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칼럼] 서머나 교회
서머나 교회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가운데 칭찬만 받은 두 교회(서머나·빌라델비아) 중 하나다(계 2:8-11).
서머나(Smyrna)라는 단어는 ‘몰약’이란 뜻이며, 도시 이름은 헬라어 Smurna(스무르나)에서 왔고 ‘고난’이란 뜻을 갖고 있다. 이 도시는 현재 튀르키예 이즈미르(Izmir)란 이름으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유일하게 남아 있다.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56km 정도 떨어진 곳의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지리적으로 헤르무스 강이 유입되는 걸프 지역에 있다. 소아시아 중심 관문으로 무역이 성행한 상업 도시이며, 로마 시대엔 의술과 과학의 중심지요 포도주로도 유명했다.
서머나는 B.C. 1,000년쯤 그리스 식민지로 건설됐다. B.C. 7세기 성전을 지어 아테나(Athena) 여신에게 봉납했으며, B.C. 575년 리디아 왕 알리아테스(Alyattes)에 의해 파괴됐다 재건됐지만 B.C. 545년에 다시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됐다. 그 후 400년 간 서머나는 촌락으로 존재하다 B.C. 301-281년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 현 위치인 파구스 산(Mount Pahus) 경사지에 재건되었다.
종교적으로 볼 때 서머나는 로마 제국 및 제국 종교와 밀접한 관계였다. 이곳은 B.C. 196년 소아시아 최초로 로마 제국의 신전이 건설된 곳이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는 A.D. 26년 이전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어머니 리비아(Livia), 그리고 원로원을 기념하는 성전 건축을 허락했다. 따라서 이 도시는 로마 황제 숭배에 철저했고, 산 위에 세워진 성채는 ‘서머나의 왕관’이란 이름을 받았다.
이 신전들은 A.D. 177-180년 지진으로 무너졌으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후원으로 곧 재건됐다. 에베소, 버가모에 이어 소아시아 주변 황제 숭배 신전의 총괄 책임을 맡았다.
황제 숭배에 대한 압력은 도미티안 황제(A.D. 81-96) 시대 급격히 확장됐다. 또 이곳엔 유대인 회당이 있었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다(계 2:9). 이 유대인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이 있었고,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은 로마가 추구하는 세계 평화를 반대하고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고 고소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로마 제국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유를 금했고, 곧 극심한 핍박으로 이어졌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과 협상해 가며 성도들을 희생시켰다. 이러한 핍박으로 서머나 교회 초대 감독 폴리캅(Polycarp)은 A.D. 156년 86세에 산 채로 화형당해 순교했다.
요한은 서머나 교회에 말씀하시는 “처음이요 나중이신 이”로 묘사했다(계 1:17, 22:13). 예수님을 영원한 주권자로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서머나 교회가 당면한 고난, 시험, 환란의 상황과 직결된다(계 2:10-11). 즉 그들이 섬기는 분이 역사의 주인이며 창조주임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또 예수님을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계 2:8)’로 설명하면서, 교회의 사랑을 친히 체휼(體恤, 히 4:15) 하시는 분으로서 충성하는 교회에 같은 부활과 영생을 주는 자라고 설명했다(계 1:17-18, 히2:14-15; 4:15). 당시 교회 상황을 꿰뚫어 아시는 분이시다.
요한은 무려 9개 절을 통해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라고 언급하고 있다. 환난(患難, 드림신)은 충성과 신자들이 받는 외래의 압박이고 궁핍(窮乏, 프토케이얀)은 그 환난의 결과 겪게 되는 내면적 빈곤이었다.
충성된 신앙인은 지금도 환난과 궁핍을 겪게 된다. 신앙인이 이 세상에서 호강하고 풍요를 누리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서머나 교인은 이러한 환난 중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인내한 교회로 칭찬을 받고 있다. 황제 숭배 강요, 유대인의 훼방, 사회적 핍박, 경제적 궁핍 중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신실함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형태 박사(한남대학교 14-15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