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랑과 용서의 아버지 성령님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 20:22-23)”.
참으로 특별한 한 주간이었습니다. 지난 5월 15일은 불교 창시자 석가모니 탄생 2568년을 맞이하는 날이자 스승의 날이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은 기독교의 성령강림주일로 이어지는 매우 아름다운 한 주간이었습니다.
석가모니는 참으로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 없습니다. 석가모니 탄생을 기념해 많은 사람들이 사찰을 찾았는데, 기독교 신자들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쉬는 날이라 명승지를 찾아 힐링을 위해 찾아갔겠지만, 석가모니 상 앞에 절을 올리며 소원을 비는 기독교인도 있었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경 말씀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아닐까요?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교회 지도자들 때문에 많은 양들이 잘못된 신앙으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제대로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석가모니는 인간적으로 참으로 위대한 분이니 그 앞에서 예의를 지키는 정도는 이해가 되지만, 그 앞에서 절을 올리며 소원을 비는 행위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사울과 다름 없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므로, 교회 안에서는 철저한 교육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성령을 준비하셨고, 죄 사함을 선포할 사명도 준비하셨습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고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말과 거의 같은 말씀이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시면서 주어진 바 있습니다(마 16:19).
특히 오늘 본문 구절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①제자들은 이때에 성령을 이미 받았다. 그리고 ②오순절 성령강림을 약속하신 예수님께서 가지신 성령을 미리 나누어 받았다 등입니다. 요한복음의 여러 구절들(14:16, 26, 16:7, 13) 참조해 볼 때, 두 번째 해석이 무난하다고 보입니다.
이번 주일은 ‘성령강림주일’이었습니다.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성령을 받고 싶어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1-2)”는 말씀은 창조 사역의 첫 번째 행동을 묘사하는 독립된 한 구절로 해석해야 합니다.
2절 내용은 1절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내신 것에서부터 시작됐음을 의미합니다.
태초는 영원으로부터 시간이 시작되는 첫 출발점이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비롯된 시점입니다. 특히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하나님만이 천지 만물의 유일한 근원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무(無)로부터 우주의 생명체들의 근본 실체를 창조하셨고, 그 실체를 바탕으로 만물을 지으셨습니다(창 1:21).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란 창조된 물질의 원시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조직된 구조도, 정돈된 형상도, 어떤 종류의 윤곽도 아직 나타나지 않은 텅 빈 상태를 말합니다. 깊음의 바다라는 뜻으로도 통용됩니다(7:11, 8:2). 여기서 ‘깊음’이란 히브리어로 ‘테홈’, 여기서는 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신’은 ‘숨’ 또는 ‘영’이라는 뜻이며, 이것을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전통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는 둥지 속 어린 새끼들을 먹이는 어미 새처럼 창조물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뜻을 잘 나타내주는 말입니다(신 32:11).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었습니다(창 2:7). 그렇게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이 되시어 제자들에게 다시 생명(生命)의 생령(生靈)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생령’이란 살아있는 일반 국민, 살아있는 넋이라는 뜻으로 생명(生命)을 이르기도 합니다.
창조 때의 생령은 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입김이었지만, 오늘 예수님의 생령은 주님의 부활로 죄를 용서받은 우리가 천국에서의 삶을 위해, 새 인간으로 변화되어 태어나게 하는 사랑의 입김입니다.
교회 안에서 다른 형제가 자신에게 한 잘못을 누구나 쉽게 용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 자신이 먼저 용서하지 않으면 괴로운 사람 역시 나 자신입니다. 자신에게 잘못한 성도에게서 오는 화로 인해 신경이 예민해지고 잠도 편히 이룰 수 없으며, 식사 후에도 소화가 제대로 안 돼 매사 모든 일에 짜증이 앞서, 제대로 일도 못하는 사태를 불러 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예수님께 고합니다. 성도로부터 당했던 괴로움을 씻어내기 위해 “주님 제가 괴롭고 슬픕니다. 제발 그 성도를 용서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그 십자가를 끌어안고,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하며 용서해 주라는 나지막한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범죄한 형제에 대한 용서의 횟수를 질문한 마태복음 18장 15-20절의 본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면 됩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같은 인간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범위를 제시하십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490회 이상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형제가 자신에게 아무리 많은 죄를 짓는다 해도 계속 용서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무조건적으로 무한한 용서를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시대 랍비들은 죄를 ‘세 번’까지만 용서하라고 가르쳤기에, 베드로는 예수님께 칭찬을 듣기 위해 ‘일곱 번’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하신 것은 490번까지만 용서하라는 뜻이 아니라, 잘못을 회개하는 자는 무제한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도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성령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큰 능력이 바로 용서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도행전 2장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표현의 능력을 주셨고, 다른 언어로 말하지만 서로 말이 통하게 됐음을 강조해주십니다. 말하자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서로 말이 통해 대화하게 되고, 결국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서로의 모든 다름을 용서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성령을 받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천국으로 가려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직장에서 그리고 생업 전선에서, 어떤 이는 학교에서, 또 어떤 이는 여행지에서 말입니다. 그 만남 중에 비록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부주의와 무관심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심지어 혐오와 적개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외면하고 배척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임을 깨닫지도 인정하지도 않은 채 기억에서 지워버립니다. 그러나 기억은 결코 지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그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하시고, 바로잡을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좋은 예로,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장면을 봅시다. 왕의 권력으로 사랑하는 부하의 아내를 취하고 충성스런 부하를 죽이기까지 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해 죄를 떠오르게 하십니다.
내 죄를 남들이 모르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머리털처럼 수없이 많은 죄들을 다 기억하십니다. 지금은 순간적으로 아무도 모르게 넘어갈지 모르지만, 심판대 앞에서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늘 정직한 생활과 정의로운 삶으로 세상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필자 역시 형제를 미워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친구를 미워하고, 그로 인해 마음에 괴로움을 겪습니다. 그러다 내 정신건강이나 심지어 육체의 병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형제를 위해 오히려 감싸주고 그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사랑할 때, 비로소 성령님께서는 내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할수록 주님의 십자가는 점점 멀어져갈 뿐이고, 나 역시 천국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는 비운의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통해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아름다운 문화로 주님의 세계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같은 교회 안에서 서로 시기하고 모함하며 화목을 어지럽힐 때, 사랑과 용서의 열린 문은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사회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오히려 신앙인들이 더 나쁜 생각을 품고, 적극적이지 않고 부정적인 성도들을 목격할 때마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잠시의 피곤함이 있더라도, 크리스천이라면 남들이 싫어하는 일들도 손수 떠안고 살아가려는 부지런한 움직임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가만히 앉아 있을 때 저절로 다가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님 설교 때만 ‘아멘’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비 신앙인들을 위한 ‘사랑과 용서의 아멘’으로 전환되면 좋겠습니다.
입으로만 하는 사탕발림의 가벼운 아멘이 아니라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묵직한 사랑과 용서가 하모니로 다가오는 깊은 아멘은, 세상을 환히 밝혀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진실한 믿음이 될 것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연합하여 하나님의 무한하신 아가페의 찬양을 퍼트려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세상은 온통 사랑과 용서의 장으로 바뀌고, 전도의 열린 문은 자연스레 다가올 것입니다. 주님의 사상과 정신을 깨닫고 배우면서, 십자가가 우리에게 선물하는 뜻을 분별하는 크리스천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