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 김명혁 목사의 생애와 사상 2] 역사신학
2월 18일 오전 별세하신 본지 편집고문 김명혁 목사님의 삶과 신학을 기리기 위해, 안명준 박사님의 논문 ‘남양 김명혁 목사의 생애와 사상’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성경의 계시, 성령의 조명 더해
필요한 것이 바로 ‘역사적 안목’
흑백논리 뛰어넘는 사고의 틀
양극을 붙잡는 역동적 통일성
Ⅲ. 남양 김명혁 박사의 신학과 사상
1. 종말론적 역사관
남양 김명혁 박사의 신학은 그의 역사관에서 출발한다. 그는 처음에는 역사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역사의 중요성을 바로 알지도 못했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 수학과 물리와 영어와 체육을 좋아했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 입학하여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1학년 때 택한 국사·동양사·서양사 개론 과목들의 성적이 모두 낙제를 겨우 면할 정도였다. 3·4학년 때부터 역사과목의 성적이 A 정도 되었고 서양사 분야의 졸업논문 성적을 우수하게 받았으나, 역사의 중요성을 아직 충분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후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특히 목회자의 삶에 있어, 역사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삶의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 성경의 계시와 성령의 조명이 절대로 필요하지만 그것과 함께 절대로 필요한 것이 바로 역사적 안목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남양은 이렇게 말한다. “나 자신과 이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분별하고 습득하는 세 가지 척도와 자원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성령의 조명과 역사적 안목이다”라고 한다. 그는 역사의 중요성을 바로 인식한 펠리칸(Jaroslav Jan Pelikan) 박사, 라투렛(K. S. Latourette) 박사, 롤런트 베인턴(Roland Herbert Bainton) 박사 그리고 존 스토트(John R. W. Stott) 박사의 역사관을 따라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책 제1권이며, 교회사를 하나님의 책 제2권이라고 했다. 그들로부터 역사적 안목을 갖게 되었다.
남양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그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 영원과의 만남이라고 한다. 시간의 통합적 연속 속에서 역사의 의미를 찾고 있다. 먼저 그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세가지 견해로 소개한다.
첫째, 역사란 과거에 (자연계와 인간계에) 일어난 사건들(facts)을 정확히 기록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예, 랑케)고 한다. 따라서 역사가의 과업은 “단지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데 있다”고 말한다.
둘째, 역사란 과거의 사건들을 해석하는 것(interpretation)이라는 견해가 있다(예, R. G. 콜링우드)고 한다. 즉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보는 것”이 역사라는 견해이다. 따라서 역사가의 과업은 그의 마음 속에 과거의 역사를 재연하는 것(reenactment)이라고 말한다.
셋째, 역사란 과거의 사건을 정확히 기술함과 아울러, 그것을 오늘의 삶의 상황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이라는 견해(예, E. H. 카)라고 한다. 즉 역사는 사건과 해석을 포함하며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를 포함한다는 견해로서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붙잡는 것이 바로 역사라는 견해이다.
남양은 세 번째 견해를 따라,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 없는 대화(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라는 정의에 동의하면서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만남과 대화가 역사요 역사적 안목이라고 했다.
과거의 역사는 나와 상관이 없는 역사가 아니다. 오늘 내가 당면하는 문제들을 이미 과거의 역사가 먼저 경험했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사를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오늘의 나의 문제와 나의 이야기를 읽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과거의 역사를 읽을 때 “그들은 내가 당면하는 문제를 어떻게 대처했는가” 라는 진지한 질문과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된다고 한다. 이 같은 태도를 가지고 과거의 역사를 읽을 때 오늘 나의 위치와 문제를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하게 되고, 오늘의 현실을 바로 살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얻게 되며, 내일을 향한 보다 풍부한 통찰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역사란 과거와의 끊임없는 만남과 대화인 동시에, 미래와의 끊임없는 만남과 대화이기도 하다. 기독교의 역사는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이며 종말론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알파의 포인트와 오메가의 포인트를 손에 쥐고 계시는 분이시기에 그렇다.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이 미래지향적 역사관을 보여주었고, 이레니우스와 어거스틴과 쿨만이 미래지향적 역사관을 수립했다는 것이다. 현재와 미래와의 끊임없는 연계를 유지할 때 오늘을 승리할 수 있는 삶의 지혜와 용기를 터득하게 되는데,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총화(總和)이기 때문이다.
2. 종말론적 초연
그는 종말론적 초연을 강조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나 밖에서 그리고 종말론적 완성의 점에 서서 내려다 보는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사후체험을 한 사람이 자기 밖이나 자기 위에서, 자기를 내려다 보는 초연의 안목을 지닐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를 내려다보는 위치를 멀리 종말론적 오메가 포인트에 둘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가지게 될 때,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어 나아가는 구속사의 과정과 방편들이라는 인식을 가질 때, 그 사건들의 의미는 크고 분명해진다.
특히 오늘의 내가 구속사의 한 점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인식하게 될 때,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삶의 의미와 용기와 기쁨을 발견한다. 이와 같은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가지게 될 때, 나에게 가해지는 오해와 멸시와 박해도 나를 도무지 불쾌하게 만들지도 낙심하게 만들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보람과 기쁨과 용기를 가지고 역사 창조의 사명을 묵묵히 수행해 나아가게 된다. 이와 같은 역사적 안목을 지닌 신앙의 사람들을 성경은 묘사하기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히 11:37).
하나님 주권, 개인 역할 다 붙잡아
하나님 주권 100%, 개인도 100%
우리 사고와 삶 모든 영역에 적용
삶 가벼워지고 종말 사모하게 돼
3. 양면성의 종말론적 역사신학
이는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용과도 다른, 양극을 붙잡는 역동적 통일성을 주장한다. 그의 이런 사상은 어거스틴의 전공자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 사상에서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삶의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계시’와 ‘성령의 조명’이 절대로 필요하지만, 그것과 함께 절대로 필요한 것이 ‘역사적 안목’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역사적 안목은 ‘현재와 과거와 영원과의 만남’으로 주어지며 ‘종말론적 초연’의 자세를 지니므로 주어진다고 말했다.
이 같은 역사적 안목을 지니게 될 때 우리가 지니게 되는 사고와 관점의 틀 중의 하나는 ‘양면성’의 사고와 관점이라고 한다. 이것은 흑백논리를 뛰어넘는 사고와 관점의 틀이며, 그것은 동양적인 ‘중용’과도 다르다고 한다. 그것은 ‘양극을 붙잡는 역동적 통일성(dynamic unity holding both extremes)’의 사고와 관점이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개인의 창조적 역할’을 동시에 붙잡는 사고라고 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100% 인정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창조적 역할을 100% 인정하는 사고인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전폭적으로 인정하고 따르는 하나님 중심적 삶을 살았다(롬 11:36).
예를 들면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지야말로 최상의 비참이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지식이야말로 최상의 축복이다(강요Ⅰ, 17:11)”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을 전폭적으로 인정하고 따르는 삶은 나 개인의 적극적이고 창조적 역할을 인정하고 강조하는 삶인데,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사도행전에도 두 가지를 동시에 붙잡는 ‘양면성’의 사고와 관점이 나타난다고 한다(행 14:3, 19-20, 고전 15:10, 골 1:29). 하나님의 주권 아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아가는 사람은 역사를 창조해 가는 역사의 주역이 되고 이와 같은 ‘양면성’의 사고는 우리 사고와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다.
역사적 안목과 양면성의 사고를 지닐 때, 우리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관점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지역주의나 민족주의나 인종주의를 넘어서는 보편적이고 초월적이고 세계적인 관점이며, 하나님이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시는 눈으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남양은 역사적 안목과 양면성의 사고를 지닐 때, 자연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자세를 지니게 된다고 했다.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이 인간들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영광 나타냄의 존재로 보게 되며(시 19:1-4),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의 존재로 보게 된다고 한다(시 148:1-14).
십자가의 피는 인간들만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통일되게 하는 구원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도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통일되게 하는 구원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하게 된다.
역사적 안목과 양면성의 사고를 지닐 때, 우리는 고난과 죽음과 종말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와 자세를 지니게 된다. 고난은 일반적으로 범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형벌이지만, 하나님께서 자주 사용하시는 훈련의 도구임도 알게 된다. 고난을 통해 사람은 자신을 바로 알게 되고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며 이웃을 바로 알게 된다. 고난을 통해 사람은 성숙하게 되고 겸손하게 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됨을 알게 된다(고후 1:3-9).
죽음도 이제는 저주가 아니라 천국의 축복으로 이르는 관문이 됨을 알게 된다(고전 15:51-58). 성도의 죽음은 귀중한 것임도 알게 되어(시 116:15), 따라서 고난과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종말을 바라보며 종말을 준비하는 자세를 가지게 된다고 한다(딤후 4:7,8).
종말론적 의식을 가지고 자신과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면서, 가볍게 사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전 7:29-31, 빌3:8). 그리고 종말을 사모하게 된다(빌 1:23, 고후 5:1-10). <계속>
안명준 박사
평택대 명예교수
성서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