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라고 하면 어떤게 떠오르시나요? 바덴바덴의 기적과 전 세계가 하나가 되며 냉전의 벽을 허물었던 서울올림픽, 그리고 열정을 쏟아내며 명장면을 만들어냈던 선수들의 투혼. 모두가 하나같이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명장명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능 올림픽’은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가요? 과거 70년대부터 우리나라가 종합우승을 그야말로 밥먹듯이 하며 전세계에 우리나라를 기술강국으로 인식시킬 수 있었던 대회였죠.
우리나라에서 흔히 기능올림픽라고 일컫는 대회의 정확한 명칭은 ‘world skills’로, 스페인 마드리드에 본부가 있는 월드 스킬스 인터내셔널(World Skills International)이 주관하는 대회입니다. 만 17세에서 22세의 청소년만이 참가할 수 있는 대회로 청소년 근로자간의 기능경기대회를 통해 최신 기술 교류와 각국의 직업훈련제도 및 그 방법 등에 관한 정보 교환을 주목적으로 하는 대회이죠. 1950년부터 시작한 대회에 우리나라는 67년 스페인 대회부터 참가하기 시작했으며, 1977년 대회부터 1991년 대회까지는 9회 대회 연속 우승을 차지하고 이후로도 수많은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쥘 정도로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는 대회이기도 합니다.
기능올림픽에서 호성적을 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기술은 세계적 수준까지 성장해왔습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발표한 2022년 기준 OECD 국가별 과학기술 혁신역량지수에서 우리나라는 기술강국이라고 불리는 미국, 스위스, 네덜란드, 독일에 이어 세계 5위를 기록, 세계적 수준의 높은 기술 수준을 보유하고 있는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산업적 기반이 전무한 상황에서 선진국들의 원조를 발판 삼아 높은 교육열에 따른 인재 양성, 그리고 끊임없는 연구 개발로 어느덧 우리나라는 기술 강국이 된것입니다.
오늘 만나본 시니어는 국내 금형과 정밀기계 분야 최고 전문가인 동시에 기능올림픽 금형부문 심사위원이면서 기술사 출제 위원으로도 활동하시면서 우리나라 초정밀 가공기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신 한정빈 전 삼성그룹 고문입니다. 한정빈 고문은 서울대 기계공학과와 연세대 대학원을 나와 대우전자㈜, 국방과학연구소, 기계연구원, 자동차부품연구원, 삼성전자, 삼성자동차, 삼성전기 등 국내의 핵심 산업현장을 두루 거치면서 신기술 이론과 현장 실무를 접목시켜 우리나라 기계산업의 생산현장을 혁신적으로 개선시켜온것으로 평가받고 있으십니다.
“한참 꿈 많던 고교시절 담임선생님이 무조건 공대를 가라고 하신 것이 계기가 되어 전공을 기계공학으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육사에 뜻을 두고 있었는데, 당시 선생님의 권유가 운명을 결정 지은 거죠. 대학 진학 후에도 훌륭하신 은사님의 가르침을 통해 기계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졸업 후에 대우전자 전신인 대한전신전기 공장에 입사하며 기계기술의 기본기를 쌓으며 매력을 느꼈던 것이 현재의 저를 있게 만든 것 같습니다.” 대학과 첫 직장에서 좋은 인연으로 기계공학에 대한 매력을 느낀 한정빈 고문은 현장에서 금형산업과 정밀 기계 분야에서 발전을 이끌어갔습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금형기술은 저속가공이 주된 기술이었습니다. 이 기술은 가공시간이 길고 금형납기를 맞추는 데 문제가 많았죠. 품질 면에서도 금형부품의 치수와 표면 거칠기, 형상정밀도면에서 매우 나쁜 영향을 주어서 추가 가공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고속으로 기계 가공을 할 수 있도록 공정을 바꿨습니다. 기존 방식을 탈피하기 위해 스위스와 일본의 초고속가공기 메이커들과 기술제휴를 진행했습니다. 제가 직접 업체에 찾아가 초고속가공기계의 규격을 제시하고 발주해 제품을 제작해 구형의 기계들을 최신 고속 가공 기계들로 교체했습니다. 덕택에 금형제작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여 우리나라 제품들이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한정빈 고문은 해외 수입에 의존했던 정밀 기계 부분의 국산화에도 큰 기여를 하셨습니다. “지금은 비디오 촬영을 스마트폰이나 전문 장비를 이용하고 있지만 90년대에는 가정용 캠코더가 큰 인기였습니다. 당시 가전 업계에서도 캠코더를 출시해 판매했는데, 핵심 부품인 렌즈가 100%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전량 수입에 의존하다 보니 일본 현지 단가보다 비싼 가격에 사올 수 밖에 없어 가격 경쟁력이 없었고, 수입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제작에도 차질이 생기기 일쑤여서 여간 손해를 보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국산화를 위해 TF를 구성해 핵심부품인 렌즈부터 시작해 국산화가 되지 않았던 여려 부품들까지 생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같은 성과가 날 수 있었던 건 현장에서 체득한 전문성과 새로운 기술을 익히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대의 기술은 단순히 경험으로만 가공과 조립을 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설계와 가공, 조립, 수정을 수월하게, 그리고 빠르고 정확하게 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이론적인 배경과 실패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저는 직원들을 기능대학이나 산업대학에 순차적으로 보냈고, 때로는 박사학위까지도 취득하게 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한정빈 고문은 기술 융합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현장에 적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기술은 점점 복합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접점이 없는 분야들이 서로 연결되어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다루는 인재 역시 가만히 머물러 있으면 안 되죠. 그래서 저는 한 사람이 적어도 2~3가지의 기능을 가지도록 하였고, 이를 위해서 간부들과 제가 직접 직원들을 훈련시켰습니다. 개인들의 능력이 좋아져서 생산량이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회사로서도 낭비요소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손가락으로만 지시하는 ‘핑거 포인트 엔지니어’, 입으로만 아는체하는 ‘마우스 엔지니어’가 절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정빈 고문은 기능올림픽 심사위원 역시 인재 양성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기능 올림픽 출전 자격은 전국의 공업고등학교나 마이스터고 학생들이 지역대회와 전국대회를 거쳐 선발되게 됩니다. 국가대표로 선발되게 되면 저희 같은 전문가들과 함께하며 기술 전수를 포함 대회 참가시 노하우 등을 전수하며 국제대회를 준비하게 됩니다. 90년대 초반까지 많은 학생들과 기능올림픽에 출전하며 금메달 입상하는 순간에 함께했습니다.” 당시 올림픽을 함께 하며 금메달을 따며 국위선양을 했던 선수들은 현재까지도 산업 최전선에서 기술 전문가로 종사하고 있습니다. 한정빈 고문은 지속적으로 그들과 교류하며 자문을 지속적으로 해주고 계십니다.
한정빈 고문은 지난 50여 년 동안 금형과 정밀 기계 분야에서 직접 부딪히며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들을 한데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모으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제가 대학 진학해서 느꼈던 기계에 대한 호기심, 입사하며 느꼈던 업무에 대한 매력, 이것들을 모두 남기고 싶습니다.” 사람에 대한 감동으로 시작한 일이었기에 어쩌면 그 마무리도 사람을 남기는 일에 가장 열정적으로 몰두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한정빈 고문은 “현대의 첨단기술은 반드시 이론과 실무경험이 50%씩 겸비되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인터뷰를 마무리했습니다. 늘 끊임없는 공부하고 기술을 익히는 데 주저함 없는 노신사를 보며, 이런 열정이 꿈만 같던 기술 강국이라는 일들을 지금의 현실로 만든 주역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