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3-24)”.
위 말씀 가운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영(靈)과 진리(眞理)’라는 의미로, 중생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의 빛을 받은 자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영이시니”란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킨다가보단, 물질 세계에 속박된 인간들을 위해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즉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고 물리치셨습니다.
두 번째 시험으로 성전 꼭대기에서 마귀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고 대답하시며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고 강하고 담대하게 외치셨습니다.
세 번째 마지막 시험으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유혹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고 강력하게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며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절대 순종하는 여호와의 종이셨습니다. 하지만 마귀는 이것을 뿌리채 흔들기 위해 예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이에 참을 수 없는 절박한 굶주림의 욕구보다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을 시험하기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로, 세상 권력을 통한 ‘자기 숭배’보다 하나님만을 경배할 것을 말씀으로 밝히심으로써 ‘여호와의 종’ 신분을 지켜내셨으며, 신실한 예배자의 모습으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겉모양은 화려하고 향기로 가득 채운 오늘날 예배에는 순종과 겸손 대신 자기 자랑에 심취해 예배가 아니라 세상 집회나 다름없는 요란한 빈 깡통의 소리가 날 뿐니다. 예배가 마귀들이 춤추는 놀이 공간으로 변질돼 안타까울 뿐입니다.
‘마귀’의 헬라어인 ‘디아볼로스’는 본디 ‘대적자, 참소하는 자, 반대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마귀는 악한 천사들의 우두머리로 언급되며 ‘사단, 바알세불, 옛 뱀, 공중권세 잡은 자’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당하심은 인간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유혹을 뿌리치시고, 신앙인들에게 스스로 모범답안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성을 시험하는 말입니다. 메시아라면 기적을 통해 능력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능력을 보이고 기적을 행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고난을 통해 죄를 사하는데 있었습니다.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은 육적·물질적 시험이었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라”는 유혹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물질을 얻으려는 욕망을 충동질한 것입니다. 여기에 “떡으로만”으로 답하신 것은 물질적 필요와 함께 영적 양식의 필요성을 강조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후 성전에 들어가셔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누구도 성전 안에서 물건을 가지고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히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으로 받으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셨습니다. 당시의 성전은 헤롯이 건축한 제3성전이었고, 매매 장소는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매매하는 자들’이란,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유대인들은 돈으로 제물을 사서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던 것을 이릅니다.
‘돈 바꾸는 자들’이란, 각국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유월절에 모여 성전에서 반 세겔의 세금을 내는데 유대 화폐로 바꿔주는 환전상들로 보여집니다. ‘비둘기 파는 자’란,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바칠 능력이 없는, 극심하게 가난한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인 비둘기를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나 이 시대나,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에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은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예물을 진실한 마음으로 바치는지, 아니면 자신을 내보이며 자랑과 교만한 마음으로 바치는지 하는 질적 문제가 중요했습니다.
꼭 교회 안에서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세상에 나아가는 성도들은 장소를 망라하고 각자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신실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개인의 이익에 따라 불평과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되며, 오롯이 정의롭고 신실하며 정직하고 공평하게 업무를 수행하면서, 부조리나 부패 등 공정하지 못한 유혹을 과감히 물리치는 예배자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배는 가만히 앉아 고개만 숙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살아 움직이는, 다시 말해 행동하는 예배자가 돼야 합니다. 거짓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온전히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나아가는 삶의 현장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섬기는 자세이고, 올바른 예배자로서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혼내시고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성전 안에서 환전하거나 매매하는 자들이 얼씬도 못하게 물리쳤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개인의 이익이 아닌 공공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나라와 이웃을 위해 옳지 못한 것은 과감하게 외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용기 있는 크리스천으로서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는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하나님 앞에 회개의 예배자로서 성숙한 믿음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마가복음 1:15)”.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은 유대인들에게 그 말이 친숙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과 같은 이상적 인물을 통해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보호하시는 나라가 세워지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잡힌 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시작됐고, 그 선포는 회개의 예배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향해 회개를 선포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외치십니다. 회개는 후회가 아니라, 참 예배자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회개란 하늘의 소망을 두고 예수님의 시선으로 방향을 잡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의 신실한 행동으로 삶의 방향을 영원한 하늘나라 예배자로서, 이 세상을 위하던 삶에서 하나님 나라 예배자로 살아가는 삶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회개라는 말을 지긋지긋하게 들어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하라는 말을 듣는다 해서 회개가 일어나진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힘을 실어 주십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 순종하면서 회개를 선포해야 합니다.
예배자들은 삶의 현장에서 부도덕하고 옳지 못한 일이나 거짓과 부정부패, 공평치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곳을 향해 외쳐야 할 것입니다. 옳은 일에는 박수를 보내야겠지만, 그렇지 못한 곳에는 당당히 맞서 외치며 참된 예배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국민들은 스웨덴 엘란데르 총리 같은 정치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타게 프리초프 엘란데르는 청년 시절 급진주의 활동을 한 좌파 정치인이어서, 총리로 선출됐을 때 왕과 국민들이 많은 걱정을 했습니다. 특히 노사분규로 힘들어하던 경영자들의 거부감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취임 후 그의 행보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검소하게 살았고 총리 시절 20년 넘은 외투를 입고 구두도 밑창을 갈아가며 오래 신었다고 합니다. 부인 역시 검소했고, 집권 23년 동안 국회 개원식에 참석하기 위해 입던 옷은 단 한 벌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특권 없는 삶을 실천하며 온전히 국민들을 위해 정직하며 청렴하게 살았던 분입니다.
그는 총리 시절 관저 대신 임대주택에서 살았고, 출퇴근도 관용차 대신 어머니가 직접 운전하는 차를 이용했습니다. 특히 임대주택은 재임 시절 서민들을 위해 지은 아파트였습니다.
심지어 23년 간 집권한 후 퇴임할 때, 살 집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당원들이 급히 돈을 모아 스톡홀름에서 차로 2시간 거리 봄메쉬빅이라는 한적한 시골마을에 집을 장만해 줬습니다. 이곳에는 총리 시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타게 엘란데르는 떠났지만, 23년 동안 국민을 위한 그의 헌신은 스웨덴에 정치 교과서로 자리잡아, 스웨덴을 세계에서 최고 행복한 나라로 만든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반면 한국의 정치 현주소를 바라보니 정말 구역질이 날 지경입니다. 어떤 젊은 정치가는 65세 이상 노인들의 무임승차 문제를 꺼내 이익을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차라리 100세 시대를 맞아, 65세에서 70세로 무임승차 연령을 상향 조절하자고 제안했다면 무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하철 적자 운행이 마치 노인들 때문인 것처럼 매도하다니요. 구조조정을 위해 지하철공사 인원을 감축하려 하면 노조에서 시위나 데모를 일삼고 있는 현실은 왜 거론조차 하지 않은 채, 애꿎은 노인들만 탓하고 있으니 개탄스럽습니다.
이 나라 경제를 일궈낸 주역들이 누구인가요. 누구 때문에 이 시대에 그들이 호화롭게 살고 있는지 제대로 인식도 못하는 이들이 무슨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일제시대 이후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처절한 보릿고개를 겪어 봤습니까?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자신을 희생해가며 자녀들을 공부시키고, 산업 역군으로 가정과 국가를 일으킨 이 시대의 주인공들을 헌신짝처럼 생각해선 안 됩니다. 마치 자신들이 이 나라를 일으킨 양 왜곡하며 철없이 날뛰는 세대들이 무슨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은 돈 한 푼 기부하지 않으면서 마구잡이식 공약으로 나랏돈을 자신의 정치에 이용하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입니다. 숱한 사법 리스크로 진작 물러났어야 할 사람을 위해 충성하고, 옳지 않은 일에도 “아니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그대들이 무슨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나요?
지방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거기에 이용당하는 사람들도 참으로 애처롭고 한심합니다. 불투명한 미래에 국민들 속은 더 깊이 타들어가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꼼수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결국 희망의 불씨는 크리스천들의 몫이 아닌가 싶습니다. 먼저 우리 신앙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습으로, 세례 요한처럼, 사무엘처럼, 예수님처럼 옳지 않은 일은 과감히 지적하는 사회로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하나님께로 시선을 옮기는 그 예배가 예배다운 예배일 것입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