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장로교총연합회 제41회기 출범 비전 세미나 강연 원고
5. 장로교회의 정체성: 천국의 열쇠
장로교회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마태복음 16장 19절에 나오는 “천국의 열쇠”에 대한 해석을 근간으로 삼는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주님께서 오직 사도 베드로에게만 열쇠를 주셨고, 로마에 있는 베드로의 후계자가 모든 교회를 치리한다고 주장한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수위권 해석에 반대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초대교회의 중요한 사도들이 모두 모여서 함께 결정적으로 중요한 신학적 토론을 하는 예루살렘 총회와 그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간단히 압축해 풀이하자면, 천국의 열쇠는 베드로로 대표되는 사도들, 그리고 훗날 사도직의 계승자로 사역하게 되는 교회의 직분자들, 감독들, 장로들에게로 확장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칼빈은 교회의 권세라고 하는 것이 교회 자체의 조직 안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칼빈은 교회에 주어진 권세는 “지역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회의”에 속한 것이며, 세속적인 권세와는 달리 오직 영적인 성격이라고 주장했다. 테오도르 베자도 역시 칼빈의 해석에 따라서,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주신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장로교회가 회중교회에 대한 반대의 논리로 제시한 성경 말씀은 마태복음 18장 18절이었다.
교회를 세우신 그리스도의 목적에 따라서, 말씀에 따라서 기능하는 네 가지 직분자들을 소개했다; 교사, 목사, 장로, 집사이다. 특별히 지역 교회에서 설교하는 목회적 직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도들의 직무를 이어받아서 목사들이 영광스러운 말씀의 설교를 담당하기 때문이다. 교사는 오늘날의 신학교수를 의미하는데, 구약시대의 선지자처럼 믿는 자들 사이에서 전체 교리를 지키는 직무를 감당하는 유익을 준다고 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장로교회 제도를 지지하지 않는 소수의 주장을 놓고서 개회 초반에 거의 여섯 달을 소진해야만 했다. 회중제도를 옹호하는 토마스 굳윈을 비롯한 독립파 회중교회의 지도자들이 제기한 해석을 놓고서 토론을 거듭해야만 했다. 현실적으로 “베드로”는 과연 누구를 대표한다는 것인가? 평신도 장로가 포함된 당회, 노회, 총회인가? 아니면 열쇠는 우주적 보편교회에 주신 것이라서, 모든 성도들을 포함해야만 하는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마태복음 18장 18절과 28장 18-20절에 근거해서,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주신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했던 신학자들은 절대 다수가 장로교회에 속해 있었지만, 청교도 혁명를 위하여 함께 전쟁에 참여하고 있던 회중교회에 대해서도 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장로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또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를 전세계 교회가 따라가듯이, 잉글랜드 전체 교회가 장로교회 총회 산하에서 하나의 국가체제처럼 운영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회중교회와 독립교회에서는 이에 반대하여, 천국의 열쇠를 시행하는데 있어서는 모든 성도들이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장로교회의 체제에서 일반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 측면이 고려된다; 능동적으로 교회의 직분자들을 선출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고, 수동적으로는 직분자들의 치리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1640년대의 잉글랜드에서는 국왕과 캔터베리 대주교가 주교제도를 통해서 장악하고 있던 국가 교회 체제를 개혁하려는 열망이 청교도 혁명으로 분출되던 시기였다. 잉글랜드 청교도들은 보다 더 합당한 교회의 자유와 독립적 치리를 추구했었고, 성공회의 주교제도에 맞서서 장로교회와 회중교회, 독립교회와 침례교회 등이 각각 활발하게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구성해 나가고 있었다.
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칼빈과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지만, 결코 유럽의 종교개혁을 무작정 복사하거나, 앵무새처럼 암송한 것이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절대적인 권세를 장악했던 국왕 통치하에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청교도들의 시대와 상황이 전혀 달랐기 때문에, 보다 더 섬세한 대안을 제시하여야만 했다.
1640년대는 유럽에서 정통개혁주의 신학의 절정기였고, 뛰어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로마 가톨릭과 알미니안주의와 쏘시니언주의와 반율법주의에 맞서서 첨예하게 개혁교회를 세우고자 노심초사하던 시기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기간(1643-1653) 동안에, 성경적 “교회 구조와 체제”를 모색하는 것, 즉 교회론의 정립은 순수한 교회의 건설을 위해서 진력했던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사항이었다.
청교도들은 성경적인 해석에 기초해서 순결한 교회의 운영체제를 구축하고자 노력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천국의 열쇠들”(마 16:19)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매우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과연 이 “열쇠”(the Key of Kingdom)라고 하는 것이 오직 수제자 베드로에게만 주어진 것이고, 그와의 연관성을 맺고 있는 후계자들에게 이어져 오는 것일까?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교회의 주교에게로 계승되는 것인가? 이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철저히 주장하고 있는 입장이다. 그들은 로마 바티칸 대성당의 천정에 이 구절을 새겨놓았다. 다른 성경 구절보다 이 구절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청교도 시대의 회중 교회에 의하면, 교회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가 주신 것은 모든 교회의 회원들을 다 포함해야 하는 것이기에, “열쇠”의 의미는 “권한” 또는 “권능” “능력”이라고 해석했다. 회중교회에서는 보다 더 나아가서 사도로 대표되는 교회, 즉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각자가 처한 정치적인 상황과 교회론에 관련된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적인 견해가 함께 결부 되어져 있었다. 1643년부터 잉글랜드 내의 장로교회와 회중교회 사이에는 내적으로 교회론에 대한 차이점을 놓고서 치열한 논의가 있었다. 에드먼드 캘러미는 강력하게 장로교회 제도를 주장했고, 런던지역 회합에서는 책자를 발간했다. 존 오웬과 토마스 굳윈이 회중교회 제도의 옹호자로 변하게 된 것은 당시 정치적인 상황의 변화들과 1642년에 나온 존 코튼의 교회정치에 관련된 여러 편의 저서들이 끼친 영향력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청교도 혁명이 성공한 후, 1647년 완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0장과 31장에는 기본적으로 교회의 정치 제도가 규정돼 있다. 먼저 세속 권력이나 군주로부터 교회의 독립성을 강조한다. “교회의 왕이자 머리이신 주 예수님은 교회의 직분자들의 손에, 세속 군주들로부터 독립적으로, 통치를 맡겨주셨다.” 그리고 교회의 덕을 세우고, 보다 나은 통치를 위해서, “대회, 혹은 총회”라고 부르는 모임을 가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더 이상의 상세한 운영지침은 생략했다. 장로교회와 회중교회 지도자들 사이에는 전국 총회에게 최종 판결권을 줄 수 있느냐를 놓고서 격론을 벌였기 때문이다. 다수를 이루고 있던 장로교회에서는 전국총회의 치리적 권위를 가장 중요한 핵심 내용으로 강조하면서도, 이에 격렬하게 반발하던 회중교회를 고려하여 정확한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회중교회에서 주장하는 해석은 무엇인가? 각 독립된 교회의 자율권을 강조하는 회중교회에서는 이 “열쇠”가 지역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모임이며, 각 교회 자체 내에서 모든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회중교회는 교리와 행정과 재정에 관해서 결정할 때에 모든 구성원들이 투표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참여한다. 이러한 제도는 회중교회만이 아니라, 수많은 재세례파 교회들, 침례교회, 독립교회들이 채택하였던 방식이다. 그와는 정반대되는 교회체제로서는 감독제 주교정치가 있는데, 로마 가톨릭, 동방정교회에 속하는 다양한 형태의 국가교회들, 잉글랜드 성공회, 감리교회, 슬라브 정통교회 등이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의 제네바 교회 모델을 따르는 개혁교회와 존 낙스의 장로교회에서는 목회자와 장로로 구성되는 노회와 총회라는 지역을 초월하여 치리하는 기관을 최고 권위기관으로 결정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소집된 첫 해를 대부분 교회조직에 대해서 논쟁을 거듭하였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1장에서 전체적인 원리와 보편적 기준을 제시했다.
제31장 대회와 협의회(Of Synods and Councils)
1. 더 나은 교회의 정치와 건덕을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노회나 총회로
불리우는 모임들이 있어야 한다 (행 15:2, 4, 6). 교회의 감독자들이나 개교회의
치리자들은 교회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굳게 세우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직책과 권한으로 이런 집회를 결정하며(행 15),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대로 자주 소집할 책임이 있다(행 15:22-23, 25).
2. 노회와 총회는 신앙에 대한 논쟁과 양심에 대한 문제들을 확정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공예배와 하나님의 교회의 정치가 더욱 질서 정연하도록 규칙과
지침을 정하며 실책이 있는 경우 불평과 고소를 접수하고 그같은 것을 권위있게
결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이렇게 해서 정해진 명령이나 결의 사항은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경우는 그것들이 말씀과 일치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 결정을 내린 권한 즉 말씀에서 정해진 권한이기 때문에 경건하게 그리고
복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행 15:15, 19, 24, 27-31, 16:4;
마 18:17-20).
3. 사도 시대 이후로 모든 노회나 총회는 전체적인 회의이든 아니면 개별적인
회의이든 실수를 범할 수가 있으며 실지로 많은 회의에서 실수가 범해졌다.
그러므로 그 회의들을 신앙이나 실제 생활을 위한 규칙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신앙과 실제 생활면에서 도움을 주는 것으로만 이해해야 한다(엡 2:20; 행 17:11;
고전 2:5; 고후 1:24).
4. 노회와 총회들은 교회에 관한 것 이외의 것을 다루어서는 안 되고
국가와 관련이 있는 사회 문제를 간섭해서도 안 된다. 다만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
겸허하게 청원하는 형식을 취하거나 또는 위정자의 요구가 있는 경우 양심껏
충고하는 방식을 위할 수가 있다(눅 12:13-14; 요 18:36).
여기에서 회중교회가 제기한 것은 노회와 총회가 각 지역 교회를 지배하는 권한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회중교회는 대회나 총회를 개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시대의 정황 속에서 다소 이해되어질 여지가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지적해 온 바와 같이, 교회가 너무나 중앙집권적이었고, 명령을 내리는 상부 교회 기관에서 권위를 가진 고위 성직자들이 거의 다 부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로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회중교회의 문제점들로 제기했다.
만일 한 지역의 개교회가 오류에 빠게 된다면, 아무도 권위를 갖지 않는 수평적인 교회들의 관계 속에서 과연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어떻게 고쳐줄 수 있는가? 반대로, 만일 하나의 지역교회가 올바른 신앙을 갖고 있는데도, 주변의 대다수의 교회들이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면, 누가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인가?
교회마다 다양한 주장들을 내세운다면, 각기 서로 다른 교리들을 내세워서 결국에는 변질된 다양성만이 남게 될 것이다. 교회의 최종 권위 기관이 없다면, 통일성과 일체성의 원리를 하나도 지켜내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