 아이들은 모두가 효녀, 효자들입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저 나이에 할 수 있을까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필자는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저렇게 믿으면 안 될까?” 뒤를 돌아보게 합니다.
대속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까? 성도의 신분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까? 만약 대속의 은혜를 진심으로 깨닫게 되면 이방인 같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지옥 갈 사람을 전도해 천국을 알게 해 준 생명의 은인이 있다면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4)” 자기 기분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망령된 신앙생활을 벗어 버리고 이 땅에서 성도답게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모든 분이 되시길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국제국호개발기구 한국재난구호
이사장 조성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