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정직한 사람은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사도행전 1:9-11)”.
성령강림주일 또는 오순절은 그리스어로 ‘50’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 원래 유대인들이 밀농사 수확을 시작하고 밀로 만든 두 개의 빵을 바치는 제삿날을 말한 것인데, 유월절 이튿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해당됩니다. 유대인들은 이 날을 모세가 율법을 받은 날(샤부옷)로 기념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로부터 50일째 되는 이날, 제자들이 모인 곳에 성령이 강림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령에 충만하게 되어 복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으므로 이 날을 ‘성령강림절(聖靈降臨節, Whitsunday)’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사실상 기독교 초대교회의 성령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전도, 유대와 사마리아 전도, 땅 끝까지 복음 전도한 순서에 따라 기록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오직’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라’는 앞 절의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 시키는 강력한 접속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증인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완전한 종인 예수님께서는 이 사명을 떠맡으셨으며, 그것을 제자들에게도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33년 동안 사시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으신 사명을 철저히 감당하시며, 제자들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품으셨고, 특히 부여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와 실행을 거치면서 하나님과의 약속은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으리만큼 철저하게 이행하십니다. 심지어 십자가 형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약속을 지켰던 분이심을 믿고 신뢰해야 하겠습니다.
성도들은 쉽게 기도하고 찬송하며 약속하지만, 모두가 허울뿐임을 금세 드러내고 맙니다. 심지어 담임목사님께서 그랬던 적도 있었습니다. 설교 시간에 성도들 앞에서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딴청을 피우며 넘어가던 모습은 주의 종이 아니라 마치 사업가 같았습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신가요? 다시 꺼내기 싫은 기억이지만, 다시는 이런 사례가 없도록 하기 위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산 어느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교회는 복지센터를 지은 뒤 이름을 공모했는데, 어느 장로가 제출한 이름이 뽑혔습니다.
이후 담임목사님은 수요일 저녁예배 설교 중 당선자를 발표하신 뒤 시상을 하겠다고 성도들 앞에서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복지관 개관일쯤 열린 당회 회의 중 “며칠 후 복지관 개관을 한다”면서 여러 준비사항을 말씀하신 뒤 “당회를 마치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명칭이 뽑힌 장로가 “잠깐만요! 저번에 목사님께서 수요 예배 설교 중 당선자에게 시상을 하겠다고 하셨다면서요”라고 물었는데, 목사님은 팔짱을 낀 채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다른 장로가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자”고 했습니다.
이에 당선됐던 장로는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성도들 앞에서 하신 약속을 어찌 지키지 않는 것인가요? 목사님의 신뢰도에 많은 지장을 줄 수 있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모든 당회원들은 일제히 함구했습니다. 자신들이 싫어하는 사람에게 시상하려니 배도 아프고 돈도 아까웠는지, 모두 한통속이 되어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장로는 상금을 바란 것도 아니고 해서, 순간 다른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컴퓨터로 몇 자 적어서 상장을 만들어 시상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교회는 복지관 개관 날짜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고, 그 장로에게는 세월이 지나도 기록이 남으니 자료로 활용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이 교회는 역사적 자료를 중시하지 않아, 나중에 하나하나 구하고 알아보려면 엄청난 시간과 물질이 소요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기록을 남기기 위해 상장을 만들어 시상하자는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목사님과 당회원 모두 찬성했습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지요!
이 장로는 후일 피치 못할 사정으로 교회를 옮겼습니다. 그곳에서 새롭게 세워질 교회 이름 공모에서도 당선이 됐는데, 걸려 있던 상금은 다시 그 교회로 헌금했답니다. 이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가요?
앞선 교회에서도 상금을 줬더라면 다시 교회로 헌금했을 것입니다. 교회와 목사님은 약속을 지켜서 좋고, 작명자 장로에게는 가문의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교인들도 그 장로의 지혜를 본받아 더욱 믿음 생활을 충만하게 하지 않았을까요?
이처럼 약속은 철저히 지켜져야 합니다. 특히 크리스천이라면 생명처럼 귀하게 약속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약속은 신뢰이고 우정입니다. 그리고 약속은 사회를 아름답게 가꾸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드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연결고리가 되는 것입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약속(約束)은 ‘장래 일을 상대방과 미리 정하여 어기지 않을 것을 다짐함’, 정직(正直)은 ‘사람이나 사람의 성품, 마음 따위가 바르고 곧음’이라는 의미입니다.
특히 성경 말씀은 일점일획도 속임이나 왜곡 없이 완전히 신뢰할 만한 말씀임을 크리스천들은 확실히 믿고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약속을 진실하고 신실하게 이행하십니다. 거짓이 없는 맑고 순수한 말씀 앞에 우리 마음도 늘 정결하고 새로워짐을 잊지 말고, 그대로 지켜야 할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한 지 40일째 되는 날 제자들에게 사마리아 땅끝까지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씀을 부탁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업이 비로소 완성된 것입니다.
이러한 승천의 기록은 구약성경에도 나타납니다. 창세기의 에녹과 선지자 엘리야는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시간 자주 고백하는 사도신경(使徒信經)에서는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우편에 앉으시며”라고 고백합니다.
‘하늘’이나 ‘우편’이란 말은 공간적 의미가 아니라, 본래 하나님 상태로 복귀하셨다 혹은 하나님 아버지의 권능을 부여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공간적인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부활 후 40일 만에 승천하셨다는 기록에 대해서도 굳이 날짜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부활하신 당일 승천하신 것처럼 기록돼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부활 후 40일 만에 승천하신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여러 성도님들도 잘 아시다시피 ‘40’이라는 숫자의 신학적 의미 때문일 것입니다.
출애굽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십계명을 받기까지, 꼬박 40일을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성경에서 ‘40’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앞두고 기도와 금식으로 ‘40일 간’ 준비하신 후 마귀의 시험에서 당당히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오르는 것이 이토록 엄청난 일인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즉시 만나고 그 분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허락하셨으며,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있을 곳을 미리 마련해 주셨음을 의심치 말고 확실히 믿어야 하겠습니다(요 14:2-4).
이처럼 성령강림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우편에 오르셨기에 그분의 지체인 우리도 언젠가 그분과 영원히 함께하리라는 희망을 안고, 그 분의 약속하심을 철저히 신뢰하며 살아가게 됐습니다.
또 이 약속의 구원의 소망을 비신자들에게도 널리 전하기 위해 복음 선포의 의무도 일깨워야 할 것입니다. 특히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중대한 약속을 깨트린 아담과 하와의 최후는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방주를 만들라는 명을 성실히 이행했을 때 노아와 그 가족은 구원을 얻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고,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철저하게 이행하셨습니다.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시며 99세의 고령에도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약속을 이행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밖에 수많은 약속을 이행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으로 사울 왕을 주셨고, 이어 다윗 왕을 주셔서 이스라엘을 부강한 나라로 만든 사건과 구약의 에스더, 엘리야와 엘리사, 다니엘과 요셉과의 약속은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430년 동안 애굽의 노예 생활로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를 통해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약속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철저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인내심 부재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시행착오를 겪다 낭패를 당하는 모습을 허다히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에는 어른들이 늘 ‘정직하게 살라, 약속은 철저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배고프던 시절이지만, 정직함과 약속 이행을 헌법처럼 여기고 지켜왔습니다.
정직한 사람의 본보기로 미국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나 링컨 대통령 이야기를 비유로 많이 들었고, 다음엔 링컨 대통령, 그리고 대한민국 역사 인물 중 정직하게 살았던 많은 사람들을 줄곧 소개하셨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걸핏하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보편화되어 참으로 기가 막힌 현실에는 정직함마저 무너진 현실 앞에 한숨만 길게 내뱉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더구나 거짓말과 약속 이행을 하지 않는 사람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놀라운 현실 앞에, “이게 나라냐”고 통탄하는 백성들의 아우성은 그칠 줄 모릅니다.
예수님은 신실하고 정직하게 약속을 철저히 이행하셨지만, 한 가지 지켜지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장차 오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지켜질 때, 세상의 악함이 모두 드러날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은 그 약속을 확실히 믿고, 성도로서의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