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내 안에 공의와 정의로운 십자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신명기 16:18-20)”.
재판장이란 이스라엘 공동체의 기강을 바로잡고 죄인을 재판하며 의인을 옹호하는 이들입니다. 이 시대의 판사와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백성들의 여러 사건들을 해결하는 자들로 임명하시고, 3가지 원칙을 주셨습니다.
첫째 굽게 판단하지 말라, 둘째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 셋째 뇌물을 받지 말라. 특히 판결하기 어려운 재판이 발생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소에 올라가 제사장이나 재판장들에게 물어 사건을 해결해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윤리적 공동체를 형성해 발전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습니다. 특히 모세의 과중한 업무를 본 장인 이드로가 만든 부장 제도는 오늘날에도 쓰이는 탁월한 아이디어입니다.
사사 시대에는 이스라엘 지도자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삿 2:16), 왕정 시대에는 재판과 가르치는 일을 같이 했으며, 의회 회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마땅히 공의만 따라야 하는 것은, 공의가 모든 법의 근본 원리이자 권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비만 오면 산간 계곡에 폭포 같은 하수가 이뤄져, 어떤 장애물에도 넘쳐 흐릅니다. 이처럼 공의와 정의가 어디서나 거침없이 흘러넘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글을 쓰다가 문득 지인이 보낸 유튜브 영상 내용이 충격적입니다. 정치 이야기는 쓰지 않으려다, 이 영상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소개합니다. 제목은 이렇습니다. ‘전과자와 죄수들이 정당을 만들고 국회에 출마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도대체 나라가 이래도 되는 것인가요? 아무리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하지만, 이미 재판 중인 전과 4범이나 1·2심 재판에서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잡범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 정당을 창당하고, 당 대표로 서로 연대한다고 국민들 앞에서 히죽거리면서 소리치고 있습니다.
이들이 국민들을 얼마나 개무시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들로 취급하기에, 감히 선거에 나오는 비루한 짓거리를 하는 것인가요? 국민들은 범죄자들로부터 이렇게 모욕과 조롱을 당해도 심기가 괜찮은 건가요? 국민들이 정말 아무 느낌이 없다면, 나라의 주인으로써 얼마나 자존감도 자긍심도 없기에 그냥 보고 있는가 싶어 불쾌하기만 합니다.
이재명은 이미 알려진 대로 전과 4범에다, 친형수에게 입에 담지 못할 패륜적 쌍욕을 퍼부은 자가 아닙니까? 게다가 지금은 국민의 등을 친 부동산 사기 사건인 대장동·백현동 사건과 성남FC 사건, 쌍방울 대북송금 등 7개 사건에 10가지 범죄혐의로 1주일에 2-3회 재판을 받고 있는 범죄 주요 혐의자입니다.
도대체 이런 자가 공당의 대표를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대한민국 76년 헌정사상 처음 보는 정당 대표입니다. 이전의 대한민국 같았으면 이실직고하고 감방에 갔거나 은퇴하고 조용히 지낼 처지인데, 뻔뻔스럽게 공당의 대표를 맡고 국민 앞에 나설 수 있습니까? 혐의도 뇌물, 배임 등 전형적인 권력형 부정과 비리로, 잡범에 속하는 범죄들입니다. 정당 당규까지 고쳐 대표직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그 당 수준을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조국은 어떻습니까? 파렴치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간교한 인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르바이트 서류 조작 등으로 딸을 시험 한 번 치지 않고 대학까지 가게 하고 의사까지 만들었으니, 정말 대단한 자식 사랑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정말 불행한 처지가 돼 버렸죠. 딸은 결국 고등학교 학력으로 주저앉았고, 아내는 징역형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조국 자신은 1·2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입니다.
이런 자가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지 않았다고, ‘무죄 추정의 원칙’을 외치며 정당을 창당하고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합니다. ‘국회의원을 왜 하려 하는가?’라는 기자들 질문에 “국회의원이 되어 ‘쓰검’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궤변을 늘어놓은 것을 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쓰검’은 ‘쓰레기 검사’를 줄인 말입니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형사 사건 피의자 두 사람이 연대한다는 것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들이 국회의원을 하겠다는 것은 국회를 이용해 자신을 방탄하겠다는 뜻이고, 국회를 자기들의 방패막이 소굴로 삼겠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범죄자들이 ‘검찰 독재’를 운운하고 ‘정권 심판’을 입에 올리는 뻔뻔함에 국민들은 부끄럽습니다. 정말 철면피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더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이런 자들을 지지하는 국민입니다. 정말 뇌가 없는지, 영혼이 썩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정치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입니다. 이런 자들이 바퀴벌레 같이 정치판에 기어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정치는 그 국민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국민들이 정신을 차리고 이들에게 추상같은 회초리를 들어, 다시는 이런 잡범들이 정치판에 얼씬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번엔 정말 국민들이 정신 차리고 달라져야 합니다.”
잘 읽으셨나요? 지금 대한민국은 기가 막히는 정도를 넘어, 자칫 큰 위기에 빠질 수 있는 위험한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더구나 기독교인들은 지금 사순절 기간 내면의 깊은 회개와 울부짖음으로 나라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언론부터 시작해 종교계·법조계·의료계, 그리고 교육계·문화계 등, 곳곳에 부패와 비리가 넘쳐나고 공정과 정의가 상실됐으며, 심지어 마약과 도박, 살인과 방화, 음주 난행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까지 빼앗기는 무질서한 현실 가운데, 우리 기독교는 애통하며 일제시대를 다시 떠올리면서 민족과 조국을 구하는데 최선을 다해 기도로 무장하고 싸워야 하겠습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아낌없는 수고와 봉사를 다해도 시원찮을 판에, 입법을 논하는 국회의원들이 오히려 국법을 어기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이런 의원들이 도대체 왜 필요할까요? 국회라는 권력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방패막으로 삼아 국민을 우롱하는 모습은 오히려 삼국시대보다 못한 것 같습니다.
국민들이 분별력을 잃고 무식해서 그렇다면, 학계 교수들과 종교계 지도자들이 나서서 국회를 향해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 이 땅 국민들을 안전하게 지켜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고난주간이 시작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순절 마지막 주일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군중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예수님을 향해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치며 열렬히 환영합니다.
군중들은 압제의 로마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의 꿈인 다윗의 나라를 소망하며, 그 소망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이뤄질 것을 기대하면서 열렬히 환호합니다. 반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아주 위험한 인물로 보면서 냉랭하게 쳐다보았습니다. 잠시 후 열렬히 환호하던 군중들 태도는 돌변합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한 패가 되어, 예수님을 반대하는 살인 동조자가 된 것입니다.
힘없이 체포된 예수님을 보면서 자신들의 소망과 꿈이 깨어졌음을 인식하고, 오히려 그를 죽이라고 크게 소리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너도나도 목청을 높여 더 큰 소리로 외쳐댑니다.
제자들 역시 수난당하시는 예수님을 버립니다. 베드로는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제자들은 십자가 처형 현장에선 두려워 도망칩니다. 반면 여인들은 끝까지 예수님 십자가 곁에 머물며 자리를 지켰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한 뒤 곱게 안장한 아리마대 출신인 요셉도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보며, 백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사순절과 고난주간, 주님을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기 위해 자선과 단식, 기도를 열심히 하던 중 어떤 이유와 마음의 혼란으로 주님을 배반하고 거부하는 성도들이 되지는 않았습니까? 나만의 이기적인 뜻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예수님을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주님이 아닌 다른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쏟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에서 더 철저히 고립되셔서, 또 다시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합니다.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버려도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이십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적대자들까지도 미워하거나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주님께서는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용서하셨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증명하셨고, 질서와 공의, 공정과 상식은 물론 정의로움으로 사랑을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고난주간의 시작인 오늘 주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을 기억하고, 새 마음으로 세상 안에서 그 길을 가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 부활이라는 영광을 가져왔듯,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십자가 삶에도 영원한 생명이라는 큰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시대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공의와 정의를 위해 이제 나서야 하겠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속이고 자신들의 부귀와 영욕을 위해 흉악한 범죄를 도구 삼아 악의 세상으로 만들어 가는 저들을 대적하여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