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칼럼] <전라도 천년사>, 신앙의 눈으로 보다
“백제가 660년 멸망했을 당시 많은 피난민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그 중에 기독교인이 많았다.”(富山昌德, 『日本史 中의 佛敎와 景敎』, 東京大出版會, 1969, 46-47>)
역사, 승자의 기록
역사는 주로 승자의 기록이 기준의 틀을 제공한다. 기록을 남긴 승자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과장하거나 구성하고, 패자들 역사는 말살·축소, 왜곡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주변 국가들을 동이, 서융, 남만, 북적, 흉노 등 고약한 이름을 붙여 폄훼, 왜곡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다.
기록이 빈약한 삼한 역사나 600년 가까이 지속한 가야 연맹, 그리고 패망한 백제 역사의 진실을 추적하는 어려움은 여기서 발생한다.
<전라도 천년사> 논쟁의 진퇴양난
5년 이상 24억 원을 들여 관련 학자들이 집필하고 3만 부를 인쇄했다는 <전라도 천년사>가 1년 넘도록 반포조차 되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진퇴양난이다. 핵심 논란은 주로 고대사 부분 논쟁 때문이다. 기문국, 반파국, 침미다례 등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한반도 지명을 가지고 친일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집필진 주장을 들어보면 전문가와 비전문가 간의 갈등으로 보이기도 하고, 명성 있는 역사학자요 작가인 이덕일 박사의 주장을 보면 강단(친일)사학자와 민족사학자 간의 충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제 학문적 논쟁을 넘어 감정 싸움으로까지 번져, 수습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결국 관련 대학원생들까지 나서 ‘전라도 천년사에 대한 선동과 왜곡을 멈추라’고 대응하고 나섰다. 전국 11개 대학 역사학·고고학 전공 대학원생 128명은 성명을 내고 ‘국내 연구진의 노력과 연구 성과를 외면한 선동과 왜곡을 멈추라’ 외치고 있다.
호남의 마한 문화
필자는 <전라도 천년사> 고대 부분 논지는 전라도 역사가 백제 영향 속에서도 오랫동안 독자성을 유지해 왔다는 문화적 자부심을 드러내려는 과정에서 일부 무리한 표현들이 동원되면서 갈등이 표면화되고 촉발되었다고 본다.
특히 호남에서 주로 발견되는 장고형 고분(일명 전방후원분형 고분)이나 옹관 문화 등은 백제보다 주로 마한 문화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글로벌 다문화 국가, 백제
서울 송파 올림픽공원에 있는 한성백제박물관은 백제 4세기 13대 근초고왕을 “백제를 해양왕국이요 다양한 외국인들이 찾아온 글로벌 다문화국가로 이끈 위대한 군주였다”고 소개한다. 백제가 지정학적 위치상 대단히 열린 나라요 국가 융성을 이끈 근초고왕 시절부터 이미 해양으로 빠르게 진출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백제의 문화적 수용성에 주목한다. 도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 등이 당나라 수도 장안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백제는 종교에 있어서도 고구려나 신라와 조금 다른 수용성을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富山昌德(『日本史 中의 佛敎와 景敎』, 東京大出版會, 1969)의 기록이 그것을 말해준다. 당의 수도 장안에 선교사 알로펜 일행이 도착한 이듬해인 선덕여왕 4년, 당의 사신이 신라에 도착한 기록이 있다. 이후 수많은 신라 사신들과 상인들과 유학생들이 당에 드나들었으니 신라 사람들이 경교를 몰랐을 리 없다.
일본 《續日本書記》 〈성무천황기〉에도 783년 당나라 사람 황보(皇甫)가 경교 선교사 밀리스(Millis)를 동반하여 천황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열린 해상 국가 백제에도 당연히 기독교와 이슬람인들이 항구도시였던 백제 수도를 오갔을 것이다. 하지만 패망한 국가의 문화가 위축되거나 소멸되었음은 안타깝기는 하나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역사 왜곡이 일어난다.
백제의 흔적들을 남긴 백제 유민들
패망한 국가의 진면목을 발굴한다는 것은 여전히 난해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수수께끼의 대륙 백제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백제는 멸망 당시 당과 열도로 수많은 백제인들이 흩어지면서 흔적들을 남겨 놓고 있다. 묘지석과 가져간 서책과 백제 문화가 그것이다.
당나라 왕족의 왕비가 된 의자왕의 증손녀도 있고, 흑치상지 장군도 여전히 당나라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열도에 남겨진 무수한 흔적은 일본 역사박물관을 다녀본 한국 사람이라면 실감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토인비는 명저 「역사의 연구」에서 세계 문명 공동체를 나누면서, 한일 민족을 함께 취급한다. 두 민족의 주류는 결국 넓은 대륙에서 만주를 거쳐 반도와 열도에 정착한 유목민들의 후예였다는 점에서 거대사적으로 틀리지 않은 견해다.
2천 년 전 전후 단군 설화를 지닌 집단은 반도를 거쳐 꾸준히 열도로도 유입되었다. 가야를 포함한 한반도 4국 백성들도 지속적으로 열도로 진출하였다.
특히 백제 유민들은 야마토왜(大和倭) 정권을 세워 고대 일본의 시작을 알렸다. 일본 태생 백제 무령왕과 일본 게이타이 천황이 형제(또는 사촌) 지간일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 두 왕실 집단 간의 친연성을 암묵적으로 증거한다.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가 일본 역사는 뒤로하고 한반도 백제 역사를 상세히 다루고, 특히 일본 출신 무령왕의 아들 성왕을 성명왕(聖明王) 또는 명왕(明王)이라고 칭송하며 신사(神社)에서까지 받드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일본 역사서가 백제 성왕의 허무한 죽음을 애석해 하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신라·당 세력과 백제·왜 세력 간의 백촌강 대전투 이후 한반도와 열도는 드디어 완전히 분리되었다. 백촌강 전투 이후 663년 9월 백제 땅 주류성(州柔城)이 마지막으로 함락되었을 때 《일본서기》는 야마토왜(大和倭), 즉 나라(奈那)의 ‘난바’(難波) 사람들의 심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주류(州柔)가 함락되었으니 이제 어쩔 도리가 없게 되었구나. 오늘로서 백제라는 이름이 끊어졌으니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곳을 어찌 다시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라고 탄식한 것이다.
지금의 오사카 중심지 ‘난바’는 고대 백제인들의 새로운 나루터(難波津) 이름이었다. 심지어 일본 <고사기>(古事記)에 나타난 천황가의 일본 황실 조상 귀신(鬼神)인 아마데라스 오오미가미(天照大神)의 손자인 니니기노미고토(瓊瓊杵尊)의 천손(天孫) 강림 신화에도 보면 “이곳이 한국을 바로보고 있으니 큰 길지(吉地)”라 하여 일본 천황의 원적(原籍)이 한국임을 분명히 하면서 고향 한반도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백촌강 전투를 기점으로 반도와 열도는 다른 나라가 되어 버렸다. 필자는 수년 전 일본 오사카 역사박물관이 전시실 입구에서 백촌강 전투부터 보여주는 것을 보며, 의미심장한 복선이 있는 장면으로 느껴졌다.
재일교포 출신 수학자로 한일관계사 전문가였던 故 김용운 교수(한양대, 수학)는 한일 양국은 인종적으로 같은 족속으로 시작되어 2천 년 역사 과정에서 같은 씨에서 다른 꽃이 핀 (애증의) 두 나라라 했다. 마치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처럼. 결코 서로를 배려하고 용서하려 들지 않는 이 두 나라를 어찌할 것인가.
일본이 자랑하는 만엽집도 마찬가지다. 열도에 다양한 문화를 전한 백제는 향가나 만엽집같은 시가가 없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일본과 중국 등 문학 비교 연구가 주 전공이던 일본 나카니시 관장은 『만엽집』이 한반도에서 넘어간 백제인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장르라는 설을 처음 제기했다.
나카니시 관장은 1980년대 『만엽집』 3대 가인 중 한 명인 야마노 우에노 오쿠라(660-738)가 백제인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해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백제에 흔한 성씨인 ‘옥’에, 한국식으로 ‘OO아~’ 부를 때 뒤에 붙는 ‘아’가 ‘라’로 변형되어 붙으면서 ‘오쿠라’로 알려진 것”이라며 “한반도에서 벌어진 백촌강 전투(663) 이후 많은 백제 지식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일본 문화가 갑자기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기가 왔다”고 했다.
‘백제 도래인설’ 제기 이후 『만엽집』에 실린 시와 신라 향가의 유사성을 밝힌 연구 결과도 발표한 그는 “『만엽집』을 만든 건 외래문화의 에너지”라 했다.
일본 정서의 뿌리로도 불리는 『만엽집』은 2019년 새 일왕 즉위와 함께 새 시대 이름을 정한 토대가 되기도 했다. ‘레이와(令和)’는 ‘명령 령’에 ‘화합할 화’를 붙인 단어로, 만엽집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나카니시는 이 말이 영어로 ‘아름다운 조화(beautiful harmony)’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이영희·김영회, 재야(在野)에서 일본서기 해석과 한일관계사 복원을 시도한 김인배(金仁培)·김문배(金文培) 형제 등이 만엽집 연구로 주목받아 왔다. 『만엽집』 해석이 일본 학자들보다 오히려 한국의 관련 학자들에게 더 용이하다는 게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백제 역사서를 중심으로 백제 후손이 서술한 일본 역사서
<일본 서기>도 마찬가지다. 한국사와 관련한 내용 상당수는 백제인이 일본으로 가지고 간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등 백제 측 역사서에서 비롯됐다. 백제는 근초고왕 당시 일찌감치 고흥이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한 바 있다.
해방 후 한국 역사학계가 <일본서기>에 담긴 백제 측 역사서와 역사상을 복원하고자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학계는 왜 임나일본부설조차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을까? 필자는 ‘나무’라는 실증사학에 빠져 학자들이 거대사적 ‘숲’을 보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류가 아닌지 자문해보고 싶다.
<일본서기> 초반부는 일본 학자들도 파악이 불가능한 신화로 가득찬 책이다. 그런데 제 1권 神代 上을 보면 필자는 일본 신화가 아닌 고조선이나 가야(신화 속 인물)나 신라(이즈모 등 지명)와 관련된 단어들이 수수께끼 속 힌트처럼 박혀 있는 책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 힌트 가운데서도 백제의 담로(擔魯)를 음차한 담로(淡路)라는 말이 요소요소마다 9번이나 등장하는것은 범상치 않다. 서기의 저자는 담로라는 말을 달가와하지 않는 神도 있어 담로를 담로가 아닌 ‘아와지’라 불렀다 했다. ‘담로’라는 말을 달가와하지 않는 세력들도 있었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신대 상 전문 속 핵심 단어는 분명 ‘담로’였으니, 고조선, 가야, 신라, 백제 등 반도 세력이 세운 일본 중심 귀족 세력은 담로의 국가 백제임을 밝히고 있다 볼 수 있다(이나리야마 칼이나 에다 후나야마 고분 출토물들도 이것을 증거).
‘임나일본부’에서 ‘임나백제부’로
강단사학자들이 친일의 둘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놓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일 것이다. 즉 틀과 구조를 깨지 않는 상황(이마니시 류나 이병도 박사가 세운 <일본서기>와 임나일본부) 속에서 최선의 답을 찾으려 하니, 이상한 답이 도출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백제 출신 당나라 망명객의 묘지에조차 ‘일본’이라는 말은 본래 백제를 지칭하고 있음을 살펴볼 때, 필자가 보기에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는 ‘임나백제부’로 보면 대부분의 수수께끼 같은 고대사의 실타래가 술술 풀린다고 본다. 일본이라는 말조차 열도에 공식적으로 없던 시절, 어떻게 ‘임나일본부’가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가야가 백제와 가까웠던 이유나 가야가 한때 백제의 담로로 편입된 지역도 있었음을 감안할 때, ‘임나백제부’를 일본 중심의 ‘임나일본부’로 바꾼 백제 역사서들을 참고한 <일본서기>의 백제 출신 저자(?)의 고충이 이해가 간다. 즉 언젠가 반도의 백제 후손들이 이 수수께끼를 충분히 풀어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집필한 책임이 <일본서기> 초반부 곳곳에서 눈에 띤다.
즉 제철기술도 없고 문화적 기반도 없었던 삼국 시대 열도 세력이 한반도를 경영했다거나, <만엽집>처럼 문화적 강국이었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어불성설일 뿐이다. 이 문제는 일본을 백제로 치환하여 해석하면 대부분 정리될 수 있다.
<일본서기>를 쓴 백제계 인물이 반도 속 미래의 현자(賢者)에게 기대한 속마음이었을 것이다. 이제 사학계는 <전라도 천년사>를 계기로 이마니시류나 이병도의 친일사학을 확실하게 정리할 때가 되었다.
<전라도 천년사> 논쟁은 양보 없는 감정 싸움으로 번졌기에 어떤 결론이 나든 해결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진퇴양난이다. 하지만 거대사적 관점에서 열도에 불교든 한자든 천자문이든 다양한 문화들이 주로 백제를 통해 넘어간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과거 항구도시였던 한성 백제, 공주, 부여로 이어지는 백제 수도들의 열린 문화 덕분일까? 호남은 지금도 한반도에서 어느 지역보다 가장 복음화가 잘 이루어진 고장이다.
이 글로벌화된 수용성 문화는 이슬람인들이 통일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 시대 세종대왕 때까지도 수도 주변에 기거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으니, 이슬람보다 600년 일찍 복음 전파에 헌신한 그리스도인들도 당연히 반도에 입성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아마 경교와 인도의 사도 도마 계열 선교사들이었다고 본다. 이 열린 빛고을의 정신으로 <전라도 천년사> 논쟁 문제도 바른 진실을 찾아가는 건전한 학문적·역사적 민족 기원 연구에 변곡점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조덕영 박사
<성경과 우리 민족 기원> 필자, 작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