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주님께서 쓰시는 사람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누가복음 19:33-36)”.
모르는 사람에게 “주가 쓰시겠다 하라(31절)”는 이유를 대고 남의 짐승을 가지고 갈 수 있을까요? 이런 설명만으로 주인이 나귀를 선뜻 내어준 것을 보면, 이적을 행하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인한 명령일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의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예언했습니다. 뜻인즉 예수님이 다윗의 나라를 재건함으로써 종말을 초래하는 분으로 오심이 아닌, 그의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 섬기시는 ‘겸손한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정치적 임금이 아닌 십자가에 처형되실 임금으로 오심을 말씀해줍니다.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35절)”라는 말씀을 봅시다. 제자들은 말안장 대신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에 얹고 예수님을 모셨으며,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마지막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임금으로서가 아니라, 작은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십니다. 세상 권력자들이라면 난리법석을 떨며 초호화판 마차를 타고, 열렬한 환호 속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하며 입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탄생부터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심으로써, 이미 모범적인 겸손의 사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역시 겸손의 왕으로 하셨을 뿐 아니라, 가장 아픈 십자가 나무 형틀에서 처형을 당하심으로 이 지구상에서 더 이상 겸손할 수 없는 낮은 자리에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이 볼 때는 나귀 새끼를 타는 것이 초라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 작은 나귀 새끼 입장에선 최고로 운 좋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온 천하의 주인이시고, 하나님 되시며, 세상을 위해 죽기까지 하실 그 주님에게 선택받은 것은 ‘동물의 왕’조차 해내지 못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보잘것없는 동물인 나귀 새끼는 지금까지 그 존재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인간 구실조차 못하는 사악한 이들보다 훨씬 행복한 존재가 됐습니다.
예언자와 평화의 왕이시고, 스스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대제사장 예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나귀새끼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제자들은 이 나귀를 주인으로부터 데려갈 때 “주님께서 필요하셔서 쓰시겠답니다”라는 한 마디만 했을 뿐입니다. 어떠한 다른 말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저 역시 나귀새끼처럼 주님의 한 마디로 쓰임받는 도구가 된다면,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고 가슴이 뛸 것입니다.
필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교회의 사랑 덕분에 이웃을 향해 제 시선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그 사랑을 위해 이웃에 베푸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굳어갑니다. 이 굳은 마음의 길은 예수님과 함께 걸어감으로써 가능한 것임을 늘 잊지 않고 말씀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직장이나 생업을 위해 종사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누며, 비록 외로움과 고통이 밀려와도 겸손한 마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후, 십자가 나무 형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고자 하십니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나이까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마태복음 26:17-18)”.
여기서 ‘성안 아무에게 가서’라는 표현을 볼 때, 당시 예수님께서는 성 밖 좀 떨어진 곳인 베다니에 계셨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내 때’란 장차 예수님께서 죽임당하실 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유월절 식사가 제자들과의 마지막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최후의 만찬’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 완성을 위한 죽음과 부활이 임박했음을 가르칩니다.
‘성안 아무에게’보다, 마태가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명해 줬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다 아시고, 실제로 성 안에서 유월절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준 주인을 만났기에 제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겠지만, 오늘 우리로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 분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음 역시 깊은 뜻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귀 새끼를 제공한 사람이나, 최후의 만찬장을 제공한 사람은 아마 천국의 자격증을 소유한 사람이 아닐까요.
여기서 ‘유월절’이란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를 말합니다. 유월절의 뜻은 ‘넘어가다, 지나가다’이고, 행사는 ‘니산월(3-4월)’ 14-21일 한 주일 동안 계속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을 받고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날에는 무교병을 먹기에 ‘무교절’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신 덕분에 축복의 행운을 잡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누구나 잘 아는 ‘베데스다 연못(Pool of Bethesda)’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신약 성경 예루살렘에 위치한 못입니다. ‘베데스다’는 양의 문 곁에 위치하며, 둘레에는 다섯 행각이 있어 수많은 병자들이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 후 가장 먼저 입수한 사람은 어떤 병이든 나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속 병자는 무려 38년 동안 입수하지 못해 아픔을 겪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38년 만에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주권적으로 병 고침의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이 병자는 그야말로 최고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요즘 같으면 로또에 당첨된 것입니다.
‘베데스다’라는 이름은 사본들마다 차이를 보이지만, 대부분 학자들은 ‘자비의 집’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베데스다’ 이름은 웬지 예수님의 기적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의사들로부터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했지만 아무 효험 없이 도리어 병만 중해지던 차에, 예수님께서 그곳을 지나신다는 소문을 듣고 염치 불구하고 무리 가운데로 끼어들어 예수님 뒤에서 예수님 옷에 손을 대어, 놀라운 구원을 얻었습니다(마가복음 5:25-28).
또 예수님께서는 ‘거라사’인 지방에서 귀신들린 자를 직접 찾아가셔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거라사’는 갈릴리 호수 동쪽 도시로 ‘가다라’와 함께 데가볼리 지역에 속합니다.
데가볼리는 헬라 알렉산더 대왕과 그 장군들이 팔레스타인 안에 세운 10개 도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무덤에서나 산에서 광인의 생활은 그야말로 비참했습니다. 그는 쉬거나 잠잘 줄 몰랐으며, 끊임없이 소리 지르고 자기 몸에 상처를 냈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긴 예수님께서는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광인의 비참한 모습을 어루만지시고, 그를 구원하셨습니다(마가복음 5:1-8).
또 한 사람, 여리고(히에리코)의 ‘삭개오’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리고의 지리적 위치는 베뢰아에서 요단강을 건너가는 상인들의 길목으로 세관이 필요한 곳에 있었습니다. 길르앗 지방에서 유입되는 향유를 비롯해 여러 상품에 대한 통관세를 징수했는데, 여리고는 발삼나무 산지로 특산물 세금도 징수했습니다.
당시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는 로마 공권력의 보호 아래 자율적으로 세금도 징수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허가받은 도둑’이라는 원성을 들었고, 유대 사회에선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삭개오(자카이오스)라는 이름은 ‘청결, 의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세리장이라 함은 당시 세관장, 세무서장 급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쳐다보시면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누가복음 19장 5절)”고 하십니다.
당시 삭개오는 동족의 혈세를 거두어 로마에 갖다 바치는 자로서 창기나 이교도들과 동급으로 취급되던 더러운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 주변에는 아무도 그와 가까이 하지 않았고, 게다가 키가 작아 따돌림과 왕따를 당하기 쉬운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자였지만,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너무 기쁘고 즐거웠으며, 놀라운 하늘의 축복을 만끽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이 모든 인물들은 고통 속에서 도저히 희망을 볼 수 없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친히 찾아가셔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구원을 얻게 해주셨습니다. 이 시대 크리스천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들이야말로, 진정한 ‘인생 역전’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열망하고 갈망하는 겸손한 곳에는 항상 예수님께서 찾아오신다는 깊은 신앙으로,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며 구제함으로, 삭개오와 같은 회개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모범적인 신앙인이 돼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 하라” 담대하게 선포하는 주님의 일꾼으로 사용되시길 축복합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